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안녕하세요.
할머니 그동안 안녕하셨어요.천국에도 눈이 오나요? 할머니가 그 곳에 가신 지도 벌써 5년이 되는 군요.지금 이쪽은 크리스마스에다가 연말이라고 난리입니다.들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갈 곳이 많은 사람들과 갈 곳이 별로 없는 사람들,바쁜 사람들과 외로운 사람들이 여기저기 마구 뒤엉켜 있네요.천국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밝히나요? 가끔 할머니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그건 아마 제가 나이가 좀 들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제가 할머니께 편지를 쓰는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이후 처음이니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13세 때의 그 편지에서 전 할머니께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졸라댔었네요.처음엔 안부 편지로 시작했던 것이 마지막엔 그렇게 흘러가고 말았습니다.안부 편지가 어떻게 하다가 청탁성 편지로 변질되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실소가 터지지만,제 글이 그렇게 중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답니다.
할머니,전 오늘 영화에 관한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그것도 영화 속 눈물에 관한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할머니야말로 '눈물'에 관한 편지를 수신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분이시니까요.할머니는 참 많이도 우셨습니다.그러나 할머니의 눈물은 보통 할머니들의 눈물과는 아주 많이 다른 스타일의 눈물이셨습니다.삶의 고통이나 한에서부터 비롯된 눈물이라기보다는 거의 습관적으로 흘리는 눈물이셨으니까요.
할머니,할머니는 정말 자주도 우셨습니다.오죽하면 집안에서의 별명이 '눈물의 여왕'이었고,교회에서의 별명은 '눈물의 ㅇ권사',그리고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붙인 닉네임은 '수도꼭지'였겠습니까.맞습니다.할머니는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나 자주 우셨습니다.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보셔도 울고 교회에서 기도를 하다가도 울고 그리고 텔레비젼 드라마 앞에서는 아예 눈가에 홍수를 이루셨습니다.추석이나 설날에 온 집안이 둘러 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할머니의 눈물 어린 10분간의 기도가 선행되지 않고선,우린 국 한 숟갈 떠먹을 수 없었어요.국이 식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다른 분에게 기도를 시키게 되면,할머니는 그 분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연이어 기도합니다'를 외치며 기도시간을 연장하셨기 때문에,제발 밥 좀 빨리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무산시키기 일쑤셨습니다.
할머니,왜 그렇게 많이 우셨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할 지경입니다.그러나 나중에 할머니의 마지막 해에,할머니가 예전처럼 그렇게 울지 않으시고 오히려 감정이 메마른 듯 무표정으로 일관하셨을 때,오히려 할머니의 눈물을 보지 못하는 우리 쪽이 마음아파했었던 기억이 납니다.눈물이야말로 할머니의 트레이드 마크이고 할머니를 상징하는 감정 메카니즘이었던 것이죠.
할머니,오늘 저는 할머니께 올 해 제가 보았던 눈물 나는 영화 몇 편에 관한 얘기를 들려드리고 합니다.그렇게도 많이 우셨던 할머니이니,적어도 눈물에 대해서만은 프로페셔널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제 얘길 들으시고 짧게, 제발 짧게 코멘트 해주세요.영화라고 해서 놀란 척 하셔서는 안됩니다.할머니는 제가 어린 시절 저를 데리고 숱하게 극장에 가셨쟎아요.방학 때마다 할머니가 사시는 도시에 한 달 씩 내려가 있으면,가끔 할머니는 저와 함게 극장에 가셨습니다.우리가 보았던 영화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성경의 주인공들을 소재로 한 에픽 무비들이었는데,윌리엄 와일러의 <벤 허>의 전차경주장면이나.세실 B 드밀의 <십계>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장면들을 제가 처음 본 것은 할머니와 함께 간 극장의 스크린을 통해서였을 겁니다.
그 시절의 극장은 지금처럼 깔끔하진 않았습니다.좌석지정제도 아니어서 유명한 영화들이 들어오면 서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꽤 많았는데,그런 와중에도 할머니는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서 저를 앉게 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그리고 또 한 가지,왜 할머니는 극장에 과일을 챙겨오셨던 겁니까? 할머니는 그 복잡하고 먼지많은 극장에서 저에게 과일을 먹이고야 마셨습니다.그것도 극장에서 직접 칼을 꺼내셔서 깎으신 다음에요.물론 제가 그 극장에서 가장 호사를 누린 관객이었다는 사실 만큼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요.
