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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영화들6.꼭 언급되어야 할 웰 메이드 영화들.<그을린 사랑><사라의 열쇠>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1. 12. 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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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웰 메이드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서는 설명되기 어려운 영화들도 있다.분명히 잘 만든 영화이고 확실한 메시지와 훌륭한 구조를 가지고서 정확하게 관객의 가슴들을 공략해내는 데도 불구하고,영화 자체가 주는 감흥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그래서 거의 스크린 앞에서 옴쭉달싹하지도 못한 채 포박당하고 만 듯한 감성적 경험 때문에,꼭 '좋았다'라고만 얘기할 수 없는 영화.,나는 지금 그런 영화 하나를 얘기하려 한다.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우리의 '좋고 싫음'을 간단하게 넘어서 버리는 것이다.

 

2011-25 <그을린 사랑>-드니 빌뵈브.

 

캐나다의 드니 빌뵈브가 만들고,루브나 아자발이 명연기를 보여주는 <그을린 사랑>이야말로 바로 그런 영화다.요르단을 무대로 촬영했지만 분명히 이슬람과 기독교도들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레바논의 상황과 그리고 현대의 캐나다를 무대로 하는,현대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의 이야기를,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화자로 해서,몇십 년 전의 전율스런 악행과 그 뒷세대의 응시와 추적을 이 영화는 담담하지만 정면으로,끈질기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이런 영화들,많다.이 영화 다음으로 얘기할 <사라의 열쇠>라는 영화 역시,그런 구조 -과거의 비극적인 역사 구조를 현대의 시점에서 탐색해나가는 -를 가졌다.그러나 이 영화엔 특별한 힘이 있다.그리고 이 힘이 이 영화를 또한 매우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 힘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거의 그리스 고전비극을 방불케 하는 충격적인 서사의 힘,이 서사들을 빽빽하고 치밀하게 엮어놓은 감독 드니 빌뵈브의 연출력,또 정교한 편집과,과거와 현재의 시간과 공간들을 바쁘게 진자운동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도록 사건과 사건,인물의 클로즈 업과 클로즈 업,길들과 길들을 연결시켜 놓은 영화적 구조,그 다음 20세기 최악의 역사 중 하나이면서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종교와 연관된 내전 속에서 참혹하게 유린당했던 한 여자와,그녀가 바라는 용서와 화합이 진정으로 가능한가,하는 묵직한 메세지.그리고 결코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진정성 있는 눈빛.

 

이런 요소들이 한데 얽혀서 이 영화는 관객의 눈길을 완전히 빼앗고 숨도 못 쉬게 만든다.그만큼 강렬하고 센 영상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첫 장면부터 그렇게 나아간다.황야와 바람과 새 소리 이후,radiohead의 you and whose army가 흐르기 시작한다.그리고 머리칼이 잘리우는 소년병들의 모습이 등장한다.아이들의 큰 눈과 대비되는 민병대 병사들의 가혹한 총신들.발꿈치에 새겨진 문신과 운명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실루엣들은 그야말로 세고 또 센 시작이며,가히 올해의 영화 장면 중 하나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현대.장소는 캐나다 어느 곳. 한 여인의 죽음이 찾아온다.그녀의 쌍둥이 남매인 시몬과 쟝은 예기치 못했던 엄마의 유언을 듣게 되는데,그것은 '자신을 관도 없이 나신으로 매장할 것'과 '얼굴을 아래로,즉 등을 돌린 채로 매장할 것' 그리고 '자신의 죽음엔 묘비와 묘비명이 필요없는데,그 이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여인의 변호사는 쌍둥이에게 그동안 존재를  알지 못했던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형)을 찾아서 편지를 전달하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전달한다.그리고 '침묵이 깨어지고 약속이 지켜졌을 때 묘비에 이름을 새기라'는 최후의 수수께끼가 무슨 지령처럼 하달된다.

