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1 <더 파이터>-데이비드 O 러셀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영화화하는 일은 그 해당 작품에 당연한 리얼리즘의 아우라를 선사한다.
this film is based on the true story라는 자막이 탁 하고 뜨면,관객은 이제부터 자신이 보게 될 영상들의 진실성을 자동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 조금 무리한 스토리 라인이 전개되더라도 '저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었으며','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라고 가정하며 마음의 안정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양면의 칼날이다.영화가 다루는 '트루 스토리'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라면,영화화되는 양식과 내용,그리고 흐름에 따라 오히려 격론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똑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하였더라도 만드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서 작품은 완전히 서로 다른 생물체로 태어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이런 경우 영화는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그리고 그 영역 속에서 또다른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예를 들어 내년에 방송되게 될 거대보수언론 소유의 종편이 만드는 박정희 드라마를 둘러싼 궤적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잘 알려지지는 않은 실화 이야기,또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정보가 유통되는 스토리라면 그런 식의 해석의 영역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특히 스포츠 스타를 다루는 영화들이라면 관객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면서도,승리와 패배라는 명확한 결론을 미리부터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논란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물론 예외도 있다)
특히 스포츠 영화 중에서 권투를 다룬 영화들이야말로 이상적인 휴먼 드라마 (이 용어도 상당히 모호한 용어이지만,일단 이렇게 써놓고 넘어가기로 하자) 를 만들 수 있을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권투 선수들은 대부분 하층계급 출신이며 - 그래서 그들의 어린 시절 고생담이 영화의 초입이나 중간중간에 계속 삽입될 수 있으며- 권투라는 운동 자체가 맨몸과 맨몸이 맞부닥치는 폭력에 기초하고 있으며 정말 물러설 구석이라곤 없는 사각의 링을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극적인 빛깔들을 영화 속에 추가할 수 있게 된다.(당연히 육체 자체에 대한 어렵지만 현란한 카메라 워크가 빛을 발하게 된다)
더구나 링은 영화의 그림을 만드는 데에도 유리한 구석이 있다.링은, 그것이 체육관 안이 되었든 호텔의 특설링이 되었든 영화 속 세트가 되었든 관객과 관중의 시선을 집중시킨다.그 작은 공간을 향하여 강하고 화려한 조명이 집중되어 있고,그 작고도 큰 공간에서 두 명의 검투사들이 엉겨붙어 싸울 때,관객의 시선은 그 어느 곳으로도 도망갈 수 없다.(권투라는 운동 경기에 내재된 폭력성에 혐오를 느끼는 경우는 제외해야 하지만 말이다).링을 향하는 영화 내부의 시선들 역시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분류할 수 있다.양편으로 엇갈려 선수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과 분노 그리고 탄식,선수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비통함과 간절함은 복싱이 소재가 되는 영화들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점들이다.
또한 영화 속 캐릭터들은 주인공 선수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거기서 파생되는 관계들과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통해 영화의 내러티브는 풍성함을 얻는다.한다 하는 남자 배우들이 복서 역할을 맡곤 했던 이유는 주인공에게 강렬하게 집중될 수 밖에 없는 에너지를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을 소유한 배우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심지어 다니엘 데이 루이스 마저 권투 선수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 영화,특히 권투선수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영화 제작 전부터 웰 메이드 영화가 될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 .감동적이고 극적인 스토리와 강한 캐릭터,명확한 결말과 우수한 배우들 그리고 거기서 터져나오는 드라마틱한 효과들이 처음부터 영화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스탤론의 <록키> 시리즈는 뒤로 갈수록 함량과 질이 미달되고 말았었다)
데이빗 O .러셀 감독의 2011년 영화 <파이터> 역시 권투 선수의 한때를 다루고 있으며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이다.또 분명한 웰 메이드 영화다.복싱 매니아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대중들의 인지도는 좀 떨어진다고도 할 수 있는 미키 워드라는 선수 -그는 웰터급에서 세계 챔피언을 지냈으며 아르투로 게티라는 라이벌과 치른 3번의 타이틀 경기는 권투사에 남는 명승부라고 한다 - 를 다룬 이 영화는 예의 '웰 메이드 영화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는 '트루 스토리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는 거의 완벽하다.주인공 미키 워드 역할을 맡은 마크 월버그는 말할 것도 없고,마약중독자인 그의 이복 형 디키를 연기하는 크리스찬 베일은 거의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다.미키의 엄마이자 매니저로서 아들의 성공 보다는 아들을 이용해서 돈만 벌려고 하는 앨리스 역할의 멜리사 레오나,귀엽고 야무진 이미지로서만 기억되던 디키의 연인 에이미 애덤스는 과감하게 변신한 모습을 보여준다.(에이미 애덤스는 미키 워드를 가족으로부터 빼내기 위해서 육탄전을 불사하는 싸움닭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엔 묘한 특징이 있다.기존의 권투 영화와는 달리,주인공 미키 워드의 캐릭터를 강력한 중심으로서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 영화 <파이터>에서의 마크 월버그는 거의 창백하고 투명한 이미지를 가진다.영화 제목 '파이터'와는 달리,일상생활 속에서의 그는 엄마와 가족들에게 휘둘리고 트레이너이자 멘토인 형 디키의 간섭과 강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링을 떠난 그는 시종일관 느릿느릿 움직이고 한 템포 늦은 답답한 대사로 일관한다.그로기 상태의 파이터인 것이다.
