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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초상 PART1 <모두가 왕의 부하들>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0. 4. 2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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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로버트 로센 감독이 만든 영화 <모두가 왕의 부하들 (원제; All the king's men)>은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청렴한 내부고발자로 시작한 공무원이,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를 거치면서 정치에 투신하게 되고,연속된 선거 패배에 초심을 잃고 기득권 계층과 야합하면서 변해가는 과정, 그냥 변한 것이 아니라 아예 마키아벨리스트와 포퓰리스트의 두 가지 면모를 보이면서 카리스마적인 정치행태를 보이다가 결국 암살당하면서 삶을 마감하는 과정.이것이 이 영화  줄거리의 거친 요약이다.

 

이런 종류의 도덕적인 추락은 단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 세계에서도 여지없이 반복적으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사실 성접대를 받았다는 검사들의 지난 날이 순결한 이상에 불타올랐던 나날이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영화들을 보게 되면  어디선가 접했던 스토리를 대하는 것 같은 데쟈뷰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그리고 언제나 되풀이되는 여러가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다.정치인의 도덕성에 대한 오래된 논쟁,현실과 이상이 펼치는 접접없는 평행선,그리고 카리스마적인 한 사람이 변해갈 때 함께 변해가고야 마는 주위 사람들.이런 질문들 역시 또 하나의 데쟈뷰로 떠오르게 된다.그러나 이런 종류의 질문들을 완전히 피해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은 정치인들을 통해서만 이런 질문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속성과 규모는 다를지 모르지만,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질문들은 거의 영락없이 또 예외없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던져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1.윌리 스탁,한 때의 왕

 

<모두가 왕의 부하들>의 주인공인 윌리 스탁의 첫 시작은 지역의 토착건설업자들에 대한 고발에 이은 시 행정관 출마이다.조그만 시골 도시의 강건한 경제 카르텔 앞에 달걀로 바위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그의 선거 유세는 방해받기 일쑤이고 물론 선거에서도 패배한다.윌리 스탁의 이런 첫 도전은 그를 취재하는 기자 잭의 시선으로 기록된다.잭은 그의 이런 바보스런 도전에 경의를 표하면서 서포터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윌리 스탁이 경고했던 '건설 비리'는 그의 예언처럼 아이들의 참사로 끝이 나게 된다.(그는 교육현장의 부실 공사를 고발했던 것이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기존의 정치권이 그를 포섭하게 되고 그는 제3의 후보 형태로 주지사 선거에 나서게 된다.그러나 유권자들은 이상하게 냉담하다.그것은 그의 유세 연설이 너무나 멋없는 형태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그는 세금과 복지를 얘기하면서 전문적인 숫자들만을 동원했던 것이다.세율과 물가상승을 숫자로 풀이하자 심심함을 느낀 유권자들이 오히려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게다가 그를 영입한 정치권 인사들도 개혁적 후보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그를 끌어들인 것이었고,윌리는 자신이 꼭두각시인줄도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변화하는 시간은,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이다.그는 술에 잔뜩 취해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더 이상 복잡한 숫자나 사람들에게서 유리된 추상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Now, shut up! Shut up, all of you! Now listen to me, you hicks. Yeah, you're hicks too, and they fooled you a thousand times like they fooled me. But this time, I'm going to fool somebody. I'm going to stay in this race. I'm on my own and I'm out for blood.

 

그는 자극적인 단어들을 사용하고 당신들이나 나나 똑같은 촌놈이란 것을 강조하면서 극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간다.자신에게 해머를 주면 기득권자들을 다 부숴버리겠다고 기염을 토하면서 대중들의 환호성을 만들어낸다.이것을 단순한 포퓰리즘이라고만 얘기하긴 어렵겠지만 사람들의 감성들을 자극하고 민중들의 의도를 조작해내는 영화 뒷쪽의 정치 행태는 바로 여기에서 싹텄던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는 패배한다.실망하지 않았느냐는 잭에게 윌리는 괜챦다고,얻은 게 있다고,바로 '어떻게 이기는가'를 알았다고 대답한다.윌리가 체득한 '이기는 법'은 바로 기득권 세력과의 연합이었다.그는 그 연합을 통해 주지사 선거에 승리하게 되고 주지사가 된다.그는 여전히 촌놈의 대표임을 자처하지만 뒷편에서 그를 응원하는 것은 과거의 세력이다.결국 그들에 의해 각종 부정과 비리가 자행되지만 윌리는 진실을 덮으려고만 하고 자신을 탄핵하려는 판사를 뒷조사하고 협박해서 자살에 이르게까지 한다.탄핵 재판이 진행되는 법원 바깥에 대규모 군중들을 동원해 법원을 압박하고  탄핵을 부결시킨다.그러나 그 순간 판사의 조카에게 저격당해 사망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어온 배우 데릭 크로퍼드는 이중적인 정치가 캐릭터인 윌리 스탁을 잘 소화해낸다.(원래는 존 웨인에게 제안된 역이었다지만 골수부터 공화당원인 존 웨인이 엔딩 부분의 '희망없음'을 지적하며 이 역할에서 발을 뺐다고 한다.다음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존 웨인은 데릭 크로퍼드와 경쟁하게 되었는데,승자는 크로퍼드 쪽이었다)