물론 할머니와 제가 보았던 영화들은 그렇게 눈물 나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만(할머니는 <벤허>를 보든 <십계>를 보든 꼭 우셨지만요) 할머니,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관객을 울리는 영화들을 만드는 것일까요?그리고 왜 그런 영화를 보고 꼭 울고 마는 관객들이 존재하는 걸까요? 눈물이 그렇게 우리네 삶에 꼭 필요한 존재인 것일까요?
하긴 우리는 우리 삶의 어떤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 눈물과 울음을 한사코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눈물은 감정을 달래주고 승화시켜 주니까요.목이 꽉 막히고 속이 답답할 정도로 참아내다가 결국은 흘러내리는 눈물들은 우리의 마음을 곱게 풀어주는 것이 분명합니다.눈물은 아마 청소기능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모양이에요.어쨌든 카타르시스니 뭐니 하는 어려운 얘기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눈물이 인간의 영혼에 도움을 주는 생리작용이라는 것 만큼은 확실합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영화 역사엔 전통적으로 사람들을 울리는 최루성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는 경향들이 존재합니다.눈물이 재물로 화하는 거지요.그래서인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매우 꾸준하게 관객들을 울리는 영화들을 제작해 왔습니다.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사람을 때리거나 학대해서 돈을 버는 것 보다는,멀쩡한 산과 강을 파헤쳐서 돈을 버는 것 보다는, 울려서 돈을 버는 것이 조금은 나을 테니까요.
올해에도 저는 관객을 울리는 영화들을 몇 개 보았습니다.그 몇 개의 영화들을 말씀드릴테니 들어주세요.할머니.
애자
저 포스터 속 두 사람이 참 닮았지요? <애자>라는 영화에 나오는 엄마와 딸이에요.엄마와 딸,오만가지 사건이 다 벌어질 수 있는 관계가 되겠습니다.할머니처럼 딸이 없는 분들은 약간 이해하시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데 저 엄마와 저 딸은 얼굴만 닮은 게 아니에요.성격도 닮았고 말투도 닮았고 인생에 대해 가지는 독립적인 성향도 닮았습니다.엄마는 은근히 저 딸 보다는 아들에게만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딸을 열받게 해 왔고,또 저 딸은 작가가 되겠다는 욕심에 엄마가 딸에게 가지는 세속적인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합니다.그렇게 서로에게 불만을 가지고 아옹다옹 살아왔구요.
그런데 왜 저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느냐구요? 할머니,이건 우리나라 영화입니다.우리나라 영화가 이럴 때 써 먹는 가장 평범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죽음이죠.그것도 갑작스런 사고사가 아닌 질병에 의한 죽음입니다.병으로 인한 죽음이 사고로 인한 죽음과 영화적으로 다른 것은,병사의 경우 죽음의 과정을,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그대로 화면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겠지요.그리고 거기엔 당연히 눈물과 슬픔이 동반되는 거구요.네,저 엄마가 죽습니다.그것도 암 선고를 받고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그리고 언제나 엄마와 티격태격해왔던 저 딸이 엄마가 죽기까지 바로 그 옆에 존재하며 간병을 하게 되는 거구요.
