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0년의 영화 .<시>2-,詩 ,詩를 쓰다.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0. 12. 14. 10:13

본문

이어 김용탁의 시 수업은 수강생들로 하여금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려보고 강단에 앉아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몇몇 수강생들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이 장면은,영화의 단역들이 영화의 전면으로 떠오르는,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장면인데,외할머니와의 추억과 출산,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8만원짜리 임대 아파트에 입주하는 순간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떠올리는 그 수강생들의 모습은 '꽃'을 통해 추상적 아름다움만을 뽑아내려는 미자의 시 작업과 적절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미자 역시 자신을 압박하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문제의 현장인 학교로 찾아간다.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있는 손자 또래의 학생들을 쳐다보다가,그녀는 다시 한 번 시 쓰기를 시도한다.

 

 

그녀의 시 속의 '새'는 그녀가 간병했던 중풍 환자 김희라가 그녀를 지칭했던 종달새-그는 미자에게 왜 그렇게 마냥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지저귀기만 하느냐고 묻는다-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지만 그 시 작업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다.그곳이 문제의 학교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운동장 가의 벤치에서 일어나 성폭행이 수시로 일어났다는 과학실로 향하는데,이렇게 시와 현실은 함께 가는 것이고,어쩔 수 없는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다.그리고 과학실 옆 복도에서,미자는,까치발을 디디고 발돋움을 한 채,과학실을 '본다'.현실을,그리고 세계를 '본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하지 않다.미자는 그 지역 사회에서 일종의 해방공간처럼 기능하는,지역의 시 애호가들의 시 낭송회에 끼어든다.이 모임에서 시를 낭송한 김혜정 -이 여배우는 공교롭게도 승려 시인인 황청원과 결혼했었던 이력이 있다-에게 시를 쓸 수 있어서 얼마나 좋으냐며,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느냐고 간절하게 질문한다.김혜정은 미자에게 '느낌이 중요하다'는 간명한 대답을 들려 준다.물론 이 대답은 미자를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리기만 한다.

 

이때쯤 이창동은 특유의 '궁지로 밀어붙이기'를 시도한다.시를 쓰고 싶은 개인인 미자와,그녀가 온전한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라는 관객들의 눈 앞에,그들의 시인의 육체에 관한 의학적 진단,'치매'를 들이미는 것이다.그녀가 시를 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시를 위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때 조차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사망선고를 내린다.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진료실에서 발견한 동백꽃을 바라보며 언제나 꽃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미자에게,의사는 심상한 말투로 저 꽃은 조화라고 대답한다.그나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미자가 시를 위해 투자해왔던 주요한 소재였던 '꽃' 마저도,가짜와 인공의 수준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다.이 정도면 관객은 이창동이 참으로 잔인한 작가라고 여길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미자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흔들리는 차창을 배경으로 또 하나의 싯구를 수첩에 추가한다.

 

 

 

자신의 상황을 반영하는 문장을 쓰는 이 장면 이후부터,미자는 점점 자기 존재의 핵심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자신의 절망적인 현실인 '시간'과 아울러 생각할 때,그녀라는 꽃은 이제 분명히 시들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되는 것이다.

 

미자의 시 작업과 미자를 둘러싼 현실이 정교하게 분할되어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자의 시는 다시 시작한다.예의 수강생들의 고백,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이 그것이다.이번에 등장한 수강생 하나는 자신이 저질렀던 어쩔 수 없는 불륜을 아름다움으로 제시한다.윤리와 욕망과 좌절이 아름다움으로 연결되는 것이다.이어 등장한 미자는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회상하는데,자신의 언니가 자신을 예쁘다고 말해주었던 한 순간,'내가 정말 예쁘구나'라고 느꼈던 그 머나먼 순간을,그녀는 눈물과 한숨을 섞어 얘기한다.