 

역시 강렬한 시작이다.퍼즐풀기가 시작될 거라는 신호.죽은 엄마는 아이들이 받게 될 정서적 충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그리고 영화는 곧장 엄마인 나왈의 일생과 그녀의 과거를 따라나서는 아이들의 여정을 로드 무비식의 플래시 백과 정밀한 교차편집을 이용하여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왈의 과거가 밝혀지기 시작한다.그녀는 난민촌 출신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오빠들에 의해 연인이 살해당하고 자신도 명예살인 직전에 할머니에게 구출된다.그녀가 낳은 아이는 이슬람 난민캠프로 입양되고 자신 역시 마을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나중에서야 아이를 찾아나서지만 아이가 수용되었던 곳은 기독교도들의 폭격에 의해 풍지박산 나있다.그때 그녀는 아이의 복수를 위해 자진해서 이슬람의 킬러가 되고 기독교도들의 우두머리를 암살하고 만다..그러나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이렇게 평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한 에피소드.

아이를 찾으러 남부로 가는 도중 그녀가 탄 버스는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서 검문당하게 되고 이슬람 사람들은 모두 다 죽임을 당한다.그때 나왈은 자신이 기독교도라며 십자가를 내보이며 자신의 목숨을 구한다.오직 그녀 혼자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이렇게 삶은 질기게 계속되고 화염 속에서,또는 총살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 씬은 이 영화의 수많은 박진감 있는 장면 중 단 하나에 불과하다.<그을린 사랑>은 이런 종류의 장면들로 가득 차 있는데,이런 감정적 충격이 주는 효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나왈과 나왈의 아이들이 닥치게 될 상황들을 미리 예측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때로는 그 예측을 가능하게 했다가도 전혀 엉뚱한 곳에서 비극적인 방식으로 허를 찌르는 등,우리의 감정을 얄미울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데 사용된다.또한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원제 incendies (동란,전란,화염)의 이미지를 그대로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왈의 삶이 이 정도의 비극으로 끝날 리 만무하다.그녀는 이번엔 기독교도 민병대의 사설 감옥에 무려 15년 동안이나 정치범으로 수용되고,굴종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기독교도들은 가장 잔학한 고문자인 아부 타렉을 투입해서,그녀를 반복적으로 강간해서 임신하게까지 만든다.이에 그녀가 저항하는 방법은 오로지 '노래'다.그녀는 '노래 부르는 여자'로 불리우는 것이다.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그녀의 노래를 감정적으로 제시해서 관객에게 쉴 틈을 주는 은혜 따위는 베풀지 않는다.그것도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혈육을 찾는  딸의 여정을 나왈의 그것과 똑같은 길에 배치함으로써,영화는 지나친 멜로드라마로의 경사를 막아낸다.딸이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또 한번 변화하는 것이다.그러나 딸인 시몬의 길 역시 험난하긴 마찬가지다.아직도 종교 사이의 적대적인 반목이 가득한 그곳에서 시몬은 나왈의 동네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못한다.오히려 딸은 부족의 명예를 더럽힌 여자의 자식이라며 따돌림을 당하기까지 한다.

 

지속적으로 교차하는 이런 구조 - 플래시 백의 반복이란 상당히 영화적인 모험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드니 빌뵈브는 시종일관 이 방식을 밀어붙인다- 는 결국 가장 극한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그것은...

(여기서 잠깐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등장하니,영화를 보실 분은 더 이상 글을 읽지 마시라)

 

 

 

