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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영화,두번째 키워드 <대결>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08. 12. 1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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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계속)

 

2.비전형적인,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한 대결,<영화는 영화다>

 

겉으로는 수컷 냄새 물씬한,남성과 남성의 대결처럼 보였던 영화가 바로 <영화는 영화다>라는 영화다.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한 폭력성을 감당하지 못해 같이 공연하는 배우마다 심한 폭력을 행사해서 더 이상 상대역을 찾아내지 못하는 왕싸가지 영화배우 강지섭이,과거 '초록물고기'에 단역 영화배우로 출연했었고 아직도 배우의 꿈을 아련하게 간직한 폭력조직의 행동대장 소지섭을 만나서,둘 만의 영화촬영을 감행한다는 영화가 바로 <영화는 영화다>이다.

 

영화의 제목에서 오는 느낌으로부터 오는 선입관과 더불어,영화와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강지환과 결국 자신의 현실에 의하여 파멸당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영화'를 끝까지 촬영하는 소지섭을 고려해보면,이 영화는 언뜻 영화와 현실과의 관계,더 나아가서 현실과 비현실과의 관계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대결'이라는 단어만을 놓고서 영화에 나오는 두 명의 무뢰배들을 생각해 본다면,이번엔 전혀 다른 결론이 풀려나오게 된다.

 

즉,이 두 명의 거칠고 안하무인인 남자들은,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쳐박고 서로의 코 혈관과 입술을 터뜨려대지만,이 주먹이 결코 상대방을 향한 주먹은 아니라는 것이다.둘 사이의 대결이 아무리 수위가 높아지더라도,나는 두 사람 사이 대결의 긴장도 자체가 점점 높아져간다고는 느끼지 않았었는데,그것은 기실 소지섭과 강지환은 서로를 향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자기 자신의 깊은 소망,그리고 그 비원을 방해하는 주위 세계와 대결을 벌이길 원하고 있었다.그래서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그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보다는,그들 스스로의 인간상황 자체가 영화의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무진 애를 쓰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먼저,소지섭의 내밀한 꿈은 영화 속 주연배우다.

 

그래서 그는 영화 초반 ,싸가지 한꺼풀도 없는 강지환의 무례를 조용하게 참아넘기는 것이다.영화에 주어지는 각종 함정과 미끼를 통해,그리고 무엇보다 우연을 통해 마침내 그는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말지만,이번엔 그를 둘러싼 세계가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꼭 외부세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폭력조직 내부의 암투와 폭력의 순환고리 이외에도 ,소지섭 자신의 폭력성 역시,본질적으로 '가짜로 행동'하는 것이 직업인 영화배우 노릇을 해내는 것을 방해하고 심하게 훼방놓는다.

 

여배우와의 강간 장면에서 실제의 강간을 저지르는 사건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예이다.그가 가진 본질과,그의 배우로서의 소망이 충돌을 빚어내는 단적인 상황이다.그는 언제나 한계상황 직전에 놓여 있고 종내에는 패배하여 파멸한다.

 

자신의 스타로서의 입지(심지어 극중 이름이 '수타'이다) 에 매몰되어 일상생활의 대화도 영화 속 대사에 나오는 말 이외에는 잘 할 줄 모르는 강지환이 벌이는 대결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한 싸움이다.

 

그의 삶은 부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고,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 이라는 것 자체를 전혀 모르는 그의 의사표현방법은 오로지 욕과 주먹질 뿐이다.기형적인 인간인 것이다.그가 유지하는 인간관계조차 고작 몇 사람 정도에 국한될 뿐인데,그 중 하나인 그의 매니저는 결국 그의 뒷통수를 치고,사랑하는 여인과는 어두운 강변에서 불 꺼놓고 하는 카섹스 이외에는 그 어떤 교류방법도 모르고 있다.오로지 샌드백만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다.

 

소지섭과의 폭력 뿐인 대결을 통해서 결국 그가 얻어내게 되는 것은 실제의 '자기자신'을 찾는 길이다.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위상추락과,자존심의 추락 (그는 결국 소지섭의 부하들에게 무릎꿇림을 당한 채 줄창 뺨을 얻어맞는다),그리고 스타로서의 생활양식을 버림으로 해서 가능해진다.결국 그의 주먹은 언제나 허공을 가르고 있었고,대상없는 분노는 오직 자신에게만 위해를 가할 뿐이었던 것이다.결국 그는 스타의 자리에서 걸어내려와 밝은 세계 속으로 진입한다.(영화는 이 사실을 선글라스를 벗은 수타가 그의 애인을 대낮의 커피숍 안에서 만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때쯤 두 남자 간의 대결이라는 원래의 구도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버리고,두 남자의 정체성 찾기라는 숨겨진 주제가 전면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남성과 남성의 거친 대결이라는 전형적 소재를 약간 비틀어서 이 같은 주제로 변환시킨 것은 이 영화의 가능성이자 한계이다.소지섭과 강지환이라는 스타성이 있는 두 배우를 전면에 내세워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킨 뒤 - 실제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 중에서는 이 영화가 소지섭을 위한 영화라는 반응이 들어 있었다 -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얘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재능이자 테크닉이다.

