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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쓰지 못했던 이야기들.

신의 영화들/정체에 대해 떠들기

by 폴사이먼 2011. 11. 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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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가속도라도 붙은 듯 가을이 훌쩍훌쩍 지나간다.봄날이 섞여든 듯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을은 가고 있다.그래서 누가 뭐래도 나는 안타깝다.이제 점점 현재의 투명함은 사라지고 또 다른 종류의 투명함,한기를 동반한 투명함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조금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우리는 달라진 가을을 맛보게 될 것이고 말이다.

 

일상은 언제나 똑같이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씩은 다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다.완전히 똑같은 날들이란 없다.어제와 오늘은 기본적인 뼈대는 동일한 것 같지만 조금 지나서 생각해보면 사실은 굉장히 다른 날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그러나 겉으론 여전히 똑같다.주말 남편과 주말 아빠인 나는 매일 매일 아내와 은별이와 전화통화를 하며,토요일이면 부랴부랴 그들을 찾아간다.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어느 날 보다도 더 바쁘게 보낸다.

 

저녁에 전화하면 두 사람은 가끔씩 내게 개그 한 토막을 선보인다.예를 들어 어제 아내는 내게 자못 심각한 말투로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사근사근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당신은 정말 최고의 남편이야.내가 내 삶에서 가장 잘 한 게 있다면 당신과 결혼했다는 거야.

 

음.약간의 뿌듯함에 이어 따라나오는 긴장감.그러나 곧이어

 

- 단,술을 좀 덜 먹는다면,단 복부의 지방을 아름다운 복근으로 변화시켜 준다면,단 얼굴 피부가 좀 깨끗하다면..

 

이러면서  전제조건 시리즈를 시작한다.물론 난 얏!하고 소리질렀다.

 

매우 명랑하게 커가면서도 의외의 예민함을 보이기 시작하는 은별이와는 몇 편의 영화를 함께 보면서 약간의 논쟁을 벌였다.예를 들어 <마당을 나온 암탉>,은별이는 이 영화의 다소 끔찍해보이는 결말에 혐오감을 표했으며,이런 종류의 잔인함에 대해 내게 항의했다.영화 속 마지막 죽음에 대해, 생태계의 현상이랄지 완벽한 희생이랄지 운운해가면서 영화를 방어하기에는 매우 힘이 부쳤다.지력이 떨어지는 아빠는 그냥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 그래서..앞으로 치킨은 안 먹겠다는 얘기니?

 

손가락들

 

손가락을 심하게 다쳐서 붕대를 감고 다녔었다.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손가락을 다치자 나는  거의 무용지물의 신세로 전락했다.컴퓨터 자판을 치기 조차 어려웠기 때문에,엄지와 새끼 손가락만 가지고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는 신종 독수리 타법을 연마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거 해보시라.의외로 어려우면서도 나중엔 엄청 재밌어진다)

 

이 불편은 또한 써야 할 여러 개의 글들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우선 나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글들을 날려버렸다.그래서,하필이면 BIFF로 이름을 바꿔서 무슨 고기 잔치 열었냐는 야유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아직은 너무 낯선 영화의 전당에 대한 얘기도 마찬가지였다.부산 영화제 레드 카펫에 올라선 여배우들의 심한 노출 경향과 우리나라 사진기자들의 관음증에 대해서도 쓸 수도 없었다.그들의 선정적인 보도들이 정작 영화제의 주인공이어야 할 영화를 영화제 뒤편으로 몰아내버렸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야만 했다. 남포동의 옛 영화의 거리가 그립다는 이야기,또 올해 영화제에서 내가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도 쓸 수 없었다.물론 손가락만 가지고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게으른 인간들은 언제나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는 것이다.

 

부산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인상 역시 그냥 그대로 넘어갔다.모 출판사의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산의 밤하늘을 장식한 별들에 대해 약을 올리자 그가 바로 천문대로 출발했다는 이야기.존경하는 경기도의 어느 교감선생님과의 또다시 불발된 만남.그 선생님의 여전히 정갈한 목소리.그 때 내가 앉아있던 송정 바다의 백사장을 묘사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또한 그 밤,오래도록 만나왔던 블로거들과의 파티.아마 이 얘기를 썼더라면 대조적인 단어들을 끝없이 나열시켜야 했을 것이다.예를 들어 싸늘한 친밀함,우정어린 적수들,사랑스러움에 깃든 날섬,부드러움 속의 비수 같은 지성,변치 않는 미소와 변한 헤어스타일 사이에서 오는 괴리,마초와 비마초,두뇌와 혀가 가지는 미각의 차이 등등등.

