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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영화 <옥희의 영화>-옥희를 보고 행복해하다.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0. 12. 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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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키스왕>에도 홍상수 특유의 반복의 인장들이 찍혀 있다.영화과 학생인 남진구는 학생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문'과 축하인사를 계속 듣고 있고,<주문을 외울 날>의 영화과 학생 소원처럼 옥희의 전화를 무작정 기다린다.또 <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에게 채이고 폐인이 되었다는 여학생처럼,옥희는 친구에게 나이많고 유명한 남자와의 연애가 끝났다고 말하기도 한다.그러나 이런 반복과 순환은,이 두번째 영화 <키스왕>에서부터는 전작들과는 다른,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그들을 얽어맨 시간의 구조가 훨씬 느슨해졌다.또 반복의 나사 역시 매우 헐거워졌다.이제 반복이 아니라 '유사'의 수준에 다가가고 있다.인물들도 사건들도 단어들도 의미들도,그들 우주의 강력한 연쇄적 고리를 스스로 풀며 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그리고 마치,무너지는 세계들처럼,종말을 맞부닥친 지구처럼,일들은 자멸의 기운을 풍긴다.그런데도 관객은 (사실은 나는) 행복하다.무언가가 대체되었기 때문이다.바로 '정서'다.미묘한 정서의 힘이 해체되는 우주구조의 힘을 넉넉하게 막아내고 있다.이거,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를 지탱하면서,그간의 홍상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따뜻한 정서를 환기하는 두 요소는,노무현을 추종해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반론없이 충분히 대배우의 반열에 올라 있을 문성근의 연기(그의 동작과 목소리와 뒷모습)와,옥희가 만든 영화인 <옥희의 영화>이다.

 

10.이 영화의 세번째 영화인 <폭설 후>가 바로 문성근의 영화이다.서울에 내린 백년만의 폭설 때문에,영화감독이자 대학의 시간강사인 (바로 첫번째와 두번째 영화에서의 남진구의 직업적 정체이다) 문성근은 단 두 명의 제자,옥희와 진구를 앞에 앉혀놓고,수업이 아닌 사적인 대화를 시작한다.그는 이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다음 학기엔 출강하지 않을 예정이다.사람 사이의 관계와  세상에 대한 믿음과 성욕에 관한 그 대화는,바깥 세상의 한파와 폭설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애정과 진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홍상수 영화에서는 거의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술자리 후,어느 추레한 골목길에서 그는 술안주로 먹은 산낙지를 눈길 위에 토하다.그리고 어두운 골목길로 걸어간다.꼭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그리고 걸어가는 그의 행위는 마침내 삶의 근원성을 향해 나아가는 예술가의 행로처럼 쓸쓸한 발걸음이며,토해 놓은 산낙지는,일용할 양식보다는 꼭 해야 할 일들로 향하는 그가 마지막으로 게워놓은 삶의 속물적 세속성처럼 보인다.

 

 

물론 그 후의 그의 행보를 우린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주문을 외울 날>의 송교수처럼 돈을 받고 교수직을 파는 속물로 돌변했을 수도 있고,제자와의 열띤 연애 끝에 제자를 폐인으로 만들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영화감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사실 홍상수 영화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주로 그런 길을 걸어갔다.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우린 그의 미래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골목길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 속엔,술에 취한 자 특유의 숨기지 못할 진실이 숨어있다.관객은 그 장면을 보면서

 

 

삶에 대한 강렬한 착각 속에 빠져들고,거의 파올로 코엘류 식의 환상적인 결론에까지 유도될 수 있다.그 짧은 찰나의 뒷모습에서 우린 삶의 본원성과 세속성 사이의 강력한 갈등을 보는 것이며,승패에 상관없이 즐거운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이다.

 

11.문성근의 뒷모습은 영화의 네번째 부분인 <옥희의 영화>에서 한번 더 등장한다.제자인 옥희와 연애중인 문성근은,어느 12월 31일,그들이 혹시 이별을 하게 되더라도,그들이 당시 서 있었던 청계산의 잘생긴 소나무 밑에서,그 어느 해의 1월1일에라도 다시 만날 약속을 하게 된다.

 

제자인 옥희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지만,문성근은 그 약속을 지킨다.그는 정말로 1월 1일 나무 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옥희의 새로운 사랑을 확인한 그는 등을 돌려 천천히 산길을 내려간다.

 

 

 

사랑에 패배한,배신 아닌 배신을 당한 나이든 남자의 쓸쓸한 페이소소.시간과 젊음에 무릎을 꿇은 지성의 쓸쓸한 웃음,그럼에도 여유롭게 돌아설 수 있는 그 뒷모습은 지난 15년간의 홍상수 영화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아니 등장할 수도 없었던 정서였다.

