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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빛나는 영화 <시> 3-윤리,그 엄격한 벼랑 끝에서의 선택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0. 12. 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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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벼랑 끝에서의 선택

 

<시>에서 미자가 시를 쓰는 이야기와 같은 비중으로 진행되는 다른 축의 이야기는 미자의 손자인 욱이가 가해자 중 하나인 성폭행 사건이다.이 사건은 미자를 둘러싼 세계의 현실을 대표하며,미자로 하여금 실존적인 선택을 하게끔 강요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청소년 성폭행 사건은 매우 빈번해졌다.지금이라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우수수 나올 것이다.일년에 몇번씩이나 우리는 이런 참담한 사건을 읽거나 듣게 된다.그런데 이창동의 전작 <밀양>의 배경이었던 밀양이라는 도시에서도 이런 사건이 일어났었고,사건의 사후처리과정을 두고서 꽤나 말썽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정확하게 어떤 인터뷰인지는 모르겠지만,이창동이 그 사건을 영화화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읽은 것 같기도 하다.어쩌면 <시>는 <밀양>에 앞서서 제작되어 또다른 종류의 용서와 구원을 얘기했을 수도 있었겠다.

 

이런 사건들이 훗날 흐지부지 또는 어영부영 무마되어 없어지는 반면에,밀양의 이 사건은 조그만 지역 사회의 스캔들로 발전했었다.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꾸준한 협박이 이어졌고,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경찰이나 검찰 그리고 지역 언론은 거의 일방적으로 가해자의 편을 들었다.서울의 방송국이 취재에 나섰었다.다음의 인터뷰가 정확히 밀양에서의 그것인지,이 인터뷰가 밀양의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그러나 그런 정확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해자 소년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아니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옳고 그름,죄와 벌,사죄와 용서에 대한 그간의 모든 기준이 교란되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피해를 입은 측이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서 있으면 서 있을수록,가해자의 위치가 권력이나 돈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사건은 과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왔던 기준과는 거리가 멀게 진행된다.도덕 교과서는 폐지로 전락하고,그 자리에 돈과 왜곡과 연줄이 들어선다.

 

이창동이 그려낸 사건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축도다.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각색해낸 얘깃거리다.그의 이야기에서도 옳고 그름/용서와 처벌/정의와 불의/의 기준은 역시나 실종되어 있다.영화 속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행동하는데,그들은 가족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손을 건네지도 머리를 수그리지도 않는다.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의 모든 이들은 서로에게 적인 것이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은 피해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이 영화에 보이지 않는다.일찍 여읜 모양이다- 가 자신의 자녀들을 고발하지 않도록 돈으로 무마하려고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언론인' 출신의 '정치인'인 최문순 의원이 학교의 '교감 선생님'으로 까메오 출연하여 모든 문제들이 덮어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한다.영화 속 기자는 사건의 실체를 잘 알면서도 돈에 매수당해 부모들 사이의 다리를 놓는 구실을 한다.아무도 옳고 그름을 얘기하지 않는다.그 누구도.

 

따라서 가해 아이들의 일상에는 변함이 없다.죄의식을 느끼는 아이도 없다.아이들은 여전히 친구들의 집으로 오락실로 몰려 다닌다.이 소름끼치는 상황을 이창동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제시하고 있다.소녀가 다리에서 투신한 날,손자 욱이는 거의 감정반응을 보이지 않는다.사건을 궁금해하는 할머니에게 오히려 짜증을 내며,핸드폰이 너무 낡았다는 투정만 되풀이한다.할머니 미자가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손자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어쩌면 부모 세대들이 금전이나 권력에 의해서 모든 문제를 무마시켜 줄 거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그렇게 보아왔고 그렇게 배워왔으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역으로 사회적 강자들의 범죄들에서,이런 종류의 비도덕과 무감정이 더 자주 발생한다.근본적인 도덕적 메카니즘은 잠들어버리고 금전이나 힘의 논리만 횡행한다.과장된 지적이라고? 강자들의 윤리적 기제를 속속들이 밝혀낸 책 하나가 올해 베스트 셀러가 되었었다.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가 그 책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삼성 총수 이건희의 또라이스러운 행각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그는 그냥 봐도 또라이니까) 이 책의 가장 소중한 내용은 재벌(금권)과 공무원 (관권)과 정치인 (정권)을 결합시키는 고리로서의 불법적인 비자금을 상세하게,그것도 실명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강직이 아니라,완고한 법조기술자였던 김용철은 거의 몸을 360도로 회전시키며 전방위로 총탄을 퍼붓는 람보가 되는데,그의 총알세례에서 자유로운 세력은 거의 없고,가장 더러운 자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 강한 자들에겐 불법적인 돈을 안겨 주고,더 약한 자에겐 매수와 폭력을 교대로 동원해 탄압한다.이 책은 그런 끔찍한 광경에 대한 현미경적 스케치이자 정밀한 풍경화이다.