아,벌써 우시기 시작했군요.관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거의 모든 관객들에겐 엄마가 있고,적어도 관객의 반쯤은 딸이었을 테니까요.그래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울 수 밖에 없습니다.너무나 안타까워진 딸이 엄마를 꼭 껴안고 차츰 파리해져만 가는 엄마가 죽음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갈 때,우린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새 사람들은 할머니 시절의 사람들과는 좀 달라요.무작정 영화 보고 울어보라고 하면 너 미쳤니 하는 눈초리로 쳐다볼 겁니다.똑같은 영화적인 눈물도 앞과 뒤가 좀 맞고 자신들의 현대적인 심성과 부합해야 스스로의 눈물에 의미를 부여하구요,그냥 무조건적인 눈물에 대해선 약간의 혐오감도 가져요.아마 할머니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성이라고 일컬어지던 '한의 정서'나 이런 것들이 이제는 사라져가나 봅니다.사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사회가 많이 달라져버렸거든요.한은 이제 분노와 체념이라는 양갈래의 길로 나눠지는 느낌입니다.(정확하지는 않지만요)
꼭 그런 복잡한 얘길 하려는 건 아니구요.하여간 요새 관객들은 '그냥' 눈물은 좀 싫어한다 이거죠.이 영화 <애자>가 그 '그냥'에서 벗어나기 위해 쓰는 방법들이 좀 있습니다.우선 이 두 모녀의 캐릭터를 극대화하는 방법으 쓰죠.강한 엄마와 약간은 또라이스러운 딸,남아선호에 물든 억척엄마와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천재스러운 딸의 대조를 끊임없이 시도해서,그 상황과 배우들의 개인기를 통해서 돌파하는 겁니다.노련한 연기자 김영애와 점점 빛나는 최강희가 이 역할을 무난히 수행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간적 배경을 경상도로 잡습니다.영남 지방 특유의 억세고 무뚝뚝한 사투리,겉으로는 잘 표현하지 않으려는 그들 특유의 애정성향을 영화 내내 끌고 가면서,울어야 할 때 울지 않고,울어야 할 때 오히려 화를 내고 서로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붓다가도 결국은 화해의 바다에 도달하는 그 정적인 과정들을 이 영화는 무난하게 풀어놓습니다.그래서 이 영화가 성취한 눈물은 적어도 '그냥','무조건적인' 눈물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눈물의 파도 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 결말 -엄마의 자살,그것도 동물병원의 원장인 그 엄마가 자기 병원의 개들을 안락사시키는 약물에 의한 자살-의 의외성이 도외시됩니다.자살과 안락사,그리고 그런 엄마를 눈물로 모른 체 하는 딸의 자살방조 역시 그냥 지나칩니다.그런 쉽지 않은 윤리적 선택이 과연 사랑과 눈물 만으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인 것일까요? 글쎄요.,저 영화의 용기있는 모녀라면 그럴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저 같이 마음약한 사람들은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저라면 어떻게든 그 주사기를 엄마에게서 빼앗았을 것 같아요.전 죽음을 그렇게 감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제게 아직도 죽음은 싸워서 이겨내야 할 어떤 것이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 역시 세상에는 존재합니다.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주인공 소녀가 바로 그런 친구입니다.
마이 씨스터즈 키퍼
저 영화에 나오는 엄마에겐 두 딸이 있습니다.아랫쪽에 보이는 딸은 백혈병을 앓고 있는데,저 가족은 저 딸의 상황 때문에 보통의 가족들이 누리는 가족적인 행복은 다 포기한 사람들이죠.아픈 딸의 안위에 가족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까요.유능한 변호사였던 엄마는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아빠는 그런 엄마와의 남녀간의 사랑을 포기하죠.오빠는 부모의 상대적인 무관심 때문에 난독증 증세를 앓고 있는 것 같구요.저 가족의 이모 역시 조카를 위해서 스스로의 미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둘재 딸은 첫째 딸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만들어낸 '맞춤형 아기'입니다.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상하시죠?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저 언니의 골수가 망가지면 동생의 골수를 이식하는 거고,언니의 신장이 망가지면 동생의 골수를 이식하는 겁니다.그리고 동생은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낳은 아기인 거구요.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하실런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과학은 그러한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고 있습니다.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때에도 유명한 유사과학자 한 사람을 위시한 몇 무리의 사람들이 그런 가능성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다가 개망신을 당한 적도 있구요.
영화는 동생이 더 이상은 그렇게 못하겠다고 자신의 신체적 결정권에 대해 부모에게 소송을 걸면서 시작하지요.조금은 이색적이고 조금은 황당한 시작이지만,다른 쪽에서 생각해 보면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내포된 시작이기도 합니다.부모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겠지만,당하는 둘째 딸 입장에선 끔찍한 과정들을 겪어내야 하는 선택이기도 하니까요.게다가 딸 입장에선 자신의 소망과는 관계없는 인생여정을 살아야 하는 거구요.