 

탈색된 욕망과 흐르는 시간에 승복하는 이 남자의 뒷모습은,그러나 12.피곤함의 소산이다.관객은 문성근의 뒷모습에서 정제된 피로감과 포기의 미학을 읽는다.그리고 삶으로 승화된 피곤함을 느낀다.그리고 그것이 마법처럼 군더더기 없는 정서적 힘으로 변화하여,이해할 수 없는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그리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이거,홍상수 영화 맞아?

 

13.또다른 종류의 뒷모습은 <옥희의 영화>의 네번째 영화인 <옥희의 영화> 자체의 내용과 구조에서 드러난다.<옥희의 영화>는 영화과 학생인 옥희가 자신이 했던 두 번의 연애- '나이든 남자'와의 그리고 '젊은 남자'와의 연애-를 '돌아보며',그 남자들과 각각 올라갔던 청계산 산행 -나이든 남자와는 12월 31일에,젊은 남자와는 1월1일에-을 번갈아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유미의 똑똑하면서도 다정한 음색에 실린 나레이션은 두 번의 산행을 직접적으로 비교한다.예를 들면 나이든 남자는 주차장에서 홀로 주차권을 끊었고,젊은 남자는 자신과 함께 검표원에게 직접 걸어갔다랄지,중간화장실에선 차이가 어땠다랄지..나이든 남자와는 막걸리를,젊은 남자와는 국수를 먹었다랄지.마치 홍상수 영화의 '반복과 차이'를 곧장,중간 경로를 거치지 않고 보여주기로 결심한 것만 같다.

 

 

 (영화의 화면 역시,이렇게 직접적으로 두 번의 만남을 비교한다)

 

그러나 <옥희의 영화>는 두 가지의 함의를 갖고 있다.첫번째는 옥희가,자신의 두번의 반복적인 경험과 거기에서 얻어졌던 '차이'를 서로 '맞붙여'놓았다는 것이다.언제나 관객의 머릿속에서만 비교의 대상이던 홍상수의 '반복과 차이'를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시연해 보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몹시도 정갈하게 정리되듯,분명한 시간차를 가뿐하게 극복하듯,그리고 인간적 향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기 때문에,관객은 그간의 홍상수 영화에 있어서의 어려움 -반복과 차이에 얽힌 그 불편한 수수께끼-을 마침내,편안하게 인정할 수 있어졌다.그리고 이 편안함이라는 정서는 분명 두 시간을 붙여놓은 옥희-홍상수의 시도 (맞붙임)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두번째는 옥희가 만든 <옥희의 영화>역시 결국은 '되돌아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우리는 물론 옥희의 현재를 잘 모르지만,적어도 영화적으로는 추측할 수 있다.옥희는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와 사랑에 빠졌었고 헤어졌다가,다시 영화감독이 되는 친구와 연애에 빠졌다가 또 헤어졌다.(<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의 아내는 옥희가 아니다.) 옥희는 적어도 두 번의 연애를 경험했고,그 연애를 붙여놓고 되돌아보길 원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의 정서들을 찾아보길 그녀는 원하는데,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영화 속 그 어디에도 없다.옥희의 <옥희의 영화>속 보이스오버 나래이션 중 그 어느 부분에서도 ,옥희는 자신의 되돌아봄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그냥 두 연애와 두 산행을 붙여놓아 보고 싶었다고만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든,진구의 말대로 인위가 가미되었든 그렇지 않았든,결과물들은 영상을 통하여 그대로 제시된다.그 시간에 대한 고전적인 뒷걸음질,자신의 뒷모습에 대한 쓸쓸한 응시,과거의 쓰라림을 그대로 노려보려는 고요한 용기,그리고 거기에 문성근의 또 하나의 뒷모습까지 가미되어,영화는 관객에게 전혀 예측치 못한 상황에서 접혀나오는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한 것이다.

 

관객은 <옥희의 영화>를 보면서,아주 잠깐 동안이라도,자신의 뒷모습,관객 자신의 옛시간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 행위가 하나의 정서로 변화하면서 관객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 것이다.그리고 역시,그것은,벌써 두번째로 하는 말이지만,홍상수와 우리 관객들이 지나온 지난 세월이 필연적으로 가져다 줄 수 밖에 없는 피곤함에서 비롯돈 것이다.피로함이 우아한 노스탤지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14.그 가을 날 내가 느꼈던 마음의 행복감 역시,바로 그것,어떤 돌아봄 때문이었을 것이다.나는 문성근의 뒷모습이나 옥희의 회고에서 내 어떤 시간을 보았을 테고,그 시간을 용서하거나 정리하거나 응시했을 것이다.그리고는 '좋아했던','행복해했던' 것이다.

 

이렇게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는 내게 매우 흥미로운 영화적 경험이었다.홍상수가 앞으로 또 어떤 영화적 변화를 겪는다 하더라도,피로 때문에 터져나온 그의 영화적 변환점인 이 영화를 나는 그렇게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끝)

 

다음 영화; <하얀 리본> 그리고 <유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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