 

 

현실 속의 관객은 미자가 더 이상 예쁠 수 없다는 사실을,또 그녀의 신체를 갉아먹어가는 그녀의 병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데,나는 그 때 저 할머니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을,미학적인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으리라는 근거없는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별로 없는 미자는 더 이상 자신의 세계를 외면할 수 없어진다.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손자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 강가로 간다.그리고 또다시 수첩을 꺼내 무언가 시를 쓰려 한다.소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에 대한 미자의 여전한 갈망 때문일까.그러나 詩의 신은 ,그리고 이 영화는 이런 종류의 가벼운 진혼이나 송시를 허락하지 않는다.강가엔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빗물에 젖은 수첩은 그녀의 시가 진행되는 것을 막아버린다.

 

 

 

그러나 이 장면이 미자의 소녀에 대한 완전한 진혼의 의도,그녀의 시와 연결된 전적인 윤리적 결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이창동은 그렇게 갑작스런 전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그는 끈질기게 조각과 조각을 쌓아올려서 최후의 결말을 향해 다가가는 스타일의 작가이다.

 

어정쩡한 타의에 의해서 소녀의 엄마를 찾아가는 장면에서,미자는 소녀의 엄마를 단박에 알아채지 못하고 거의 미친 사람처럼 (사죄와 용서라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마주한 그녀는 정신없이 흥분하고 들떠버린다) 엉뚱한 이야기들 -올해는 풍년이었느냐,자신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곱다는 등 - 만을 늘어놓을 뿐이다.그녀는 소녀의 엄마를 만나러 들판으로 걸어가면서도 새와 강의 소리를 들으며 마냥 즐거워할 뿐이다.그러나 그녀가 그 들판에서 쓴 시는

 

 

이런 내용이다.의미심장함과 상황의 불균형이 공존하는 장면이다.

결국 그녀는 윤리를 택한다.(윤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얘기할 작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녀의 결정적인 결정과 연관되는 분명한 에피소드 하나를 얘기하고 넘어가야 겠다.

 

2-2.詩 와 음담패설 -시는 죽었다.

 

시 애호가들이 모임이 주최한 시 낭송회에는 재미있는 캐릭터 하나가 등장한다.지역 경찰서의 형사라는 그는 -이 형사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고고하고 우아하게 시인들의 시를 낭송하는 이 모임에 등장해서,남들처럼 점쟎게 시를 읊은 다음,마이크를 들고서 야한 음담패설을 시작한다.분위기를 망쳐버리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말한다.건강하시려면 말초신경도 좀 자극시켜주어야 한다고.일부 동호인들의 못마땅한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매번 이런 태도다.

 

그러나 그는 묘하게도 시 세계의 이런 고아한 분위기를 '불건강함'과 연결짓고 있다.내부비리를 고발하다가 한직으로 좌천되었다는 그의 과거 이력은,시 모임에 대한 그의 이런 지적에 특수한 합리성을 부여하기까지 한다.그러나 미자는 시 낭송회의 뒷풀이 자리에서 이런 그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한다.음담패설은 시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솔직하게 말한다.이때쯤 예의 김용탁 시인이 모임에 합석해 '시는 죽었다'라고 말한다.

 

미자의 간절한 질문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나요는 아예 성립불가능한 우문처럼 격하되어 버린다.이미 시가 죽어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이때 술에 취한 후배시인 -실제 시인인 황병승이 그 역할을 연기한다- 이 등장해,거의 술주정에 가깝게'시의 죽음'을 일갈한다.

 

이 장면에 이창동이 이어붙인 장면은,식당 바깥에서 미자가 서럽게 우는 장면이다.그녀는 왜 갑자기 우는 것일까? 못 마시는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손자의 범죄 때문에? 아니면 성폭행 사건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풍 노인 김희라와 치루어야 했던 섹스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혹시 '詩의 죽음' 때문에.

 

이 통곡은 굉장히 복합적이다.그 때 나타나는 사람이 바로 그 형사다.그는 '우리 누님 왜 우세요,시가 안 써져서요?'라고 물어보며 다정하게 미자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기묘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묻어나는 이 장면은,정말 특이한 수준에서 감동적인데,나는 그 순간 묘한 데쟈뷰를 느꼈고,이창동의 과거 영화 <밀양>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절망에 빠진 전도연을 위로하는 송강호의 저 장면은,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빚어질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연민이 빛나는 장면이었다.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과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동류의식이 저 장면 전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그래서 송강호는 전도연의 밀양 (비밀스런 햇볕)일 수 있었다.