 

또 다음 날 오직 영화를 보기 위한 맨정신을 만들기 위해서 들어갔던 동네 사우나 손님들의 등과 가슴에 새겨진 '그림'들의 끝없는 조잡함,그러나 거기서 풍기는 키치적인 다정스러움에 대해서도 결국 얘기하지 못했다.또 다음 날 만났던 정신적 도플갱어인 두 아가씨에 대해서는 꼭 얘기해야 했었다.왜냐하면 나는 두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그 중 한 사람은 이제 완벽한 사람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소녀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른스러워졌던 것이다.거기에 고아한 자존심과 정리된 지성이 매우 유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이상한 뿌듯함이 우리가 앉은 레스토랑의 탁자를 맴돌고 있었다.나는 그런 종류의 기류를 참 좋아하고 아낀다.

 

박원순과 나경원 그리고 나경원과 박원순

 

남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선거에 이렇게 집중해본 건 또 처음이었다.서울이란 희한한 거대도시는 이번에도 변화무쌍한 양상의 레이스를 보여주었던 것이다.나와 나의 동거인인 처남은 어쨌든 그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개표 날 저녁 동네 삼겹살집에 갔다.만약 우리가 응원했던 사람이 이긴다면 축배를 들기 위해서였다.흥분한 처남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진다면,상대당에 입당해 트로이의 목마가 되겠노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여기에 또 한 사람이 끼어들었고,우리 세 사람은  지지하는 정당이 각자 다 달랐다.

 

 우리는 삼성과 SK의 한국시리즈 경기를 스마트폰으로 보고 있었고,옆 테이블의 함성 소릴 듣고서야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두 사람은 한 사람의 패자를 위로했다.(야권이 연대했기 때문에 술값도 이렇게 승자끼리 '반띵'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쪽 눈으론 여전히 야구 경기를 지켜보면서 말도 안되는 몇 가지 가설적 결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 그렇다고 안철수가 아직 오승환인 건 아니다.

-  영광의 재인 아저씨 역시 아직 에이스가 아니다.그는 이제 셋업맨 정도의 위치에 올라섰다.

-  나공주를 데리고 저 정도라면 한나라당은 역시 선거의 달인이랄 수 있다.특히 한국시리즈 같은 단기전에

   통용될 수 있는 강한 베테랑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이 얘기는 바로 반론에 부딪쳤다.누구든 뉴욕 양키스처럼 돈이 많다면 비싼 선수들을 모조리 쇼핑할 수 있으며,그런 의미에서 야권에 필요한 단장은 오클랜드 에이스의 빌리 빈이다.특히 브래드 피트가 그의 최신작에서 빌리 빈 역할을 했다..그러자 또 한 사람이 조국을 브래드 피트로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라고 맞받아쳤다)

   

- 하필 아버지의 제삿날에 누를 끼친 박근혜.이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아버지를 잊어버렸다는 반증이다.(그리고 우리는 팬들이 이미 그 이름을 잊어버린 80년대의 야구 스타들을 말했다.나는 그 전 시대의 선수들도 말했다.김호중이나 황성록 같은 선수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팬들이 있을까?)

 

 또 자투리 같은 이야기들.오세훈의 옆구리살에 대한 단상,또 '수첩은 단어고 편지는 문장이었다' 같은 이야기들.

 

수첩과 편지,나는 꼼수다,닥치고 정치 그리고 김어준.

 

박근혜의 수첩은 박근혜의 약점을 설명해준다고 우리는 떠들어댔다.그 수첩은 그 옛날 할아버지들의 꼬깃꼬깃한 거래 장부들과 70년대 드라마 <수사반장>의 형사들이 목격자들의 증언들을 열심히 메모하던 모습들을 연상하게 한다.말하자면 그녀의 수첩은 바로 그녀가 살아가는 시간대가 어떤 시간대라는 것을 은은하게 웅변해주는 귀여운 소품이다.(이 소품에는 당연히 모나미 볼펜이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녀는 어떤 때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을 몹시도 가소롭게 쳐다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그녀는 수첩의 상징을 정신적 우위에 놓고 살아가는 매우 드문 캐릭터다.

