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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the rising sun -그들이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

신의 영화들/culture club

by 폴사이먼 2012. 9. 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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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이었던가 아니면 1965년이었던가.일단의 영국 대중 음악인들이 대대적으로 미국에 상륙했다.그들은 미국 팝 음악계를 점령했고 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거의 혁명적으로 달성했다.역사는 그 사건을 british invasion이라고 부른다.물론 대표주자는 비틀즈다.비틀즈가 미국에 끼친 영향을 셰익스피어가 문학에 끼친 영향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비틀즈와 셰익스피어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비틀즈는 비틀즈대로,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대로 역사에 이름을 새겨넣었다.그리고 우리 각각은 셰익스피어와 비틀즈에게 개인적인 친소관계를 가지는 것이고 말이다.

 

비틀즈 다음 타자는 당연히 롤링 스톤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 현재의 음악적 무게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 사실은 롤링 스톤즈가 아니라 애니멀즈(animals)라는 밴드다.이름이 워낙 애니멀스러워서 그렇지,음악적 역량이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며, 보컬인 에릭 버든의 목소리는 비틀즈에 비해 훨씬 야성적이고 남성적이었으며, 롤링 스톤즈에 비해서는 훨씬 미국적 블루스에 가까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알려진 그들의 노래는 house of the rising sun이다.우리나라 가수들도 심심치 않게 리메이크했던 이 노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팝 애창곡으로까지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노래는 그들의 오리지널이 아니다.영국 노래도 아니며,미국인들 사이에 불리워 왔던 일종의 전래 민요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아마 미국 이민 초창기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 노래를 만들었을 것이다.애니멀즈가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것도 아니다.이름만 대면 알 만한 많은 뮤지션들이 이 곡을 커버했었다.심지어 이 노래의 제목을 rising sun blues라고 붙인 음악인들도 있었다.그렇다,블루스.이 노래는 근본적으로 블루스다.

 

밥 딜런,조안 바에즈,지미 핸드릭스,니나 시몬,도어즈,레드 제플린,톰 포스터,마리안느 페이스풀,시니어드 오코너,트레이시 채프먼..그냥 생각나는 이름만 열거해도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왜일까,왜 이토록 많은 음악가들이 이 노래를 불렀을까?

 

그보다 house of the rising sun이란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부르는 뮤지션과 그들이 이 노래를 불렀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노랫말이 바뀌는 - 애니멀즈가 house of the rising sun을 빅 히트시키면서 그제서야 애니멀즈 버젼으로 노랫말이 굳어지게 되었다 - 이 노래의 어떤 면이 음악가들을 잡아다녔을까.생각해볼 만한 일이다.이 노래의 노랫말은 이렇다.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the Rising Sun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

My mother was a tailor
She sewed my new blue jeans
My father was a gamblin' man
Down in New Orleans

Now the only thing a gambler needs
Is a suitcase and trunk
And the only time he's satisfied
Is when he's on a drunk

Oh mother tell your children
Not to do what I have done
Spend your lives in sin and misery
In the House of the Rising Sun

Well, I got one foot on the platform
The other foot on the train
I'm goin' back to New Orleans
To wear that ball and chain

Well,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the Rising Sun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

 

이 노래는 뉴올리언즈가 배경이며, 범죄인 혹은 삶의 일정부분에서 파멸을 겪은 어떤 사람이 회한에 잠겨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아마 그는 누군가를 살해했던 것 같으며 도망자의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이제 기차를 타고 고향인 뉴올리언즈로 돌아가 자수할 모양이다.그래서 이 노랫말이 그리는 house of the rising sun은 아마 교도소를 뜻하는 것 같다.(이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그러나 어떤 버젼의 노래의 주인공은 poor boy가 아니라 poor girl이다.그녀는 어머니와 자신에게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를 죽인 적이 있으며,지금은 교도소가 아닌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이다.조안 바에즈의 1960년 버젼이 바로 이런 노랫말을 가지고 있다.

 

 


1937년 Georgia Turner의 노래 역시 주인공은 여성이다.다시 말해 해뜨는 집에 사는 사람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때로는 살인범 때로는 강도 때로는 성매매여성..이런 식이다.즉 사회적인 일탈자들,빈곤한 사람들,버려진 사람들,최하층의 사람들이 바로 이 노래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정조는 무척 슬프다.힘들고 고단하며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노래를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노래를 아주 명랑하고 즐겁게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물론 매우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되는 것만은 분명하다.절망에도 종류가 많고 세상엔 정말 수많은 슬픔들이 존재하듯 말이다.게다가 슬픔과 고통은 비명과 눈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너무나 진한 슬픔은 매우 건조하게 표현되기도 하고,사람을 잿더미 속에 던져버리기도 한다.마침내 슬픔은 관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그런 경우 슬픔에도 일정 기간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노래를 커버한 많은 뮤지션의 노래가 서로 다른 것은 매우 자명한 이치다.가령 20세기 중반 Dod Watson 과 Clerance Ashley가 부른 이 노래,아예 제목이 rising sun blues로 바뀐 이 노래의 정서는 애니멀즈의 그것과도 또 조안 바에즈와의 그것과도 매우 다르다.이 버젼의 정서는 근본적으로 늙고 지친 남자의 정서,과거의 회한을 곱씹는 사람의 정서다.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버젼의 주인공이 사회의 중상류층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그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기타를 튕기며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다.


