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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빛난 영화들 <하하하> -홍상수의 거리를 산책하다.2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0. 12. 2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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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시간차를 좀 두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사물도 있다.그것은 문경(김상경)의 모자다.문경은 통영에 도착해서,어머니 윤여정이 운영하는 '호동식당'에서 어머니를 만나,다 찌그러지고 낡아빠진 자신의 야구모자를 쓰라고 준다.이 모자는 선물이다.그런데 나중에 시인 정호(김강우)가 문소리와 김강우의 선배인 중식(유준상),그리고 그의 애인 예지원을 지역의 시 낭송회 -어쩌면 세상에,홍상수 역시 이창동처럼 지방 도시의 시 낭송회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 집어넣었다 - 에 초대했을 때,정호는 바로 그 모자를 쓰고 있다.윤여정이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훔치거나 주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자는 문소리(왕성옥)의 집 앞에서 문경과 정호가 처음으로 마주칠 때 정호가 쓰고 있으나 문경은 그것이 자신이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모자라는 사실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알아챈 듯한 눈빛은 한다).그리고 영화 말미에 중식과 그의 애인이 통영을 떠나 여수로 가는 버스 터미널에서 정호가 두 사람을 배웅할 때,정호의 머리에 모자는 다시 얹혀 있다.중간에 문경이 어머니 윤여정에게 '모자가 어딨느냐'고 다그치는 장면까지 포함한다면,아들이 엄마에게 선물로 준 모자는 이렇게 영화 곳곳에서 시간차를 두고 출몰하고,그간의 어떤 홍상수 영화와는 달리,이 영화의 시간적 구조가 타원형이 아닌 선형적 구조라는 것을 알려주는 시간적 지표로 활용된다.(모자의 행방 덕택에 시간의 흐름이 일정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소도구의 반복적 출현이 이 영화의 시간적 구조를 지시하는 부가적 기능을 갖는 것이다.여타 영화의 '시간 가르쳐주는 방법'과는 참 이색적으로 다른 것이다.따라서 이 영화의 모자는 홍상수 거리의 시계탑인 것이다.(그러나 모자를 시간의 지표로 파악하는 사람이 또 얼마나 있겠는가? 또다른 사물을 시간의 지표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물론 모자는 그냥 촬영상의 어떤 우연에 의해서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떠다니는 거라고 생각하기가 더 쉽다.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홍상수가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관객이 그의 결정을 모두 다 따를 필요도 없다.분명 어떤 사람들은 이 '옮겨다니는 모자'가 없었더라면 영화의 서사적 시간 순서를 꿰어맞출 수 없을지도 모르고,현재는 흑백스틸사진으로 과거는 컬러풀한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시간 개념 자체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를런지도 모른다.또 어떤 관객은 모자가 아닌 다른 사물을 시간의 나침반으로 삼아 어두컴컴한 극장 안애서 자신의 시간개념을 이어나갈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중 무엇을 선택하든,그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자의적인 선택이다.

 

선물,시.

 

이 모자가,원래 문경이 어머니에게 주었던 '선물'이라는 점에서,선물의 '반복'역시 관찰된다.이 영화의 어떤 시점과 장소들에선,선물들이 오가고 있다.모자가 첫번째 선물이라면 두번째 선물은 통영시에 늦게 도착한 예지원이 중식에게 준 '문진'이다.그 때 중식은 말한다.-나는 책도 안 읽는데..바보!!

 

세번째 선물은 왕성옥에게 반한 문경이 그녀에게 주는 염주다.이순신에 대한 정열적인 성옥의 소개에 찬사를 보내며 그가주는 것인데,청계산의 현실 시간에,그는 '그냥,우연히,즉흥적으로,전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네번째 선물은 아직 받지 못한 선물이다.나폴리 모텔 -이 모텔은 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혹시 앞으로 통영에 가게 되면 여기서 자고 호동식당에서 복국을 먹어야겠다-에서,중식은 예지원에게 후배 정호가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는데,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참이나 영화가 진행된 후에 그는 정호에게 선물이라는 '시'를 받는데,그는 '시가 왜 이렇게 어둡냐,너는 실존주의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라고 비평하고,정호의 강한 저항을 받는다.그들은 거의 싸우기까지 한다.바로 다음 장면은 성옥이 정호에게 화분 선물을 주는 장면인데,정호는 자신의 선물이 비평적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문소리의 화분에서 엉뚱한 실존철학적 의미를 끄집어내며 문소리의 의도를 폄하한다.그들은 성호가 중식과 그랬던 것처럼 한바탕 격렬한 언쟁의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이 영화의 선물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로만 반복되는 요소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사실 대부분의 선물이,받는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하게 되거나,제 시간에 주어지거나 하지 않고 ,또 어떤 선물은 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하기도 한다.선물이 오히려 관계를 어둡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선택이어서,이 영화에 나오는 선물들 중에서 우리는 좋은 선물을 고를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건물을 유심히 바라보듯이 말이다.그런데 그것은 우연히도 시다.(또다시 이창동을 생각나게 한다) 정호가 중식에게 준 시 선물 (시인과 시인 사이에 오간 시를 선물이라 할 수 있을까?) 말고,다른 시들이다.