나왈을 강간해서 쌍둥이 아이인 시몽과 쟝을 임신하게 만든 그 아부 타렉이 바로 나왈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이 사실은 정말 미묘하게도, 영화의 플래시 백들에 의해서 나왈의 쌍둥이 아이들 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관객들의 두뇌를 가장 적절한 시간차에 의해 기습공격해서 거의 망연자실할 지경에 이르르게 한다.(오빠가 누이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장면은 이 영화가 오리지널 연극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명장면으로 연출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스스로의 뒤집혀진 구조에 의해서 나왈의 아들인 니하드의 지난날을 완성시킨다.아들이야말로 영화 도입부의 소년병이었던 것이다.그는 무시무시한 저격병에다 전쟁광으로 자라고,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가 그들에 의해 고문자로 변신한 다음,또다시 이름을 바꿔 캐나다로 망명했던 것이다.그리고 삶의 참혹한 우연이 나왈과 그를 영화 도입부의 어떤 수영장에서 만나게 했던 것이다.나왈은 그의 발꿈치에 새겨진 문신에 의해 그를 알아보지만,(그래서 이 스토리의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채지만) 아들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때 아마도 나왈은 마지막 결정을 했을 것이다.이 모든 폭력과 악의 순환고리를 끊어야 한다고.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줄곧 느꼈던 감정은,왜 나왈이 자신의 쌍둥이 남매들에게 과거 자신이 겪었던 비극을 알아내고 돌아보길 강요하느냐,하는 것이었다.아이들이 그 비극을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것.이 모든 역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두 아이들이 굳이 그 사실들을 알고 (더구나 자신들의 생부가 자신들의 오빠이자 형이라는 것까지) 절망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용서와 화해는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파악한 연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도 있다.가령 전두환이 아무리 광주항쟁의 유족들에게 사과의 제스처를 취한다 한들 (물론 그가 그럴 리도 없지만) ,당시의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한,용서와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있는 것이다.즉 우리는 진상과 진실을 알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레벨에서 생각하면 좀 달라지기도 한다.이 영화의 진실은 나왈의 쌍둥이 남매의 입장에서는 묻혀져도 괜챦을 진실이기도 한 것이다.(물론 여기엔 논란과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영리하게도 운명적 장면 하나를 삽입시키면서 이런 딜레마를 피해 간다.영화 도입부 쯤에 나왈과 딸 시몬이 수영장엘 가는 장면이 있고,나왈은 그곳에서 뭔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해진다.그리고 나왈이 병석에 눕는 응급실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은 영화 말미에 다시 나오는 수영장 장면과 맞붙어 있다.나왈은 거기서 발뒤꿈치에 문신을 새긴 사나이,기억 속의 끔찍한 목소리를 가진 고문자를 만나게 된다.그리고 바로 그가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이란 사실을 알아챈다.첫 수영장 장면에선 알지 못했던 진실이 마지막의 수영장 장면에선 그 숨겨진 사실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개인적 레벨에서 볼 때,용서와 화해란 실존적 결단이다.그리고 어떤 운명에 의해 유도되는 우연적 사건이 요구된다고도 볼 수 있다. 수영장에서의 마주침이 아니었다면 나왈은 이 모든 사건들을 그대로 덮고 그냥 사라졌을런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냥 그대로의 평화가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아들이자 자신의 고문자가 캐나다 땅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나왈은 이 모든 사건들의 대단원을 스스로 요구하고 결단했다.개인의 용서와 결단이란,이렇게 매우 다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그리고 영화 역시 개인적 결단을 꼭 세계적 비극과 연결시키려 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두 용서와 진실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에게 마지막 승복을 허용하고 마는 것이다.

 

2011-26 사라의 열쇠-질스 파겟 브레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거의 슬프고도 참혹한 역사를 파헤쳐간다는 점에서 <사라의 열쇠>는 <그을린 사랑>과 유사점을 갖는다.그러나 <사라의 열쇠>는 <그을린 사랑>처럼 긴장 넘치는 구조와 거의 무섭기까지 한 서사를 갖는 데에는 실패했다.오히려 이 영화는 뒤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이완되어지고 여러가지 잡다한 얘기들을 풀어놓는 통에,그 해답들을 정리하느라 영화적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기분까지 든다.그럼에도 이 영화가 웰 메이드 영화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무엇보다 주연 배우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힘이 크다.현존하는 유럽 최고의 여배우 중 한 명이 아닌가.

 

 

이 영화는 1942년 7월의 밸디브 기습 검거사건을 다룬다.프랑스 경찰과 헌병이 독일 나치의 명령 하에 프랑스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을 기습적으로 검거해서 파리의 경기장에 가둔 다음 수용소로 보냈던 사건이 바로 밸디브 기습 검거사건이다.말하자면 이 영화는 영화사를 통해 많이 다루어진 홀로코스트 영화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주인공인데,이 소녀는 체포되기 전 동생을 구하기 위해 동생을 벽장 속에 감추고는 열쇠를 가져와 버린다.수용소로 이송될 거란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결국 동생은 벽장 속에 갇혀서 아사하고,사라는 평생 그 죄의식을 짊어진 채 살아가게 된다.

