기나긴 여름이 지났다.그리고 여전히 낮엔 덥다.아침에 너무 바쁜 나머지 겨울 바지를 잘못 입고 온 오늘은 더욱 그렇다.복잡하고 지루하며 희망해 왔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던 여름 내내,나는 실제 이상의 더위를 느꼈으며,바지를 잘못 입고 온 오늘은 또 더욱 그렇다.덥다.
그러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하며 심장 박동수가 서서히 증가하는 듯 하다가 갑작스레 확 뛰고 (혹시 부정맥이 있는 건 아닐까..)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두뇌 한 구석에서 모종의 호르몬을 대량 분비하라는 신호가 내려지고 있는 느낌이 그만 10분의 1초도 안 되는 찰나 사이에 감지된다.내 노마디즘.유랑을 향한 은폐된 욕구가 자극되는 시그널이다.
노마디즘.그냥 떠나기? 그것 만은 아니다.그렇게만 치부하기에 노마디즘은 너무나 중요한 인간의 속성이다.유목과 유랑의 습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성향 중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정주하는 사람은 유랑을 원하고 유랑하는 사람은 정착하기를 원한다? 이것도 바보 같은 소리다.사람에게 선택지가 이 둘 밖에 없다면,그는 어쩔 수 없이 이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겠지만,그 와중에도 그의 소망은 내부에서 복잡하게 얽혀들고,그의 영혼과 육체의 위치는 이 둘 사이에서 복잡한 지정학적 반응에 의해 결코 경계선을 지울 수 없는 영토 한 점에 자신의 전 존재를 눕게 한다.그리고는 발딱 일어났다가 또 눕고,잔뜩 기어다녔다가 고개를 들고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그러다가 울고 체념하고 웃고 화를 낸다.유랑과 정착 사이에는 실로 바보스럽고 야단스러운 정신의 반응들이 있고 이로부터 온갖 법석이 벌어지는 것이다.그러니 사람의 선택을 양분해서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냥 편의를 위한 분류법에 지나지 않는다.그렇게 생각된다.
내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조그만 방 안에 서서 이책저책 무작위적으로 뒤지며 노마디즘과 관계된 여러 구절을 발견해냈다.그 문장들을 여기에 아무렇게나 흩뿌려 놓으련다.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지만,그래도 조그만 소기의 목적이라도 존재한다면,아마도 내 심장 박동수와 호흡수의 증가를 다스릴 유일한 방도라는 것,그것 하나이다.
= =
-1.여행은 지옥의 한 조각이다 (마호메트)
그런데 위대한 유일신교는 거의 모두 유목 환경에서 발생했다.
오딧세이 역시 일종의 노래 흔적이다.유랑하는 내내 오딧세우스는 노래를 남겼으며 그 노래들은 모두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 후세에 전해졌다.사물은 시이며,시는 노래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후세에 전한다. (이건 내 생각)
2.우리의 본성은 움직임 안에 있다.완전한 평온함은 죽음이다.(파스칼,팡세)
우리의 모든 비참함은 단 하나의 원인에서 발생한다.즉 우리가 방 안에 조용히 앉아있지 못한다는 것.
방 안은 불안을 야기한다.사람들은 누군가를 제거해야 할 때 방 안에 가둬놓는다.귀양은 구속에 비해 매우 가벼운 형벌이며 주로 귀족 계급이 부과받은 형벌이다.물론 어떤 귀족들은 귀양지에서도 갇혀 있긴 했지만.
3.거주에 대한 공포라는 심각한 병에 대한 연구 (보들레르,내면일기)
그는 매일 밤 다른 침대에서 잠들고자 했던 것 같다.(다른 파트너가 아니라 다른 침대다)
4. 인생은 환자 저마다가 침대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병원과 같다.나는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그리고 이 이사라는 문제는 내가 내 영혼과 끊임없이 논의하는 주제의 하나다 (또다시 보들레르,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라도)
방랑과 여행은 우울증의 치료법이다.정착으로 인한 우울증,우울증을 발현할 수 밖에 없는 정착.
5.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베를렌이 랭보에게 붙인 이름)
그러나,바람 구두..아무나 신는 게 아니다.자기 발에 맞는 구두를 신어야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테니까.그러나 그 어느 순간,사람은 구두 사이즈에 아랑곳없이 바람에 몸을 싣기도 한다.발을 조여드는 통증을 참으면서 말이다.
6.오랫동안 나는 내가 모든 가능한 풍경을 소유할 수 있다고 자신해왔다.(그래서 랭보,지옥에서 보낸 한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바람구두는 이런 멘트까지 가능하게 했다...
7.유랑하는 자에게 집 짓기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그 작업은 결코 완성되지 못할지니 (시경)
자신이 노마드인 사람은 노마디즘에 대한 글을 써서는 안된다.부질없다.그의 문장은 시시각각 날아가고 책들은 산산이 형해화되기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래도 만약 그가 글을 쓴다면,그 책은 공중과 허공에 떠서 자신의 문자들을 사방에 뿌려대고 있을 것이다.
8. 스스로 길이 되기 전엔 길을 따라 여행할 수 없다.(석가모니)
석가모니는 죽기 전,제자들에게 말했다.'계속 걸어!'
9.길 없는 길.신의 아들들이 자신을 잃고 동시에 자신을 찾는 곳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사람들은 공허함 속에서 ,움직임 속에서,자신의 사념의 속도를 유지한다.고속버스 안에 앉아서 스피드 건으로 스스로의 두뇌 속도를 체크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자신의 속도가 의외로 빨라져 있다는 걸 알고서 당황할 것이다.
10. kosmopolities eimi (나는 세계시민이다) - 디오게네스
통 속에 앉아있던 디오게네스는 갑갑한 통 안에서도 여전히 유랑 중이었다.그는 굴렀고 구름 속에서 사유했다.셰익스피어의 햄릿도 보르헤스의 알레프도 마찬가지다.그들은 한 곳에서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대의 종교들이 거대한 성전을 짓고 그 안에서 온갖 경제와 권력 행위를 자행하는 것은,원래의 종교 행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바보짓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그들은 으리으리하고 빛나는 거대 건축물 안에서 썩어가고 망해간다.결국 거대한 교회의 뾰쪽탑은 죽음의 한 양상이다.
반면 우리는 항상 '떠남 이후'를 궁금해하고 ,'떠난 와중' 에 벌어지는 일들 역시 '떠남 이전'과 근본적으로는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벌어지는 일이라고 상상한다.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실제로 떠나봤더니 그랬다.그러나 그것은 오해다.노마디즘의 어원 속에는 ,'법','정의' '분배' 따위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어원 한 구석에도 노마드의 뜻들이 숨겨져 있다.즉 떠남 이후에도 일정한 정도의 법칙이 존재하고,그것은 정의에 기반한 것이며,그에 위반되는 것엔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는 것이다.즉,노마드는 결코 낭만적인 떠남이 아니다.
그래서 노마드엔 근본적인 잔혹함이 있다.노마드 민족이 세계를 지배했을 때의 역사엔 피비린내와 채찍과 잔학함이 언제나 돌출된다.그래서 노마드는 언제나 극단의 칼날을 갖는다.노마드에 소유 감각이 없다는 말도 거짓말이다.다만 그 소유의 영속성에 대한 감각이 떨어질 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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