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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igh Can Become A Novel. <전주국제영화제 기행> Part2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0. 5. 1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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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는 이미 막을 내렸다.미클로쉬 얀초의 회고전은 지금쯤 서울에서 열리고 있을 것이다.전주에서 미클로쉬의 영화를 놓친 사람들은 서울의 극장을 찾고 있을 것이고.전주국제영화제 JIFF에 대한 내 게으른 리뷰는 미루고 또 미루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영화에 대한 리뷰가 으레 그렇듯이 타이밍을 놓치면 그 열기도 사라진다.그러다가 그 시간들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기는 일 조차 시시해지고 또 그러다가 영원히 그 때의 시간들을 놓치고 또 그래도 인생은 여전히 심상하게 흘러간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회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돌아간다.우리나라 사회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일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쉽게 잊혀지는 이유는,우리나라 사람들의 냄비 근성 때문만이 아니다.그만큼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일들의 시리즈는 사람들의 정신을 끝없이 혼란시키고 정리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그 속도는 정말 가공할만 한데,한국 사회는 자신의 지나치게 빠른 자전 속도 때문에 스스로 현기증을 일으키고 스스로 파들파들거리고 있는 것이다.혼란스럽지만 내적인 질서를 가지고 돌아가는 16차선 고속도로의 교차로 같은 곳이 우리나라 사회다.그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은 무진 애를 다 쓴다.낙오와 낙오 이후가 실시간으로 눈 앞에 그려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뛰고 또 뛴다.근원적인 불안감이 존재를 짓누르고 또 짓누른다.우리가 사는 삶은 거의 카프카의 단편소설들이 묘사한 삶과 유사하다.굴을 파고 또 판다.그러다가 굴 자체에서 울려대는 굉음과 소음에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내가 글을 쓰는 이 공간은 그 속도에 대한 일종의 제어장치 중 하나이다.가끔씩 찾아가는 공연들과 영화제 역시,기본적으로는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 도우미들일 것이다.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면서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다.그러면서 한편으로,적어도 내게 만은 의미망을 던져주는 기록과 보고들을 작성하는 것이다.나는 이 기록들을 은별이가 25세가 되는 19년 후에 딸에게 공개할까 한다.뭐,큰 의미는 없다.그때쯤 나는 이미 은퇴해있을 지도 모르고 (그거야 물론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삶의 황혼을 준비하는 상황이 되어있을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무덤과 비석과 유언장을 남기고 떠나는 것,후손들이 조상들의 죽음을 기념하며 묵념하고 밥을 먹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비원이자 소망이다.

 

은별이는 알게 될 것이다.2010년 5월 2일 아빠가 고적한 영화도시 전주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그리고 점심식사로 전주의 유명한 음식인 -물론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비빔밥을 45년 전통의 비빔밥집이라고 간판이 내걸린 '성미당'에서 먹었다는 사실을.영화제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린 탓에, 줄까지 길게 서서 먹느라 거의 1시간을 소비하고야 말았다는 사실을,완전히 낯선 영화제 관객들과 한 상에 앉아 뜬금없이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는 사실을,그리고 아빠가 다음에 봐야 할 영화의 시작 시간 때문에 연방 시계를 보며 초조해했다는 사실을,적어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다가 그 아빠는 이렇게 인증샷까지 남기고 말았다.은별이는 생각할 것이다.아빠는 왜 이 좋은 5월의 봄날에 낯선 도시의 비빔밥집에 앉아있었던 것일까? 가정적인 사람은 도무지 아니었다는 증거일까? 엄마와 자신은 그 시간에 뭘하고 있었을까? 아빠에겐 역마살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다 은별이는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이다.(그 결론을 나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다..) 은별이는 결국 가볍게 미소짓거나 또 한숨짓거나 또는 의혹에 잠겨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그러나 은별이가 그 어떤 신통하고 심각한 결론을 내렸다 하더라도,내가 2010년 5월 2일 오후에 느꼈던 심상과는 영원히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어쩔 수 없는 시간의 괴리가 은별이와 나 사이에 심연처럼 자리하고 있고,근본적인 인간적 거리가 나와 내 딸 사이에 버티고 있을 것이다.(그래도 20년 후에 댓글을 남겨라,은별아.)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사진과 글을 남길 것이다.사람의 삶은 시간과의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며 패배가 예정된 전투이다.하지만 또 해야 할 것을 하고 남겨야 할 것을 남기면서 시간의 도저한 흐름을 지켜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정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영화에서의 한 장면 한 장면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눈물과 땀이 배어들어간 시간이다.훗날 그 영화를 보는 우리가 그들의 작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들이 영화를 만들었던 시간과 우리가 영화를 보는 시간의 불일치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시간을 재창조하고,그들은 우리 눈과 두뇌 안의 감각에 의해서 재해석되고 또 재해석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간을 또 한 번 소급해보자.영화감독과 배우들이 영화를 찍었던 바로 그 시간과,찍힌 필름들을 다시 소집해 편집하는 그 시간 사이의 차이는 어떨까? 그 시간차가 만들어내는 차이 역시 간과하기 어려운 괴리가 아닐까? 다른 예술 쟝르들과의 근본적인 다름을 만들어내는 영화예술에서의 '편집'은 결국 그 시간에 대한 배신이자 재해석이다.배우가 만드는 단 하나의 미소는 촬영 당시의 그 순간에 가장 순수하다.그는 진정으로 미소짓고 자신의 연기를 진통 끝에 출산한다.그러나 영화의 프레임은 시시각각 달라진다.미소의 양상은 24분의 1초로 나뉘어져 기계화된 시간으로 분산되고,편집자는 그 24장면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관객에게 제시한다.그래서 관객이 볼 수 있는 배우의 웃음은 스물 네 개의 가능성 중 하나로 전락한다.우리는 배우의 웃음을 '진실'로 받아들이지만,사실 그 진실은 24가지의 가능성 중 하나였던 것이다.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