영화는 그 가족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교대로 들려주면서,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플래시백을 꽤 자주 시도합니다.죽음을 앞둔 언니는 그 동안 살아왔던 인생을 계속 돌이켜보아요.게다가 영화에 나오는 다른 주변적 인물들 역시 거의 예외없이 고통스런 삶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어요.동생이 소송대리인으로 선택한 변호사 역시 간질이란 지병을 앓고 있구요.소송을 담당한 판사는 얼마 전 딸을 잃었습니다.영화는 이렇게 지속적인 고통들을 보여주지만,전체적인 기조가 의외로 섬세하고 안정적이어서,관객들은 무리없이 영화를 지켜봅니다.
무작정 고통만을 강조하는 건 아니구요.가족간의 애틋한 사랑들도 잊지 않습니다.한 사람을 잃기 직전의 상황인데 어쩌면 매우 극단적인 사랑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이 영화는 바로 그 사랑과 눈물 만으로 마무리 짓습니다.백혈병을 앓고 있는 언니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고,그 방법이 바로 동생을 이용한 소송이었다는 식으로 반전 포인트를 잡는 통에 정말 윤리적인 문제- 그 맞춤형 아기의 문제-는 그냥 영화 밑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이렇게 전혀 가볍지 않은 문제를 그냥 소재적으로 이용하는 자세는 사실 좀 문제가 있습니다.원작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저로서는 더 그렇게 느끼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거의 눈물에 관한 한 마스터 급이셨던 할머니,눈물과 가족간의 사랑은 모든 양심과 윤리의 문제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가치인 겁니까?
엄마로 나오는 저 매력적인 여배우 카메론 디아즈의 저 아름다운 미소가 문득 소름끼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저 가족의 진정한 불행들이 변질되어지는 것은 또 아닙니다.고통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나무없는 산
바로 그 사실,우리 주변에 사람들의 고통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매우 담담하게 마치 수채화를 그려내듯 조용하게 얘기해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김소영이라는 미국에 사는 감독이 만든 영화 <나무없는 산>입니다.
이 영화는 올해 제가 보았던 가장 좋은 영화 중 하나인데요.사실 할머니께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좀 걱정스런 일이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이 영화가 아이들의 불행과 고통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지요.
할머니는 언제나 아이들의 불행에 너무 민감하셨어요.학교에 들어가기 전 제게 동화책을 읽어주시다가도 할머니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는데,그 책들은 대개 아이들에 관한 내용이었어요.<백조왕자>나 <엄마 찾아 삼만리>나 이런 동화들.옛날의 어린이 동화들은 참 잔인하기도 했어요.어떻게 그렇게 아이들의 불행을 강조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 <나무없는 산>에 나오는 저 두 자매도 거의 재난에 가까운 일들을 겪게 됩니다.채무에 시달리던 아빠는 가족을 버려둔 채 실종상태이고,근근이 생활을 이어 가던 엄마는 결국 아이들을 경상도 흥해에 사는 고모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립니다.그런데 이 고모가 또 문제적 고모입니다.알콜 중독자인데다가 거칠고 조카들에 대한 애정도 없어요.마지 못해 아이들을 떠맡은 거지요.애들을 학교나 유치원에 보내는 것 같지도 않아요.
아이들은 엄마의 약속-돼지저금통에 동전을 꽉 채우면 다시 돌아오겠다-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아요.메뚜기를 구워 팔아 동전을 채워가고 있거든요.
그러나 전화마저 끊긴 엄마가 돌아올리 만무합니다.아이들은 입었던 옷을 갈아입을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돈을 모으기만 합니다.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 아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또한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관객들은 그들의 가슴에 고통을 받습니다. 가슴이 아파 오죠.무망한 싸움과 허망한 노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아이들의 상황은 흡사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 땅에 심어진 나무와 같습니다.절대로 자랄 수 없는 나무요.영화에서는 실제로 아이들이 엄마가 돌아올 버스정류장이 보이는 황무지 언덕에 나무 막대기를 꽂아놓고 있습니다.나무가 자라면 엄마가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요.
