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자유.
자유라는 개념은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한 개념일 것이다.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언제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것
물론 이런 개념 정리는 지나치게 순진하다.현대사회 욕망양상의 다양함과 발현 수단의 제한이라는 암초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광주에 사는 내가 서울에 사는 누군가를 만나려면 우선 비행기나 기차를 타야 한다.나는 우선 차비를 지불해야 하고 그를 만날 공간을 위한 돈을 또다시 준비해야 한다.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그 장소에는 나와 내 일행만 앉아있는 것이 아니며 나는 그 상황에 또다른 성가심을 느낄런지도 모른다.또 그런 종류의 수많은 변수들이 여기저기서 득시글대고 있을 것이다.어떤 순간 내 기분은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고,가볍고 순수한 만남마저도 언제 어떻게 변질될런지 모르므로 경계와 염려라는 방어 메카니즘을 한 순간도 떨칠 수 없다.
현대인의 삶은 이토록이나 복잡해졌으며 우리의 다양한 욕망 역시 끝도 없이 갈래를 치고 나아가,종내에는 욕망하는 주체조차도 자신의 욕망의 정체를 몰라 허둥대기 일쑤이다.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너무나 지나친 소리이다.너무나 예민한 푸념일 수도 있다.미시적인 공간들 속에 침잠해서 자신의 자유개념을 인테리어 공사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이런 소박함들이 자꾸만 상업성과 결합해서 자잘한 고민거리들을 안겨주는 것이 문제일 뿐,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유라는 개념과 장소를 그 어디에서든 조합해내어 화학적인 실험을 즐기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오히려 자유의 반대 개념,바로 '구속'이 문제가 된다.수많은 높이와 층위의 금지개념들,해야 할 것과 하면 안 되는 것들,삶을 관통하며 줄지어 나타나는 온갖 금지와 의무들 속에서 우리는 허둥거리고 허우적거린다.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들과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하며 삶의 타협지점을 찾아 살아간다.완벽하게 억압당하면 사실상 자멸의 순간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우리가 행하는 '경계에서의 줄타기'는 점점 더 교묘해지며,그 경계의 너비와 속성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어쩌면 우리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현대시대의 중류층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대부분 이런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운명적 우울함이 정치와 역사의 질곡이라는 보다 거대한 부조리와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정치적 투쟁과 제세력간의 충돌 속에 개인의 자유가 담보당하고,자유와는 정반대 개념인 물리적 육체의 구속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2003년 가을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망각의 저편으로 묻혀버린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 간첩사건이 바로 그랬다.한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자유 마저도 지킬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와 함께,우리 사회 제세력들의 진면목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터져나와,사실은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게까지 했던,어찌 보면 블랙 코미디 같은 사건이었다.
2.경계도시,서울.
지금도 상영되고 있는 홍형숙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 2>는 바로 그 때의 사건들을 7년이 지난 지금 차분하게 되짚어가며,당시의 사회를 재조명하고 있다.하늘에 떠 있는 비행선 만큼 부풀려진 송두율이라는 작은 존재에 대한 사회 각계의 손가락질과 히스테리 반응,소위 진보개혁이라고 불리우는 세력의 타이밍 늦은 헛발질들을 침착하고 조용하게 제시하고 있다.7년이란 세월이 흐른 만큼,홍형숙의 시각은 고통스런 편집작업에 의하여 정갈해져 있었지만,새삼스럽고도 어쩔 수 없이 재생되는 분노로 인한 목소리의 떨림 만큼은 막을 수 없어 보였다.(홍형숙은 자신의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홍형숙은 마이클 무어 같은 엔터테인먼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과는 달리 조용하고 침착하다.홍형숙 스스로도 <경계도시 2>의 내용 안에 휩쓸려 들어간 것처럼 충격을 감추지 못하면서도,이내 카메라를 뒤로 물리고 냉정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다.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된 내레이션 속에는 최대한의 객관성과,같은 크기의 주관성이 함께 녹아들어 있어서,우리는 이 계속되는 독백에서 진정한 솔직함이란 미덕을 만나게 된다.고통스런 솔직함 말이다.정치적인 공정성이 아닌 기록자로서의 공정성을 결코 잃지 않는 홍형숙의 이 대단한 태도는 ,자신의 창끝을 피사체 모두에게 골고루 겨누고 있어서,(심지어는 영화를 보는 관객 마저도 그녀의 카메라를 피해 가기 어렵다) 예수의 그 말,양심이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를 곧바로 연상시킨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경험은 그리 즐거운 것이 아니다.내 개인적으로는 이창동의 <오아시스>를 보고 난 후의 신체증상 - 심한 소화불량과 상복부의 지극한 답답함- 을 거의 똑같이 경험했다.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어처구니없는 광경들은 강한 압박감이라는 감각적 기억을 두뇌 속에 새기고 말았는데,그것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실체를 드디어 확인하고야 만 망상증 환자의 심정과 비슷했다.간첩과 거짓말쟁이라는 형사적이면서 도덕적인 범죄자의 외양을 동시에 덮어쓰게 된 송두율의 모습은,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슷한 가면이 덧씌워진 사람들 -최근의 한명숙과 노무현 같은 -을 어쩔 수 없이 리콜시켰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정으로 우울해지는 것은,송두율 개인의 절망적인 마스크를 거의 강제로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송두율은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서울이라는 한 경계도시,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 영화 속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관객은 스스로의 실체를 완전히 가감없이 느끼게 되며,그 실체가 가슴 내부에서 균열이 가기 시작해 결국은 터지게 되는 그 파열음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경계도시 -대한민국
영화는 독일의 공항에서 시작한다.37년만의 귀국길에 오르는 송두율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서강대의 박호성 교수와 김형태 변호사.그들의 분위기는 매우 낙관적이다.귀향 자체가 가져다주는 정신적인 들뜸과 더불어 국정원의 '간단한 조사'이후 3주간의 체류 일정을 무사히 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지배적이다.글쎄,615선언 이후여서? 아니면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이후여서?