 

포르투갈의 페드로 코스타가,쟝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라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거장들의 편집 작업과 영화 자체에 대한 강연을 영상에 담은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는 바로 이 작업을 다룬 영화이다.페드로 코스타는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양해를 얻어서 그들이 만든 영화 <시실리아>의 편집작업을 텔레비젼용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내는데,이후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 <당신의 숨겨진 미소..>에는 영화작업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숨겨져 있다.

 

아날로그식의 편집이라는 지루한 방식을 하루 종일 수행하면서,영화사의 가장 멋진 커플인 스트라우브와 위예는 끝없이 싸우고 토론한다.(영화는 그들의 논쟁을 끝없이 반복한다) 도발하는 쪽은 주로 남편인 스트라우브 쪽이다.그는 가편집된 영화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그는 앞으로 감기 (rewind)와 뒤로 감기를 거듭하며 장면과 장면 하나하나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 정확한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거의 신경증적으로 필름에 집착한다.아내인 위예는 남편의 거듭된 요구에 짜증스러워할 때도 있지만,결국엔 남편의 의도를 받아들이고 전 작업을 함께 수행한다.

 

그것은 가령 이런 것이다.<시실리아> 속 한 남자 배우가 미소를 짓는 장면이 있다.그런데 스트라우브와 위예는 계속 필름을 돌려가면서 그 미소를 여러 분절로 나누어서 관찰한 다음에,가장 적절한 미소를  찾아내는 것이다.개개 미소의 미세한 차이를 일일이 분석하면서 스트라우브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아트'를 계속해 나간다.그 와중에 화가 난 위예가 남편에게  쏘아붙여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트라우브는 자기 작업을 지속하는데,그것은 마치 프랑소와 트뤼포가 그의 <쥴 앤 짐>에서 묘사했던 '영원한 여인의 미소'를 찾는 지난한 과정에 비견될 만 하다.(그러나 스트라우브의 미소는 트뤼포의 미소처럼 매혹적인 것 조차 아니다,스트라우브가 찾고 싶은 것은 그저 '진실'일 뿐이다)

 

또 우리나라로 치자면 임권택의 그 강렬하고 본능적인 영화작업과정이 연상된다.물론 임권택은 편집 이전의 촬영과정에서 이런 작업을 많이 수행하는 편이지만,영화 장인들 사이에는 이런 공통된 고민의 과정이 있는 모양이다.

 

물론,촬영 당시의 감각과 편집 때의 감각엔 또 차이가 있을 것이다.감독이 뽑아낸 미소와 배우가 베스트로 생각한 미소는 서로 다를 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아우르며 자신의 최고를 뽑아내려는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자세엔 예술의 거장으로서의 거친 자세가 있다.자신 앞에 놓인 소재를 향해 덤벼드는 터프한 감각이 있다.