 

 

 

낮과 밤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거의 비슷한 동작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다.형사 역시 미자에게 깊은 연민과 정겨운 교류를 준다.그러나 형사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결국 미자는 스스로 자신의 손자를 경찰에 넘기는데,이 형사는 그 결심의 중요한 지렛대로 작용하는 것이다.그의 존재가 미자의 결정을 소리없이 지지해주고 힘을 불어넣는다.그의 격려가 그가 유지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미자의 결단을 촉구하는 촉매이자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찬탄이 절로 나오는 시나리오적 능력이다.(영화진흥위원회는 이런 시나리오에 F학점을 주어서 영화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다.무능한 자들 특유의 정치적 결정인데,이 영화 속 미자의 생살을 도려내는 결정과 비교해 보면,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미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는 하필 손자가 경찰에게 끌려간 그 날 밤 쓰여진다.그리고 미자는 그 시를 쓴 후 자살한다.또 이 시는 죽어간 소녀에게 바쳐지는 듯 하다.시는 영화를 흐르는 내레이션을 통해 낭송되는데,처음에는 미자 윤정희의 목소리였다가 나중엔 죽어간 소녀의 음성으로 바뀌어진다.화면은 미자가 일상을 보냈던 공간을 비추다가 나중엔 소녀가 투신한 걸로 추정되는 다리 위,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소녀의 웃는 얼굴로 바뀐다.또한 이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시는 이미 죽은 것'으로 판정받는다.영화 '시'와 현실 속 문학 쟝르인 '시' ,그리고 미자가 쓴 시는 모두 다 죽음의 영향력과 자기장 안에 놓여 있다.

 

그래서 미자의 시 '아녜스의 노래'는 유서이자 송시이며,소녀와 시 자체를 향한 진혼곡이다.그러면서 미자 자신과 소녀 그리고 시의 부활을 위한 마지막 노래이기도 하다.실제로 김용탁 시인의 시 수강생 중 시를 완성한 사람은 오직 미자 뿐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창동의 영화 <시>가 제작되던 2009년과 2010년의 죽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특히 타살적 자살과 자살적 타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는 이창동의 영화 외적인 이력을 통해 노무현의 죽음을 자동연상되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고,또다른 죽음, 국가기관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죽어간 용산의 철거민들을 떠올릴 윤리적 의무를 갖는다.

 

그 죽음들이 동질적인 동류의 죽음이라는 뜻은 아니다.분명히 다르다.정확히 말하자면,영화 속 소녀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 보다는 용산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그것과 더 가깝다.그러나 이창동은 영화 <시>를 통해,시가,시를 쓰는 사람들이,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자신들의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상태를 깨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죽음'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시적 입장이라도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극적인 형태인 유서로 한 시대의 송시를 작성했다.미자의 마지막 시인 '아녜스의 노래'의 어느 구절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을 만날 때,우리는 어쩔 수 없이 힘없는 시민들이 항의의 표시로 들었던 수백만 개의 촛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그 촛불이야말로 이 퇴행적 야만의 시대에 우리가 쓸 수 있는 한 편의 '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그래야 그 시의 마지막 구절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처럼 이 시대의 시와 아름다움의 새로운 부활처럼 다시 깨어나,새로운 '보기'가 가능해진 '부신 눈'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결말을 향하여 다가가게 된다.이 영화가 이창동의 전작들처럼 징그러운 치열함이 덜 했던 것은,꼭 자연과 물과 아름다움이 영화 속에 결부되어서가 아니라,최악의 상황에서 끝까지 희망을 놓치지 않는 이창동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비록 문학인 '시'로 표현되었지만 말이다.

 

결국 시의 절반은 윤리적 태도였던 것이다.그리고 영화의 절반 역시 한 사회 내부에서의 '윤리'를 다루고 있다.이젠 그 윤리 얘기를 해야 할 시간이다.

 

                                        (계속)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