 

 

 

1928년의 텍사스 알렉산더라는 american folk blues가수가 부른 버젼은 더 심하다.떠돌아다니던 흑인 유랑가수는,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이름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을 대상으로,바로 그들의 처지를 자신의 노래 속에 분명히 담아냈다.즉 이 노래가 겨냥하는 대상과,또 묘사하는 대상은 분명히 사회의 아랫쪽에 위치한 사람들인 것이다.이 노래들과 1960년대 애니멀즈가 부른 히트곡을 비교해 보라.엄청난 차이가 있다.

 

 

 

 


물론 영국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부른 노래이긴 하지만,이때 이 노래는 어느 정도 자신의 원형을 상실했다.소녀들의 함성과 비명 소리에 파묻혀 원래 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챠트 상위권의 빛나는 상업성이 공간을 점령한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의 정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이렇게 오래된 노래,이렇게 민중의 정서에 깊숙하게 뿌리박은 노래는 언제든지 자신의 기운을 회복하고야 마는 것이다.1960년대와 70년대 우리나라에서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귓속에 깊게 뿌리박힌 이유는,영미권의 히트곡의 아우라가 같는 위력 이외에도 또다른 이유들이 있다.바로 그 시절 힘들고 괴롭고 노동과 고도성장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어필하는 정서가 이 노래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 노래의 괴로움,이 노래의 슬픔은 언제나 듣는 사람의 멜랑콜리한 정서를 자극한다.니나 시몬 같은 멜랑콜리 싱어들이 이런 노래를 지나칠 리 없다.그녀는 스스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이 노래를 커버했다.

 

 

 

니나의 이 노래는 애니멀즈의 노래 보다 먼저 연주된 것이다.이 노래 역시 애니멀즈의 그것과 굉장히 다르다.또한 다른 사람들의 노래와도 다르다.니나 시몬은 좀 더 개인적인 차원의 불행 안으로,개인의 고뇌와 파편화 되어가는 중류층 정서의 고독 속으로 이 노래를 끌고 가는 듯 보인다.또다른 형태의 슬픔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21세기,아일랜드의 시니어드 오코너가 부른 버젼은 니나와도,애니멀즈와도 완전히 다르다.그녀의 커버는 아예 인간 세상에서 떠나와,인간 전체의 운명을 향하여 애도를 표한다.그녀는 천사 같은 목소리를 내며 지상을 벗어나 구름 위에서 사람들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토록 수명이 오래된 노래는 여러가지의 형태의 생명을 띠고 음악의 뜰에 출몰한다.그러나 그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그 모든 세월이 흘러도,이런 노래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몇몇 가지가 있다.첫번째는 이 노래의 정서다.슬픔과 고통,그리고  탈출구가 없는 절망.이런 정서가 극단적으로 표현되면 아무리 노래 자체를 편곡해도 노래가 완전히 변해지기 어렵다.그리고 두번째는 노랫말 그 자체.사회의 최하층에 존재하는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그들이 처한 밑바닥 세계의 숨막힘이 표현된 이 노랫말은 그 어떤 버젼에 의해서도 완벽하게 변형될 수 없다.세계의 운명을 노래하든 개인적 절망을 얘기하든 최초의 노랫말은 결국 죄수나 창녀의 절망을 노래한다. 즉 태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이 노래는 분명히 그들의 것이다.다른 형태의 버젼은 그들의 절망을 통해 또다른 대상들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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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우리나라 음악엔 이같은 상황,이같은 정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그들도 절망을 노래하고 그들도 고통을 노래하지만,결코 사회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진 않는다.뭐,당연하다.장사가 될 리 없으니 말이다.빈곤은 이제 구질구질한 오물로 전락했고 슬픔은 소녀들과 실연당한 젊은이들에게 독점당했다.집없는 슬픔은 무능과 등치되고 한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추락하는 중간계급들은 자신의 안위를 다투기에만 바쁘다.사회적 안전망을 운위하는 정치가들이 등장하지만,그것은 오직 시혜의 차원이다.찬란한 레토릭일 뿐이다.