그가 그러는 동안 엄마인 멜리사 레오와 형 크리스찬 베일은 강력한 개성으로 살아 움직인다.연인인 에이미 애덤스는 그들에 맞서서 투쟁을 벌이는데 - 그녀는 실제로 미키의 누나들과 서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몸싸움을 벌인다- 그녀의 강인함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또 하나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미키의 누나들로 등장하는 배우들은 나른하고 게으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성격을 너무나 실감나게 연기해서,영화와 현실간의 구분을 거의 지워버릴 정도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에너지와 동력에 마크 월버그는 거의 무대응으로,그냥 괴로운 표정으로,또는 둔감하게 반응하기만 한다.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를 때까지도 계속 그러고 있기 때문에 마치 고의적인 부조화를 일부러 연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질 지경이 된다.(실제로 마크 월버그를 제외한 나머지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들인 레오와 베일은 트로피를 가져갔다.그러나 조연상 트로피는 주인공을 뺀 모든 배우들이 다 가져야 할 정도로 뛰어난 앙상블 연기를 보여준다)
마크 월버그 정도의 연기자가 실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움직인 것은 물론 아니다.여기엔 어떤 의도가 있다.
아마, 첫번째 이유는 (여기서부터는 당연히 내 추측이다)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실제로 그러했을 거라는 것이다.실제로 미키 워드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며,미키의 주변 인물들 역시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그것에 충실하기 위해서 영화를 그렇게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물론 매우 평범한 생각이다) 어쨌거나 '트루 스토리'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좀 더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면 또다른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그 중 하나는 처음부터 데이빗 러셀 감독이 미키 워드에게 영웅적 아우라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기존의 권투 영화의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를 일부러 지워버리고,그는 미키 워드에게 평범한 생활인의 냄새를,범상하게 갈등하고 둔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서의 캐릭터를 부여하고 싶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미키를 그런 식으로만 놓아두면 영화적 활력까지 같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미키 주변의 캐릭터들에게 반대적인 생동감을 부여했던 것이며,그렇게 되자 미키는 죽었지만 상대적으로 조연 캐릭터들은 다같이 일어나 살아났던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데이빗 러셀의 아우라 지우기는,그가 권투 시합 자체를 촬영하는 장면 하나하나에도 나타나 있다.가령 로버트 드 니로가 제이크 라모라라는 챔피언으로 나왔던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의 권투 시합 장면은 거의 영화 역사에 빛나는 촬영이다.정교하고 극적이며 오로지 시합하는 두 사나이에게만 집중된 촬영의 전범이다.링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게 디자인되었고 ,그것은 치고 받는 두 남자의 고독한 존재감을 완벽하게 부각시켰다.또 다른 권투 영화들의 시합 장면도 화려함 그 자체다.함성과 거친 에너지로 가득하다.관객은 마치 그 체육관에 앉아있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파이터>의 복싱 장면은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장면들은 완전히 멀어보이고 현장감은 줄어들었다.마치 집 안 거실에 앉아 텔레비젼으로 중계되는 권투 시합을 보는 느낌이다.어쩔 수 없이 가끔씩 맞고 때리는 두 사나이를 보여주긴 하지만,관객은 그들의 육체적인 느낌에 동화되기 어렵다.실제로 데이비드 O 러셀은 80년대 미국 텔레비젼의 권투 중계 화면과 거의 비슷하게 이 영화의 권투 시합 장면을 촬영했다.가끔씩 케이블 텔레비젼에 나오는 몇십 년 전 권투 시합 장면 말이다.현재에 비해서 화면의 질은 조악하고 선수들의 움직임은 다소 둔해 보인다.카메라는 공간을 섬세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카메라끼리의 교차 속도가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권투 시합 특유의 속도감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권투 영화 특유의 박진감도 사라져버렸다.이상한 일이 아닌가? 왜 이 영화는 마크 월버그와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좋은 배우들을 동원하고도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일까.왜 자꾸만 이 영화는 복싱 영화의 히어로에게 영웅으로서의 아우라를 벗겨내려고만 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성향이야말로 이 영화의 역설적인 우수성이자 개성이란 생각이 들었다.미키 워드라는 복서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실제의' 중요성과 지분,그가 살아왔던 삶의 '실제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라는 생각도 스쳐갔었다.또한 어떤 사람의 삶을 영화화할 때,반드시 그를 영웅의 위치로 올려놓아야한다는 생각도 우리가 가지는 이상한 고정관념이란 생각도 함께 다가왔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적어도 한국 관객에게 만큼은 익숙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흥행에는 거의 실패했으며 그리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지도 못했다.불가피한 희생은 항상 따르는 법이다.
(꼭 언급되어야 할 크리스찬 베일은 이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시종일관했다.좀 배워라,장동건&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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