 

그는 윌리 스탁의 맑고 가정적이었던 지난 날을 연기할 때는 거의 제임스 스튜어트 식의 연기를 선보이다가,

 

나중에 아들 마저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이용하고 아내를 배신하며 정치적 음모를 일삼을 때는 거의 느와르 영화의 마피아 두목 처럼 변신한다.(우리나라의 변심한 정치가도 거의 이와 비슷한 변신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윌리 스탁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지나치게 어두웠던 탓인지,감독 로버트 로센은 뒤에 남은 사람인 기자 잭 버든과 그의 과거 연인 앤 스탠튼의 대사 - 이 모든 일들을 모두에게 알릴 수 있도록 우린 살아남아야 해-를 끼워 넣긴 하지만,그렇다고 이 대사가 영화 전체에 희망의 빛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씁쓸함과 체념의 심정이 영화 뒷 쪽을 장식하는 것이다.어쩌면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이런 스토리를 너무나 많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2.왕의 부하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주인공 윌리 스탁보다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을 더 유심히 지켜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그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초상이자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먼저 화자 격인 잭.그는 윌리 스탁을 맨 먼저 기사로 발굴해 대중에게 알린 기자이다.그는 윌리의 강직한 청렴함에 반해 윌리의 기사를 싣지 못하게 하는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4년을 낭인으로 떠돌기까지 한다.그렇게 그는 윌리 스탁의 강력한 지지자이기도 하지만,주지사가 된 이후,윌리가 변해버렸다는 사실도 잘 안다.그는 윌리에게 화를 내고 반기를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윌리가 죽기 전까지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윌리의 부하로 행동한다.

 

오히려 그의 앞잡이가 되어 정적인 스탠튼 판사의 약점을 캐내어 판사의 죽음에 일조하기도 한다.그는 왜 그토록 윌리 스탁이라는 왕에게 휘둘리는 것일까? 심지어 옛 연인 마저 윌리의 정부가 되어 있음에도,몇 번이나 그의 곁을 떠나려 결심을 하면서도,여전히 그는 윌리의 수하에서 행동한다.혹시 잭은 윌리가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숱한 행정적 권력의 남용과 비리 사이에서도 어쨌든 윌리가 대중들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갔던 것일까,아니면 정치가에게 있어서 도덕성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일까.(물론 어떤 의미에서 정치지도자에게 지나친 도덕성을 강요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야말로 연구의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잭이 바라는 개혁과 변화는 계급적인 것이 아니다.영화의 전반부에 나오는 잭 가족의 만찬 장면에서 잭은 그의 양부와 충돌한다.변화를 얘기하는 잭을 그의 양부가 비아냥거리는 것이다.양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과 권력인데,윌리 스탁은 그런 종류의 기득권을 지켜낼 존재가 아니라고 양부는 대놓고 설파한다.반론하는 잭에게 양부는 너야말로 내 돈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것 아니냐고 비난하기까지 한다.그러나 양부는 윌리의 변절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기도 하다.윌리가 상류층의 원조를 요청할 때 그는 그동안 가져왔던 거부감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잭 보다는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윌리 스탁은 소위 개혁과 변화를 원하는 상류층 인사들 앞에서 '선은 악에서 나온다'라고 말한다.어느 정도의 타협접이 존재해야만 실제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언설이다.보수가 진보를 몰아붙이는 대목 역시 주로 이런 심리에서 출발한다.너희들은 너무 이상적이다.현실적이지 않다.현실과 타협할 때 개혁 역시 가능한 것이다.전적인 선함이란 있을 수 없다.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한 '수단'도 사용되어야 한다.이런 혹세무민은  자본주의의 간판스타로 내세워진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서 언제든 가능할 수 있도록 조직화되어 있다.

 

잭의 옛연인이자 윌리의 정부인 앤의 오빠 애덤은 유능한 의사이자 개혁적인 의지로 가득 찬 인물이다.'선은 악에서 나온다'라는 윌리에게 애덤은, 윌리가 추악한 이익단체들과 타협을 일삼는다고 항의하며 선과 악을 판별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냐고 묻는다.윌리는 매우 쿨하고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거래 따윈 없다고.