 

물론 house of the rising sun에서 빈곤 계층의 사람들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범죄인들과 사회적 일탈자들 역시 해뜨는 집에 살고 있다.우리가 무시하고 있어서 그렇지,그 주택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수효 역시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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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로 나서서 여기저기 악수하고 돌아다니는 세  정치가들의 범죄와 범죄인에 대한 입장은 과연 어떤가? 그들은 표를 따내기 위해서 이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아,적어도 한 사람은 입장을 표명했다.그녀는 언젠가 아예 사형제를 부활하자고 소리높여 외쳤다.죽여 없애자는 이야기,멸종시켜 버리자는 이야기..소멸에의 위협을 통해 그는 범죄에 대처하자고 했다.물론 그녀가 얘기한 것은 범죄 자체이지 범죄인이 아니다.그러나 그녀의 안중엔 '그들'이 없다.게다가 별로 독창적인 의견도 아니다.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종종 나오는 이야기다.그래서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멸종시키겠다고 위협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범죄 문제가 근절되는 거냐고.공포가 범죄의 속성을 이길 수 있는 거냐고.오히려 피해자에 대한 심정적 안전판 이외엔 별로 효과적인 기능이 없는 것 아니냐고,토씨 하나까지 꼬치꼬치 따지면서 질문해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노래의 어떤 버젼에서는 유곽에서 괴로워하는 성매매 여성이 등장하기도 한다.성매매와 섹스에 관한 문제..세사람의 대통령 소망자들은 도대체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있기는 한가?( 안철수의 룸살롱 출입과 목동의 30대 여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흑색 선전 이외에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전무하다)  적어도 나는 그들의 입에서 직접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차라리 이런 문제를 은근히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마치 묵시적인 동의라도 미리 해놓은 듯 말이다.

 

즉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발언에 대한 타겟과 범위들을 미리 정해놓은 것이다.중산층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허울을 너울처럼 둘러쓴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은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게다가 이 와중에 자신들의 고정적인 지지층들은 오히려 무시되는 경향까지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아직까지 매우 비슷하기까지 하다.특별한 변별성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쌓아올린 이미지들을 통해서 경쟁하고 있지,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들을 끄집어내서 논쟁을 벌이려고 하지는 않는다.그래서 모두들 비슷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좌초한 사람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자는 말,안철수에게서 비롯된 이 말 역시 나머지 두 후보에 의해서 앵무새처럼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안철수의 최초 발언이 워낙 두루뭉수리하게 처리되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이 문제 역시 레토릭으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표를 던지고 권리를 행사해야 할 유권자들이 구체적 질문을 퍼붓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미리 준비한 당근 몇 개만을 흔들며 시간을 버티어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말을 하면 매우 억울해 할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당근 조차도 우리 사회의 중간 계층들만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최하층의 사람들,빈곤의 늪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사회적 약자들,감옥과 유곽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그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선거 승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어쩌면 그들을 대변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사람들은 '출마'보다는 '출두'하게 될 것 같고,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모럴 해저드 뿐이다.(이 말은 중의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사람들은,2030세대를 중심으로 중산층이라는 환상이 깨어지고 있는 것을  세대간의 불화로만 파악한다.그리고 그런 경향이 마치 선거의 중요변수처럼 얘기한다. 세대간이 아니라 경제 계급 사이의 전쟁이라고 봐야 하는데도 말이다.(어쨌든 중노년층의 부의 편재,최상위계급의 재화의 독점이 재앙으로 다가오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대를 떠나서,또 계급을 떠나서, house of the rising sun에서 다뤄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얘기하는 소위 '후보'들은 아무도 없다.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언론은 추석 여론이 대선의 전초전이 되니 뭐니 하는 매년 반복되는 단골 레퍼토리들을 또 읊어대고 있지만,우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후보는 누구인가? 그들 중 누가 빈부의 격차와 부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셋 다 무능하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다.그러나 이 질문이 감성적으로 던져져서는 곤란하다.예를 들어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가 내지 누가 그들을 구원해줄 것인가..로 변형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얘기다.지금은 이름을 발음하기도 짜증이 나는 박정희가 민중의 구원자 내지 빈곤의 축출자로 회상되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그'가 우리를 보호했다는 환상,'그'가 우리를 구출해냈다는 넌센스.이것이 왕과 공주,독재자와 하수인들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도 저도 싫다면,우리는 그 '후보'들에게 좀 더 다른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천편일률적인 복지니,민주화니,경제정의니 이런 것들을 우선 접어두고 (완전히 버려두자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나 낙태에 대한 그들의 입장,종교단체에 대한 세금 부과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물어보아야 한다.반값등록금에 대한 원론적 입장만을 들을 것이 아니라,비리 사학과 그들의 비정상적으로 많은 전입금에 대한 입장을 물어야 한다.그것이야말로 이 세 후보가 얘기하는 정책 선거다.

 

그런 다음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YS식의 대답을 연발하는 후보를 배제하면 되는 것이다선거란 사실 이렇게 간단하다.그 다음에 우리는 또 질문할 것이다.폐지 줍고 다니는 노인들을 어쩔 거냐고,그들에게 생활보조금만 주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 거냐고.house of the rising sun의 주민들에 대한 솔직한 입장을 묻는 것이다.그런 질문들이 바로 추석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지겹지만 우리는 또 그렇게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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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즈의 그 젊었던 보컬리스트 에릭 버든은 지금도 노래한다.그리고 지금도 house of the rising sun을 부른다.2011년 어느 재즈 페스티벌에서 그는 이 노랠 불렀다.물론 지금은 기타 솔로에 많이 의존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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