그들의 턱없는 미소 속에서 '경계도시'에 사는 우리는 타고 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물론 송두율을 초청한 민주화기념사업회 역시 혹시라도 생기게 될지 모를 위험에 대한 최소한의 '명분'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송두율 정도라면 그런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역시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그러나 송두율 본인은? 그들의 교감은 과연 같은 주파수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일까?
경계도시의 인물들은 애초부터,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들에겐 전사(煎史)가 있다.그들은 수년동안 송두율의 귀향을 위해 애써왔으며,이제야 (!) 그 결실을 맺어 우리 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정신질환인 레드 컴플렉스에 균열을 내려 한다.그런데 과연 그 정도로? 그리고 하필 유럽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왔던,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애써왔다지만 기본적으로는 서구적인 인권개념을 갖추고 있었을 송두율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영화의 시작부터 순간적인 의문들이 파바박 스치고 지나간다.어쩌면 영화의 결말과 훗날의 스토리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들 사이의 언밸런스를 느끼는 데에는 거의 본능적인 심리기제가 작동한다.
아니나 다를까.우리 사회의 좀비 아니 수구세력들은 기다렸다는 듯 당연한 공격을 개시한다.이런 파블로프의 개들스런 행동을 예측못했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소위 민주정부 6년차에 접어든 국정원은 송두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자진출두와 출국정지 검찰 소환이라는,변함없는 레퍼토리들을 진행시킨다.결국 이러다가 말겠지라는 낙관론의 입지는 점점 줄어간다.
역전의 용사들도 나선다.정형근은 국회에서 송두율이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자백했다고 선언하고(그 인간에게 피의사실 공표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같은 밴드의 멤버 최병렬은 해방이후 최대간첩사건으로 규정한다.수구언론들은 거기에 '거짓말쟁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올가미를 덧씌운다.그들은 송두율이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마치 북한 노동당의 실력자인 것처럼 애드벌룬을 띄운다.(여기에 대해 북한은 거의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역시 가명,김철수,그리고 거짓말쟁이다.
송두율에게 호의적이었던 여론은 급격하게 싸늘해져 간다.그를 지켜야 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노동당 입당'과 '김철수'부분에서 소위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은 주춤거리며 수세적인 자세를 취한다.그들은 희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 얘기를 평소 만큼도 꺼내지 않는다.또한 그들 역시 송두율의 '거짓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송두율 개인은 이제 저만치로 밀려난다.민족민주진보개혁세력의 일부는 판세의 전체를 살펴보고는 (또는 예단하고는) 송두율에 대한 새로운 압박자로 변신한다.
그리로 이후 영화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흐름을 따라간다.검찰과 국정원의 끝없는 압박.고개를 숙이면 무릎을 꿇게 하고 무릎을 꿇으면 팔다리를 끊어버리는 순서로 진행되는 정신적 고문이 경계도시에 홀로 선 철학자 송두율을 찍어누른다.보수세력은 그에게 완전한 굴종,완벽한 자기정체성 포기를 압박한다.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런 종류의 힘에 감연히 저항하는 이들은 의외로 소수다.게다가 2003년의 검찰과 국정원은 민주정부의 권력기관이라는 거짓외피까지 입고 있었다.거기에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지자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 이외에는,송두율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우리나라,아니 전세계 검찰 특유의 훼손전략,계속 소환하고 출두시키기,언론이라는 이름의 하이에나를 시켜서 지속적으로 물어뜯기 같은 저강도의 때리기 전략은 결국 당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검찰의 조사를 받던 사람들이 종종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훼손'을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이렇게 반성문을 써내면 저런 식의 반성문을 새로 요구하고,또다른 반성문은 다시 새로운 반성문을 요구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방법이다.아무리 송두율이 노동당 탈당을 선언하고 독일국적포기를 맹세하고 대국민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이 훼손의 메카니즘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검찰 국정원 보수언론 한나라당이라는 네 마리 원숭이들 (뒷날 송두율이 사용한 용어이다)의 자기존재증명은 이러한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공포'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의 좀비들에게 송두율은 최대의 호재였고,그들은 그 먹잇감을 통해 노무현 초기의 분위기를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송두율의 구속과 이듬해의 대법원 무죄판결은 당시의 그들에게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고,이들은 다만 이런 공포 분위기 조성을 통해 2004년의 노무현 탄핵으로까지 자신의 관성적 힘을 이어갔던 것이다.(가정이긴 하지만 송두율을 지켜냈더라면 탄핵도 없었을지 모르며 ,어쩌면 국가보안법의 완벽한 사문화를 이끌어냈을런지도 모른다)
구속과 재판과정이 진행되면서 송두율의 우울은 극에 달한다.그의 얼굴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이후로는,거의 죽은 사람의 낯빛으로 변해버린다.자신을 응원해줘야 할 사람들과의 의견 조율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그는 완전한 절망 속으로 떨어져 버린다.
가끔씩 투사연하는 말을 내뱉을 때에도 그의 우울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송두율에게 감정이입이 이루어진 관객들에게도 그 우울은 소리없이 전염된다.실체가 보이지 않는 해머로 연타당하는 느낌,날카로운 바늘로 심장 이곳저곳이 콕콕콕 찔려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늦은 구명운동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도 이 우울함은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한 사람의 정신적 꽃망울이 짓밟히고 터뜨려지는 꼴을 보았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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