 

또한 나는 박근혜가 시장 한가운데에 서서 상인들의 어려움을 직접 수첩에 적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그러나 이 상상은 또 이상하다.만약 그랬다면 수많은 언론들이 '바로 그 사진'을 신문 지면에 실어나랐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도대체 그녀는 언제  수첩의 메모들을 작성했던 것일까? 저녁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몸매와 건강을 위한 요가 운동이 끝나고 나서? 궁금했다.그러나 내 앞의 두 사람은 정말 사소하고 쓸 데 없는 걸 궁금해하고 있다고 나를 타박했다.

 

그렇다고 안철수의 편지가 박근혜의 수첩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그 편지는 오히려 시간대를 초월한다.그의 편지는 다소 소녀적인 도구적 문장에 지성적이고 남성적인 결단이 결합되어 있는 형식이지만,편지가 가지는 기본적 특성처럼 그것은 적어도 21세기 대한민국에 있어서 직접적인 울림을 가지고 다가오지 않는다.편지를 읽지 않을 사람도 숱하게 많은 것이다.또 계속되는 편지는 사람들을 식상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따라서 이런 식의 소통 방법엔 시효가 있다.그리고 현대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1억원 피부과를 얘기하다가 '나는 꼼수다' 얘기가 흘러나왔다.한 사람은 찬양하고 한 사람은 혐오스러워했다.나는 그들의 방송을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 도무지 시끄러워서 말이다 - 그냥 잠자코 두 사람의 말싸움을 지켜보다가 김어준의 '씨바'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씨바'와 '조까' 때문에 상처받을 예민한 사람은 어떡하느냐는 얘기였다.두 사람은 화성인 쳐다보듯 나를 쳐다보았다.김어준의 책 '닥치고 정치'의 '닥치고'도 마찬가지다.왜 하필 '닥치'라는 것이냐고 나는 그들에게 반문했다.

 

이 세 단어는 모두 다 통쾌하고 시원하며 때로는 명랑한 울림들을 가져다 주지만,만약 이 단어가 공론과 진실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될 때 어떻게 되겠느냐고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이것은 분명히 마초적인 태도이며 '가오'를 최우선으로 아는 사람들의 단어라고 나는 그들을 건드렸다.이상하게 두 사람 다 나한테 통렬한 반격을 가했다.그것은 어쩌면  그 삼겹살집에 나와 함께 앉아있었던 두 사람이 매우 솔직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두 사람은 특이하게도 완벽하게 룰을 어기는 상대방한테 그 정도의 욕설도 퍼부을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그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일한 주장을 폈다.그러나 그 얘기는 내 논점에서 어긋난 얘기라고 나는 생각했다.(역시 소맥이 놓인 술자리는 다소 거칠다.^^)

 

시간이 좀 흘러 김어준의 '씨바'를 같이 얘기하게 된 또다른 후배는 그 막연스런 단어가,김어준 스스로의 결정적인 제동장치일 수 있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김어준은 본능적으로 그가 또다른 영역 - 특히 공적이며 결정적인 진리만 횡행하는 곳- 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느낄 때마다 '씨바'를 내뱉으며 스스로를 막아선다는 것이다.나는 그렇다면 김어준과 '나는 꼼수다' 역시 생래적인 시효를 타고 난 것이라고 반응했었다.진중권의 게시판 MVP시절이 끝나가는 것처럼 말이다.그것은 또한 종이책 쓰는 사람들의 시대가 확실히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집들이

 