 

첫번째 시는,문경이 성옥에게 준 시다.여전히 어색했던 그들 사이를 ,이 시는 부드럽게 하고 밥과 술,그리고 키스까지 연결시킨다.문경이 이 시를 쓴 이유는 세병관에서 만난 이순신 장군이 그에게 건넨 ,'좋은 것만 보는 훈련을 하는 셈 치고 시를 쓰라는'충고 때문인데,이 시 덕택에 문경은 성옥과의 관계의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키스도 진전이라면)

 

그 때 성옥이 문경에게 묻는다.

-뭘 보면서 살아요?

그는 얼른 대답한다.

-난 좋은 것만 보고 살아요.

이 대답 이후에 성옥과 문경은 키스한다.나라도 그런 얘기하는 사람에겐 키스하겠다.그리고 이 키스는 역시 민족의 영웅-성옥의 표현으로는 성웅- 이순신 장군 덕택이다.

 

만약 우리가 숱한 부정적인 선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선물이자 로맨틱한 결과인 '문경의 시'를 선택한다면,우리 역시 좋은 것만 보고 사는 것이고 로맨틱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는 홍상수 공의 진중한 충고인 것이다.그렇게 볼 때,한없이 유치해 보이는 시,이 영화의 마지막 시.중식이 그의 애인에게 여수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수첩 한 장을 투자해서 써 낸,'내 천사새끼에게 보내는 시' 역시 얼마든지 좋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많은 반복들은 '좋은 것만 보게 만드려는' 홍상수의 책략일까? 그럴까? 글쎄,반드시 그럴 것 같지는 않다.영화보기를 결정하는 요소 속엔 관객인 우리들의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가 존재하는 것이고,홍상수는 어떤 가공할 마법이라도 부려서 우리들의 결론을 모조리 그쪽으로 이끌어가고 싶어하는 영화적 파시스트는 아니니까 말이다.그래서 이 영화 속 반복을 몇 개 더 살펴봐야겠다.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던 반복들

 

1.예를 들어 어떤 단어들이나 행동들이 있다.윤여정은 영화 속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에게 언제나 엄마라고 불러라,또는 너 오늘부터 내 양녀 해라..이렇게 말한다.내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2.거짓말.정호는 중식에게 시 낭송회에서 '성욕이 없다'고 말한다.정호가 만나는 여자마다 자빠뜨리려 하는 걸 보면 이건 거짓말이다.또 문경은 이순신 장군을 만난 꿈에서 '자신이 항상 거짓말만 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3.문전에서 쫓겨나기.중식과 문경은 시차를 두고,서로 다른 상황에서 성옥의 집 문전에서 쫓겨난다.

4.담 넘기.문경과 정호는 역시 시차를 두고,서로 다른 상황에서 성옥의 집 담을 넘는다.

5.나폴리 모텔 앞에서,김규리와 성옥은 문경에게 '여기서 헤어져요'라고 말한다.

 

이것 말고도 또 있을 것이다.홍상수의 거리를 산책하는 모든 관객들은,자신들에게 부여된 어떤 특수한 권리처럼,이런 숱한 반복들을 찾아내게 된다.이 '찾아냄'이 그들에게 어떤 작용을 하게 될런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적어도 일종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내게 가장 중요했던 반복.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게 받아들였던 반복은,대부분의 다른 관객들도 선택한 '보다'라는 말이다.물론 이 '보다'엔 본다는 행위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안다,믿는다 등의 보다와 연결된 다른 말들도 관련이 있다.그리고 이 '보다'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다.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거기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삶의 근원적인 태도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선,몇몇 '보다'를 보자.

 

1.문경이 성옥과 처음 만났을 때,성옥은 말한다.

 -아는 것만 보이죠.

  그 때 문경이 대답한다.

  - 몰라야 보입니다.

 

이 알쏭달쏭한 선문답 같은 대화.문경의 태도가 좀 어정쩡한데 비해,성옥의 태도는 보다 확실하다.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확실히 믿겠다는 태도다.

 

2.그래서 성옥은 세병관을 찾아와서 자신에게 충무공에 대한 얘기를 듣는 관광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첫마디를꺼낸다.

 

-그거 다 아시죠?

이 충무공이 위대하다는 사실 쯤은 모두 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그리고는 덧붙인다.

 

-여러분이 장군님을 직접 만나뵌다면,아마 쳐다보지도 못할 겁니다.

그녀는 이렇게 거의 종교적인 태도를 드러낸다.그래서 그녀는 또 곧이어 이렇게 말한다.

 

-전 그 분을 믿습니다.그 분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입니다.

성옥은 이렇게 가장 단순하고도 낙천적인 태도로 '본다'.그녀는 이 충무공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믿는다'.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이다.종교적인 태도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다.그래서 그녀는 모든 일들을,심지어는 모든 우연들 마저 -자신이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다 특공대 출신이라고 그녀는 말하는데,거기엔 문경의 생뚱맞은 거짓말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종교적인 태도로 받아들인다.그녀는 그렇게 '보는' 것이다.엉뚱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인생의 밝은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가령,정호의 애인인 김규리.그녀는 자신이 중국에서 국정원에 근무했고,그 때 '스파이'였다고 얘기한다.그리고는 중식에게 말한다.