 

맞을 수도 있다.거래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건설회사 사장에게 수십년 동안 향응과 용돈을 제공받은 검사들도 그 술자리를 거래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당연한 관례이자 지역유지와의 친밀한 친목모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들에게 선악 개념이란 매우 모호한 층위에서 작용하는 먼지낀 구름 같은 것이었으며 궁극적인 선이나 악에 대한 고려 보다는 그런 식으로 훈련된 자신들의 위치와 지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선은 악에서 나온다'는 말,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단'과 '타협'이 필요하다는 말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던 애덤은 그러나 윌리와 타협한다.그것은 그의 오랜 꿈,지역민을 위한 메디컬 센터의 건립 때문이다.애덤은 윌리에게 '서로 간섭하지 말자'라고 얘기하며 병원장 직책을 받아들인다.심지어 그의 삼촌인 판사가 윌리에게 공격받는데도 말이다.이것 역시 선-병원건립-이 악-윌리와의 타협-에서 나온다는 태도의 연장선이며,심리적으로는 주지사 윌리에게 이미 포섭당한 결과이다.그런 그에게 윌리는 여유있게 말한다.계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말이다.

 

애덤의 동생인 앤 역시 윌리의 부하가 된다.잭의 연인이던 그녀는 윌리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정부가 되어 스캔들을 일으키게 된다.심지어 그녀는 삼촌의 약점을 제보해 삼촌인 판사를 자살하게까지 만든다.앤은 윌리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되면 이혼한 윌리와 재혼해 백악관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최상류층으로의 편입에 대한 환상이 영락한 상류층인 앤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그것을 그녀는 사랑이란 단어로 포장한다.추궁하는 잭에게 앤은 '다른 사람하고는 달랐다'라고 대꾸하지만 그것이 사태의 본질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프레임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인가.

 

앤의 삼촌이자 대쪽 같은 판사 스탠턴 역시 윌리 스탁 주지사와 한통속이 되었던 것은 마찬가지다.그는 마침내 윌리의 정체를 깨닫고 그의 정적으로 활동하지만 수십년 전의 비리를 파고 드는 윌리의 압력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스탠턴은 결코 계속적인 투쟁의 노선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법관으로서의 자신의 명예이지,사회적 정의는 아니었다.구세대적 귀족을 상징하는 그는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퇴장을 감내한다.

 

이렇게 윌리의 부하들은 모두 다 자신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바라본다.험한 태풍을 만났을 때,그들이 생각한 것은 배 전체의 안위가 아니라 자신의 안전이자 욕망이었던 것이다.이런 욕망들이 모두 힘을 합쳐 포퓰리스트 정치가 윌리 스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라고 영화는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프랭크 카프라의 인민주의적 영화로 시작했던 영화가 갑작스런 느와르 풍으로 변질되어서 비관적인 메세지로 일관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3.휴이 롱

 

영화 <모두가 왕의 부하들>에는 원작소설이 있다.로버트 펜 워렌이 써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원작소설의 윌리 스탁에겐 실존인물인 모델이 있다.루이지애나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역임한 휴이 롱이 바로 그 사람이다.그 시대 사람들에게 킹 피쉬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그는 급진적 사회개혁과 복지계획을 밀어붙인 개혁가로서의 면모- 그는 1930년대의 루이지애나에서 무상교과서와 주립대학,소득세와 상속세의 인상,그리고 부유세를 신설했고 사원지주제까지 감행했다- 와 독단적인 권력 남용을 일삼는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다함께 갖추고 있었다.

 

 

 

그는 영화 속 윌리 스탁처럼 대중 선동에 능했으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언제나 대중들을 조직화해서 위기를 견뎌 냈다.대통령의 꿈을 그려가던 휴이 롱은 그의 독단적 행태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정적 중 한 사람의 아들에 의하여 총격당해 사망했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여러번 드라마화 되었다.1985년의 미니시리즈에선 존 굿맨이 윌리 스탁의 역할을 맡았고 2006년의 영화에서는 숀 펜이 윌리 스탁이었다.그만큼 그의 삶은 극적인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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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을 그린 영화들을 보면서 던져야 했던 질문들 중에는 이런 것들도 있었다.

정치 리더들의 도덕성은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는가? 정치가들의 모럴 이전에 정당 시스템의 도덕성이 먼저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또 도대체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좋은 시민들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인가.또 하나 우리나라의 진보세력들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바꾸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현학적이고 문어체적인 말투,해외에서 직수입된 사회과학책에서 바로 꺼낸 듯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행태를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변혁의 앞날은 혹시 아주 작은 지역적 단위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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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시작은 기대화 흥미,그리고 분노와 열정에 찬 사람들의 얼굴과 발걸음들로부터 시작된다.그들은 윌리 스탁의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로 향하고 있다.손에 들린 피켓엔 we want Willy라는 말이 쓰여 있다.이곳저곳에 횃불들이 타오르고 있고 ,폭력의 기운 마저 감지된다.그리고는 윌리 스탁의 거칠면서도 파워풀한 연설 장면이 연결된다.그러나 그는 스크린 바깥의 관객에게 등을 돌린 상태다.관객은 그의 등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그렇게,그는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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