 

결국 강자들은 금전과 권력이라는 고리를 통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그 안에서 자신들의 영지생활을 영위한다.그런데,지배라는 것은 또한 생존 메커니즘의 재생산이다.하층 계급들은 하층 계급대로 또 마이너 리그들을 만들고,그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은 귀족들의 규칙을 작게 축소시킨 바로 그것이다.그래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먹이사슬의 정점들은 아랫 것들을 비웃으며,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시를 쓰는 미자 할머니의 손자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멀쩡하게 생활해나가리라는 점을,그들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가끔 돌발적인 상황 -SK그룹의 피붙이 하나가 야구 방망이를 맷값이라며 휘두르는 것 같은-이 발생해서 잠깐 동안 어지러워지긴 하지만 근본적인 질서는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이런 정신병자들의 숫자가 아주 많아지면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그러나 상류층들은 숱한 매체들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모습들을 희석한다.최근의 드라마에서 부드럽고 포용력있고 어찌 보면 귀여운 재벌 2세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은 한화 김승연 회장과 그 아들들만 생각해 봐도 심각한 현실왜곡이지만,그런 만화적인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질서는 더 강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런 질서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도덕과 윤리라고 얘기하는 것이다.이창동 만큼 칼날 같은 윤리의식을 유지하는 영화감독은 아마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을 것이다.반면 이 문제를 응징과 단죄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장철수의 강력한 데뷔작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상황이 벌어진다.그 어떤 질서도 믿을 수 없게 된 개인은 결국 '낫'을 드는 것이다.

 

이렇게 온존된 부정한 질서 내에서 가해자들의 아빠들은 돈과 끈(연줄인 학교와 언론)을 동원하여 일을 해결하려 하지만,이 영화의 주인공 미자의 위치는 이런 질서가 고착된 사회 내에서 매우 특수한 지점에 존재한다.

 

우선 그녀는 빈곤한 데다가 혼자다.도와 줄 만한 친척도 없고 동원할 만한 연줄도 없다.게다가 다른 사람들처럼,이 사건을 건조하고 냉정하게,다시 말해 자신의 입장만 지키려고 하면서 대하지 못한다.벌써 영화 도입부에서,미자는 소녀의 죽음을 보았다.멀찍이 떨어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그녀는 응급실 앞의 119구급차로 다가갔었다.그녀가 간병하던 강노인의 며느리에게도 그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사실은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의 손자에게도 소녀가 누구인지를 물어보지만,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무관심 뿐이다.물론이런 미자의 관심은 그녀가,이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보여주었던 관심과 행동들이다.

 

상황과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때,오히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어찌할 바를 모른다.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그녀는 갈팡질팡하기만 한다.오히려 자신의 시 작업에만 매몰되어 현실을 기피하려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사랑하는 손자의 안위가 걸린 문제에 왜 그녀는 그런 반응만을 보이는 것일까? 정신없이 달려가는 정글 같은 세상에 대한 현실감 (reality sense)이 떨어져서? 아님 그냥 돈이 없기 때문에? 시에만 미쳐가는,순수에 대한 지향만 갖는 소위 예술인 성향이기 때문에?

 

이 모든 대답들은 모두 맞기도 하고 모두 틀리기도 하다.그녀는 의아함과 낯설음이라는 심정을 품은 것이다.미자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사건에 대한 이렇게 손쉽고 속물적인 대응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그녀는 당연한 순서를 밟아가야 된다고 생각한다.그리고 그 순서의 맨 첫번째는 바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그녀에게 할당된 합의금 5백만원이 없기도 하지만,그토록이나 미자가 허둥거리고 엇나가는 것은 ,일들이 풀려나가는 순서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윤리와 '미학'에 너무나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소녀의 위령미사가 열리는 성당엘 찾아가고,소녀가 투신한 다리 위와 시신이 발견된 강가를 찾는 것이다.미자와 미자를 둘러싼 타인들의 세계는 이렇게 서로 맞물리지 않은 채 돌아가고 그녀는 점점 아웃사이더로 밀려난다.이런 상황의 미자가 내리는 최후의 결단은,스스로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는 손자를 경찰에 넘기는 것이다.어찌되었든 합의금 5백만원도 구했고 피해자 가족과의 합의도 끝난 마당에,왜 그녀는 또다시 세상과 맞서고 세상을 배신하려 하는 것인가?