결국 아이들은 고모네 집에서도 떠나게 됩니다.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상황이 되지 않는 고모가 아이들의 외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거죠.외할아버지 역시 아이들의 부양 책임을 거부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그래도 아이들은 그곳에 가게 됩니다.외갓집은 <워낭소리>에 나오는 노인들이 사는 그런 마을입니다.아이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가게 되지만,그래도 그곳이 도시 보단 좀 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슬프고 눈물나는 이야기들을 이 영화의 감독은 의외로 담담하게 풀어나갑니다.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만한 어떤 테크닉도 사용하지 않습니다.슬픈 음악도 없고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아이들은 가끔씩 아무 생각 없이 동네를 뛰놀고,그 모습은 보통 아이들이 노는 모습처럼 심상합니다.그러나 그 모습은 참 슬픕니다.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이거든요.아이들의 주변 사람들도 아이들을 그렇게 특별하게 대하지 않습니다.동정 따윈 없습니다.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서 아이들을 대합니다.
가끔 카메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극대화해서 클로즈업합니다.그런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다분히 관객을 겨냥한 것입니다.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의 클로즈업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죄의식을 동시에 경험합니다.그것은 슬픔과는 다릅니다.눈물이 나오지도 않습니다.우리는 그저 심한 무력함을 느낍니다.아주 양심적인 사람들은 그런 클로즈업을 마주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지속되는 잔인한 감정의 흐름과 짤막한 눈물들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고 이 영화의 감독 김소영은 넌지시 우리 뒤통수 뒤에서 속삭이고 있는 거에요.
결국 자매 중 언니인 진은 깨닫습니다.그리고는 동생인 빈에게 말합니다.
- 엄만 안 와.바보야
라고요.진은 세상을 느낀 것이지요.그리고는 드디어 아주 심하게 울음을 터뜨립니다.수제비가 놓인 밥상 앞에서요.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그렇게 오래 우는 장면은 이 장면 이외에는 없습니다.그리고 그 장면 이후에,아이들은 더 이상 그렇게 길게는 울지 않지요.
어쩌면 정말로 눈물 나는 모습들,정말로 슬픈 모습들은 이런 정경들일 것입니다.눈물 조차 잘 나지 않는 상황,아이들의 진정한 슬픔을 보면서도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슬픔일 것이고,우리의 눈물은 여기에서 또다른 출구를 찾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경기도의 어느 더러운 정치가들이 이런 아이들에 대한 무상급식을 중단하려 한답니다.아마 자기네들이 먼저 추진하지 않은 정책이기 때문일 거에요.이런 자들이 존재하는 한,<나무없는 산>의 아이들의 배고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자신들이 무엇을 담보로 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 하지 않는 천하의 파렴치한 인간들이에요.할머니 혹시 천국에서 좀 높은 자리에 계시다면 이 인간들한테 뭐 벌 하나 내려주세요.화끈한 걸루다가요.
할머니,이런 아이들의 상황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영화적 눈물을 흘리게끔 만듭니다.영화적 핑게로 눈물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이 눈물들에서 우리들의 책임감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그래서 이런 눈물들은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죄송한 말이지만,이런 눈물들은 과거 할머니가 터뜨리셨던 눈물들처럼 조금은 가식적이고 조금은 위선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다만,이 눈물들의 유효기간 만큼은 문제가 되겠지요.하지만 어떤 영화인들은 자꾸만 이런 눈물들을 만들어 낼 겁니다.그래서 본질적으로 눈물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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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느라 피곤하셨죠,할머니? 사실 천국으로 상정된 지역에 상주하시는 할머니께 '눈물'을 얘기한다는 것은 좀 넌센스입니다.천국에 눈물이 있다는 것은,천국에서 눈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좀 비상식적이쟎아요? 할머니,그래서 다음에 쓰고 싶었던 '슬픔'에 대한 편지는 할머니께 부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할머니 이젠 쉬실 수 있습니다.언젠가 만나게 되면 옛날처럼 까르르 까르르 웃어주세요.사랑하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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