 

-믿기 힘들죠?

진짜로 믿기 힘들지도 모르지만,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일종의 부정성 안쪽으로 가두고 있다.그녀의 '본다'는 이런 믿기 힘듬에 의해서 교란되고 있다.그런 그녀에게 애인인 정호는 또 이렇게 얘기한다.

 

-니가 시를 아니?

정호는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의 시는 이렇게 오직 자기 자신 한 사람에게 실존적으로 갇혀 있다.그래서 아무도 자신의 시를 알지 못하고,'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정호 커플은 어둡고 갇힌 채로 세상을 보는 태도 하나를 은유하고 있다.

 

4.반면 중식은 연방 우울증 약을 들이키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 것도 안 보여.

 그는 자신의 무드를 띄워 줄 알약의 화학작용을 통해 세상을 보고자 그렇게 우울증 약을 무슨 비타민이나 종합영양제처럼 자신의 위장에 부어넣고 있다.그러나 그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정호의 시가 어둡다는 것을 간파한다.-물론 그 전 장면인 문경의 꿈에서 이순신 장군은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하라고 얘기한다-그래서 그는 정호에게 말한다.

-왜 이렇게 시가 어둡냐.

 

중식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그는 삶의 덫 하나에 갇혀서 허우적거리면서도,적어도 밝음과 어두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시력을 유지하고 있다.따라서 우리는 그의 삶이 아직은 진행형이라는 것을,그의 앞날이 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아마,유준상은 홍상수의 다음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올 것이다.)

 

5.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문경에게서 나온다.그가 엄마 집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잘 때,그의 꿈에 등장하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다.김영호가 천연덕스럽게 현대어를 구사하며 연기하는 이순신 장군을 보자 마자,문경은 다짜고짜 장군에게 매달린다.

 

-아이고,장군님 사랑합니다.

성옥의 장군에 대한 찬사와 열광에 일정 부분 영향받은 것이 틀림없는 이 안 어울리는 호들갑을 떨고 난 후,그는 충무공에게 자신의 고민을 얘기한다.

-맨날 거짓말만 하고 어리석게 삽니다.

그러자,이순신 장군은 점쟎게 한마디한다.입술엔 가벼운 미소를 담고 있다.

 

-견뎌라.

그리고 문경의 호소(어리석음)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

-비겁해서 안 똑똑한 거다.머릿속의 남의 생각으로 보지 말고 눈으로 보아라.다르게 느끼고 감사하면 끝이다.훈련하는 셈 치고 시를 써라.난 항상 좋은 것만 본다.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거기에 나쁜 것이 있다.

 

문경이 어설프게 동의하자,장군은 말한다.

-어이고,귀여운 것..

 

좋은 것만 본다는 것.

 

그래,참 좋은 말이다.이렇게만 살면 얼마나 좋겠나.빛나는 낙천성과 부러울 정도의 맑음이 포함된 말이다.

 

또 '좋음'속엔 참 여러가지가 들어 있다.당연히 그 속엔 '옳음'도 포함되어 있다.옳은 것은 좋은 것이다.부인할 수 없는 공리다.그런데 이런 '보기'와 정확하게 비교되는 또 하나의 '보기'가 있다.그것은 같은 해에 만들어졌던 이창동의 <시>속에 나타난 보기이다.

 

<시>에서 선생님 시인인 김용택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은 우선 사물을 정확하게 '보는'것이라고 얘기한다.이 말이 씨앗이 되어 ,윤정희 할머니는 시를 쓰고,자신의 손자에 대한 결정적인 도덕적 선택을 하게 된다.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사물을 '보는'것에서,감각적으로 좋은 것만을 취하지는 않은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손자를 경찰에 넘긴다는 것이,'어둡고 슬픈'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그녀는 결코 '좋은 것만 보려'하진 않은 것이다.

 

이창동의 태도와 홍상수의 태도,이창동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홍상수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도덕적인 태도와 윤리적인 태도 사이엔 거의 건널 수 없는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일까? 홍상수라면,이창동의 주인공이 당면한 상황 속에서 어떤 '좋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하면서 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당연한 대답은,홍상수는 그의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이창동과 같은 도덕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이다.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런지 알 수 없으나,어떻든 지금까지는 그렇다.홍상수의 세계는 다분히 안정적인 중산층 세계이고,그 세계 안에서 인물들은 지지고 볶고 때리고 할퀴고 있다.그래서 사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홍상수의 답변을 들어본 적이 없다.또한 그에게 이런 대답을 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다만,영화 속 거지로 보이는 걸인 하나가,한참이나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유준상 커플에게 달려들며 이렇게 말한다.

-더러운 년!

이것 역시,나의 '보기'이겠지만,10년 후의 홍상수는 더러움을 얘기할런지도 모르겠다.물론,더러움은 '옳음'과는 또 관계없지만.

 

                                (끝)

다음 영화:다시 홍상수,<옥희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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