 

이 자세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찬양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그 지루한 과정을 지켜보아야 하는 관객의 입장에선 또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내 양 옆에 있던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어버렸다.더구나 페드로 코스타가 두 감독의 위치를 편집실 자체에 한정시킴으로써,화면은 검은 어둠 속에서만 진행되고 있었다.잠의 여신에겐 최적의 환경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라는 영화 제목에서 로맨틱한 장면들을 상상했을 관객에겐 최악의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내 왼쪽 옆의 부부,선하고 점쟎은 인상의 중년 부부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잠이 들었고 오른쪽 옆의 열혈 영화청년 역시 쏟아지는 잠을 어쩌는 수가 없었을 것이다.(내겐 비장의 무기인 박카스 속의 카페인이 있었다)

 

미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스트라우브와 위예는 심지어 허리 굽혀 인사하는 각도에서 조차 논란을 벌인다.

 

 

어떻게 인사할 것인가? 얼마나 허리를 굽힐 것인가? 등등..

이런 게 뭐 그리 중요하느냐고? 어둠 속에서 작업하다가,잠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담배를 피고 들어왔다를 반복하던 쟝 마리 스트라우브가 갑자기 문 바깥의 하얀 백색 공간으로부터 들어오면서 말한다.(시간이 흘렀으므로 내 기억이 정확하지만은 않을 것이다,사실 나 역시 비몽사몽간이어서 이 말이 이 장면에 나왔는지도 정확치 않다)

 

-영화의 리얼리티에만 집착할 수는 없다.그렇다고 해서 영화적 상상력에만 의존해서 영화를 만들어서도 안된다.진정한 천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그리고 그 인내심이 적절한 집중력과 자신의 작업을 삭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을 때,진정한 명징성이 획득되는 것이다

 

바로 명징성.감각적인 확실함.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A Sigh Can Become A Novel.

 

글쎄,내가 저 문장의 문맥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하나의 가느다란 한숨이,또는 하나의 숨이 바로 하나의 소설,하나의 걸작을 만들어낸다는 말.미시적인 세계로부터,현미경적인 세계로부터의 감각적인 경험이 만들어내는 가장 고귀한 순간들의 연속.작업자들의 절대적인 한숨들이 만들어낸 창조물.그것이 영화라고 스트라우브 할아버지는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물론 작업과정은 험난하고 지루할 것이다.하루에 겨우 다섯 개의 컷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작업은 지금 세기의 사람들이 볼 때,'실용'과 '돈 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사람들이 볼 때,거의 무의미한 미친 짓에 가까울 것이다.그러나 이런 미친 사람들이 지구라는 행성에 거대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삶에 풍성함을 부여하는 것이다.임권택 감독이 지금 만들고 있는 <달빛 길어올리기> 역시 전통 한지를 복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임권택이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한지'같이 어렵고 돈 안되는 작업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소재로 영화화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역시 마스터들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소통하고 있는 것 아닐까.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주옥같은 영화 아포리즘은 그 후에도 쏟아진다.기차 안에서 대화하는 두 사람의 장면을 편집하는 것 역시,그들에게는 거의 투쟁에 가까운 혹독한 작업이다.보통 대화하는 사람의 이미지와 기차의 소리는 따로따로 편집되어서 나중에 결합된다.믹싱이란 작업이다.그러나 스트라우브는 이런 과정에 진저리를 친다.그는 믹싱을 '수프(soup)'라고 표현한다.영화 속에 잠재된 빛나는 각개 요소들을 모조리 한 솥에 쏟아넣고 끓여낸 후의 혐오스런 결과물로서의 수프.그는 믹싱이라는 수프가 영화의 리얼리티,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리얼리티를 결정적으로 훼손한다고 생각한다.그에게 있어서 그가 찍어냈던 모든 요소들은 죄다 살아있어야 하고,편집과정을 통한 삭제와 취사선택을 통해서 만이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그는 인물의 대화와 기차의 사운드를 적당하게 믹싱하는 대신,숏과 사운드를 정확히 일치시키려는 언뜻 보아 말도 안되는 작업을 수행하려 한다.위예의 항의 역시 먹히지 않는다.그렇게 했을 때,예의 그 명징성이 가장 온전한 형태로 담보될 수 있다고 스트라우브는 믿는 것이다.

 

어두운 편집실 안에서의 고통스러운 작업.빛나는 시간의 재생,그렇게해서 얻어지는 전혀 새롭고 정직한 의미.두 사람은 영화작업의 실체를 그렇게 파악하는 것이다.

 

봄볕이 쏟아지는 나른한 바깥으로 걸어나오면서 나는,어쩌면 그 부부-스트라우브와 위예-가 참 행복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리고 우리 영화인들,나아가서 '지원은 하고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전 정부의 영화정책에서 '간섭만 하고 지원은 줄인다'로 과감하게 정책을 바꾼 우리나라 문화당국을 굳이 덧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생각하면 비참해지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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