 

영화의 한 줄거리는 이렇게 사라의 삶을 따라가는데 바쳐지고 있다.그러나 다른 줄거리 하나는 1942년에 사라가 살았던 아파트와 관련이 있을 듯 보이는 한 프랑스 집안의 영국인 저널리스트 며느리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를 따라가게 되고,이 줄거리는 약간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풍긴다.즉 이 집안이 유태인들의 희생을 매개로 그 아파트를 그냥 꿀꺽하지는 않았을까,나아가서 그들의 체포와 무언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얘기가 자동차의 두 바퀴처럼 사라의 얘기와 동시에 전진하는 것이다.

 

물론 두 번째 이야기가 포함됨으로써 영화는 역사적 진실의 문제,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문제,그리고 기억의 문제를 영화 속에 포괄시키는 데에 성공하는 듯 보이지만,두 번째 스토리의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산만하게 흐르고,그러다보니 첫 번째 이야기의 주요 캐릭터인  사라마저도 성장이 계속될수록 너무나 전형적으로 흘러가게 되어서,영화는 결국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약간 실패의 냄새를 풍기는 영화가 되고 말긴 했다.영화의 미스테리 역시 지나치게 쉽게 풀려버리고 마는데,이것은 일정 부분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가 연기하는 배역을 너무나 강조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배우의 아우라가 영화 전체의 짜임새를 방해한 경우가 되겠다)

 

 

 

그러나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가 영화를 결정적으로 살려내는 것도 사실이다.(나는 메릴 스트립 보다 토마스가 낫다고 생각한다.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그냥 찌푸린 표정 하나만으로도 비극의 아우라를 전달해낸다.메릴은 그렇게 하는데 어느 정도의 감정적 노동을 꼭 거쳐야 한다) 이 배우는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 연기를 통해서도,이 영화 이야기의 미묘한 부분,-즉,과거를 과연 끄집어내고야 말 것인가- 을 집어넣었다 뺐다 한다.

 

그녀가 표현하는 것은 물론 망설임이다.진실에 접근해갈수록 진실의 추적자들은 망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더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가해자로 밝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다.그러나 이런 부분을 영화적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이런,어찌 보면 중산층적인 의식,또 자신이 유지해왔던 역사 의식과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망설임을 연기로 표현한다는 것,그것도 다른 배우들과의 연기를 통해 그 작은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정도의 내공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결국 이 배우의 연기 때문에,이 영화는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좀 비껴나고 말았다.(물론 영화의 절반이,특히 어린 사라를 연기하는 멜루지네 메이앙스가 나오는 부분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감정적 격동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에 할애되고 있긴 하다.).영화는 균형을 잃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죄의식과 망설임에 집중하게 되었고,의외로 이 상황에서 설득력을 얻어내게 된 것이다.

 

가령 황석영의 '손님'을 영화화한다고 생각해 보자.대문호가 될 수도 있었으나,황구라의 이미지로 굳어져가고 있는 이 아쉬운 작가의 소설 '손님'은 무엇보다,한국 기독교의 사상적 뿌리- 반공과 보수와 기득권으로 얼룩진 - 를 그 어느 우리나라 소설보다 잘 형상화해냈다.만약 이 소설을 영화한다고 가정하고,기독교인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각색한다고 했을 때,그 영화의 주인공 연기야말로 바로 이런 식으로 뽑아나와야 할 것이다.망설임과 죄의식,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숨막힘.(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식의 연기가 가능할 여배우가 있을 것이다.다만 '손님'을 영화화해낼 수 있는 작가와 자본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지지만) 바로 그것이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를 통해 이 영화는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되었고,내 사사로운 감정이입으로 인해 나는 이 영화를 웰 메이드의 리스트에 올려놓았다.(뭐,아니라고 생각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어쩔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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