강남의 자산가 친구들이 집들이라며 집에 쳐들어왔다.흔히 얘기하는 고소득 전문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 그리고 물려받은 돈이 많은 부동산 부자들,그리고 이 두 조건을 함께 갖춘 녀석들.이 녀석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들이다.정치적 문화적 취향과 경제적 상태가 아무리 달라도 20년에서 30년을 부대낀 녀석들과는 이렇게 오래 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아내는 이 친구들을 싫어했고 이 친구들의 아내들은 더 싫어했다.특히 2002년 대선 때,이회창과 노무현을 놓고서 한 판 붙은 이후 한때 이들을 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었지만 세월은 결국 그런 과거 마저 희석시킨다.나는 서울시장선거 얘기만 나오지  않는다면 괜챦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왔다.누군가 이번 시장 선거에서 누굴 찍었느냐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나는 내심 이런 질문이 너무나 이상했었는데,그것은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느꼈다는 반증이었다.이내 한 사람이 박원순을 지지했노라고 고백했다.이유를 묻는 나머지에게 그는 자신이 소유한 어떤 강남의 상가 이권이 오세훈으로 인해 망가진 후 한나라당이라면 무조건 싫어하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거였다.그때 나는 이 광경을 조그만 꽁트로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하며 관찰자의 위치로 들어갔다.또 한 사람은 박원순을 얘기하며 '양아치'라는 말을 사용했다.근거를 묻는 아내에게 그는,자신이 아는 '변호사' 한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다고만 말했다.아마 박원순이 얻어낸 대기업 기부금을 근거로 그런 얘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세계를 움직이는 엔진의 얄팍한 동력에 한심해하며 꽁트를 포기하려는 순간,아내가 나경원을 트집잡기 시작했다.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아내의 말을 다 수긍했다.그것은 그들이 나경원을 지지한 이유는 바로,나경원이 반 반한나라 후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다는 점을 입증한다.그들은 여러가지 의혹에 대한 나경원의 되지도 않는 변명을 너무나 수치스러워 했으며,그 정도의 인물 풀(Pool) 밖에 없는 한나라당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박근혜 얘기를 꺼내면서도 그들은 공주님을 지지하는 자신들의 입장에 스스로 연민을 가지는 듯 했다.나는 나경원의 콧대 하나는 잘 빠졌지 않았느냐고 그들을 위로했고(특히 한 사람은 성형외과의사였으므로),오세훈 얘길 하면서 염장을 질렀다.그냥 심드렁하게 말하면 된다.애초에 시장 좀 잘 뽑지 그랬느냐고그리고.나는 완전히 꽁트 쓰길 포기했는데,단 한가지,그들이 안철수에 대해 품고 있는 이중적 심정 만큼은 여기에 덧붙여야 한다.

 

안철수의 스팩,안철수의 재산을 선망하는 것 만큼이나,그들은 안철수를 일정 부분 신뢰하는 것 처럼 여겨졌으며,그 신뢰는 안철수가 학교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그들의 안쓰런 소망으로 표현되었다.

 

붉으락푸르락해하는 아내 때문에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겼으나,나는 여전히 그들이 내 친구라는 사실 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다들 가고 난 뒤 아내는 몇 마디 코멘트를 한숨과 함께 추가했다.

- 나는 세상에 태어나 소맥을 처음 보았다는 여잔 처음 봤어.

그리고 아내는 은별이가 살아갈 세상을 걱정했다.

 

예민함과 둔감함을 한꺼번에,맷집과 펀치력을 다같이,그리고 정의감과 협상력을 함께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세상을 은별이는 살게 되는 걸까?

 

고지전

 

한반도,남과 북을 다룬 영화 <풍산개>에 대한 글을 썼었기 때문에,이번엔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고지전>을 쓰려고도 했었다.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웰 메이드 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특별한 리뷰가 필요없을런지도 모르겠지만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선 기록을 남겨놓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다룬 우리나라 영화들 중 가장 진전된 지점에 위치한 영화였다.<선덕여왕>과 <공동경비구역>을 쓴 박상연의 시나리오는 기본적인 미스테리와 스릴,그리고 뚝심 있는 서사구도를 놓치지 않았고,장훈은 그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남성 버디 스토리 -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에 흐르는 갈등과 우정- 를 여전히 주요한 매력으로 부각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달파란의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무엇보다 김우형의 촬영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었다.수시로 바뀌는 그의 카메라의 눈은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처참한 고지를 한반도의 육체에 비유하며,때로는 아래로부터 위로 또 때로는 마치 비껴올라가듯 위로부터 아래로 훑어내려가며,전쟁으로 인해서 훼손된 한반도라는 실체를,그 처참하게 파괴된 실상을 주관과 객관의 시선을 혼합하며 전달했다.그것은 병사들의 절단되고 훼손된 사지와 겹쳐지며,전쟁을 반대해야 한다는 감정적 당위성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가 실제로 겪어야 했던 비극적 상황을 즉물적으로 보이게 했다.

 

 

물론 이 영화를 바라보며 여러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작가의 전작 <공동경비구역>,헐리웃 영화 <스나이퍼>,그리고 <에너미 앳 더 게이트>,또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또한 이만희의 전쟁영화에 이르기까지,관객은 <고지전>을 바라보며 이 영화들의 몇몇 장면들을 기억할 수 있다.그러나 <고지전>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그것이 바로 한반도를 표현해낸 방법,우리 땅을 묘사하는 그 은근히 임상의학적인 시각에 있다고 나는 쓰려 했었다.

 

몇몇 에피소드의 사족으로서의 가능성 - 김옥빈의 존재나 포항전투에서의 트라우마- 도 언급하고 싶었으나,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써야 할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나는 그 시간의 통과를 느낀다...

 

이제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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