 

수치와 응징

 

그것은 그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잊고 있는 '수치심' 때문이다.그 모든 윤리와 정의,도덕의 기본이자 원천인 수치심 때문이다.모두 다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수치심 따위는 저멀리 내팽개치고 행동하는 이 세상에서,오직 그녀만이 완벽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창동은 미자의 수치심을 단계에 걸쳐 제시하는데,윤정희의 연기가 단연코 빛나는 장면도 바로 그녀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장면들이다.예를 들어,그녀가 찾아갔던 소녀의 위령 미사,그녀는 맨 뒤에 앉아있지만,소녀의 동급생들의 시선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

 

 

그녀는 쫓기듯 교회에서 도망쳐나오며 그러다가 작은 액자에 담긴 소녀의 사진 하나만을 챙길 뿐이다.미자가 가해아이들의 부모들을 대표하여 소녀의 엄마를 찾아가던 날,그녀는 소녀 엄마를 발견하고도 엉뚱한 얘기만을 늘어놓다가 돌아서 버린다.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그러나 그 순간 미자는 자신과 금방 얘기했던 여인이,딸을 잃고 응급실에서 통곡하던 여인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이때 미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당황스러움과 아울러,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이었다.자식을 잃고서도 여전한 노동에 시달리는 엄마와 비교해,자신이 읊어대는 싯구들과 ,자신의 내부에 여전히 너울대는 온실 속 아름다움에 대한 부끄러움을 그녀는 명확하게 감지한다.

 

 

 

그 후 그녀는 도다시 소녀 (이 소녀의 이름은 정의라는 말의 앞과 뒤를 바꾸어놓은 의정이다)의 엄마를,가해자의 부모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또다시 마주친다.거의 도망치다시피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미자에게 가해지는 것은 의정 엄마의 강렬한 눈빛이다.

 

 

 

그래서 미자는 그 모든 수치심과 가책이 뒤범벅이 된 상황에서 강노인에게 5백만원을 요구하러 간다.

 

 

이 수치심이 결합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단호한 응징이다.그녀는 자신의 손자 욱이의 태도에 염증을 느끼는 것이다.손자의 진실을 알게 된 날,미자는 잠자는 손자를 흔들어 깨우며 '왜 그랬느냐'는 하소연을 반복한다.짐승도 자신의 흔적은 치우는 법이라고도 말한다.그러나 손자는 요지부동이다.그저 말로라도 '잘못했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미자는 손자 욱이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손자가 밥을 먹는 식탁 위에,소녀의 위령 미사에서 가져온 사진 액자를 올려놓는 것이다.그러나 손자는 아주 잠깐 동안만 그 사진을 일별했다가,다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는 텔레비젼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이 짧은 장면 -이창동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유능함은 이런 종류의 긴박한 압축을 매우 자연스럽게 스크린 위에 건축해놓을 줄 안다는 데 있다-을 통해 미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히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은 이 사건의 제3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다.(아마 그래서 영화는 미자를 욱이의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보다는 좀 더 먼 혈연관계에 위치한 할머니로 설정했던 것 같다) 또한 가장 정확한 사죄는 부모가 아닌 죄를 지은 당사자가 해야 한다고,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생각했다.그러나 이 가능성이 막혀버린 순간 -더구나 성폭행은 친고죄이다-미자는 자신이 응징자가 되어야한다고 결정했다.진실이 일깨운 수치와 더불어 정당한 응징에 대한 도덕관념이,그녀를 최고의 윤리적 행동으로 이끌었던 것이다.이때 그녀의 지지자였던 형사는 미자와 배드민턴을 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누님,멋지다.!

 

어떻게 보면 당위에 가까운 이런 고리타분한 얘기에,이토록이나 고통스런 드라마와 시라는 문학을 우겨넣은 이창동은,이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에 대한 또 하나의 일침을 준비한 듯 하다.가장 강한 자가 가장 더러운 거짓말을 일삼고,그들 사이의 커넥션이 촘촘하고 빈틈없는 그물망을 형성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목줄을 옥죄는 시간,억울하고 심각한 죽음과 추락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져도 예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둔탁한 감각으로 포기하듯 살아가는 시민들의 시간에,그는 가장 연약하고 가장 힘없는 가난한 할머니의 벼랑 끝에서의 윤리적 결단과 죽음을 통해,이런 기본적 과정을 거쳐야만이,우리에게 구원과 부활과 시가 다가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영진위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0점 처리한 것은 당연했다.대놓고 그들을 욕한 시나리오였으니까.

 

이젠 미자의 매춘,미자가 강노인에게 최후의 섹스를 허락하고 받아낸 5백만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사실 그것은 윤리적 결정은 아닌 것이다.그러나 글이 너무 길어졌다.다음 영화 <하녀>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이 얘기까지 했다가는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시간이 아예 없어지거나,2010년 영화에 대한 글을 내년 음력설까지 연장시켜야 할 것이다.그래서 여기서 그치기로 한다.미자와 강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분이 좀 해 주셨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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