 

가령 올해 상반기 가장 각광을 받은 영화 <추격자>역시,두 남자 사이의 강력한 대결을 다루지만,이 영화는 끝까지 쟝르의 규칙에 충실하고 쟝르 자체에 녹아들며 쟝르의 문법을 유연하게 어루만질 줄 안다.이 영화는 거기에서 파생하는 에너지를 최대한도로 끌어내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데에 무리없이 성공하고 있다.흠잡을 데가 없다.그러나 나는 <영화는 영화다>쪽의 영화들을 좀 더 선호한다.이런 영화는,영화의 전형성에서 미끄러져 나와 도달하고 싶은 목표 쪽으로 기어갈 줄 알기 때문이다.그리고 사실 모든 영화는,원칙적으로 만든 자의 소유물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일 것은,김기덕이 관계한 모든 영화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거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몰이해는 이 글에서 논외로 친다는 것이다.<영화는 영화다>는 김기덕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했다)

 

3.혼란에 빠진 제임스 본드 요원.그 요원한 싸움 <퀀텀 오브 솔라스>

 

반면,전형성과 비전형성을 떠나서,누구와 대결을 벌여야하는지 조차 모르는 불행한 대결자도 있다.그 주인공은 벌써 몇십년째 수많은 적들과 대치해왔고,여지없이 그들을 깨부수고 그렇게 해서 풍요로운 서방세계를 굳건히 지켜왔던 인물 ,제임스 본드다.

 

본드는 이제 변해버렸다.그는 지금 도대체 누구와 싸워야하는지 조차 잘 모른다.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자신의 적들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적들이 모두 다 꽁꽁 숨어버렸는지 잘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이제 싸움의 상대를 찾아 전세계를 방황한다.사회주의 소련도 붕괴해버렸고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파키스탄의 산 속에 숨어버렸다.그는 때려줄 상대를 찾아 북한도 건드려보고 (007 어나더 데이),미디어 재벌도 터치해보지만 (007 네버다이 ) 그와 지속적으로 싸워줄 파트너는 어디에도 없다.그는 허망한 심정에 빠지고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에 한숨만 토한다.

 

심지어 본드의 적들 조차 변화의 수순을 밟아왔다.<퀀텀 오브 솔라스>에서의 본드의 적 마띠유 맬릭은,과거 본드 영화 같으면 악역으로 등장했을 배우가 아니다.그는 무엇보다 내가 2008년에 보았던 참으로 좋은 영화 중 하나인 <잠수종과 나비>에서 파리 엘르지의 편집장으로 등장하여 예민한 연기를 펼쳤던 사람이다.도저히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스타일의 배우가 아니다.

 

 

그래서 본드에게 남은 건 이제 자기 자신 밖에 없다.그 점을 깨닫게 된 탓인지 그는 심하게 자학하기 시작한다.사랑했던 여자는 배신을 했고,직장상사 쥬디 덴치는 50% 이상은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다.아주 여러 나라를 방랑해야 하며,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과거의 느끼하면서도 깔끔한 본드는 사라져버리고,지금의 본드는 얻어터지고 피를 흘리고 찢어진 옷을 걸치고 있다.

 

대결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만인이 그의 적이어서,그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이제 본드는 수면제를 먹는다),약간의 알콜중독 성향까지 가지고 있다.

 

본드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심하게 흔들거리고,점쟎은 결투보다는 (과거의 본드들은 상대방과 펜싱시합을 하기도 했다) 좁은 공간에서의 숨가쁜 격투장면들이 선호된다.본드는 더 이상 젠틀한 스파이가 아닌 것이다.그는 오히려 상대를 잃어버린 거대강자인 현재의 독점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듯도 한데,따라서 본드의 방황을 보고 있노라면 현재의 금융위기로 비틀거리는 현자본주의를 은유하는 것도 같아 이색적인 느낌을 받게 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제임스 본드가 선도한 경향이 아니다.이 경향의 뒷배경엔,그리고 전위엔 바로 <제이슨 본 시리즈>가 있다. 21세기의 유형을 선도한 스파이는 바로 제이슨 본이었다.그러나 대결할 상대방을 찾아 온 유럽을 헤매는 두 사람의 차이는 두 사람의 나이와 역사성에 있다.다시 말해 이력서상의 차이다.무엇보다 ,본드는 ,변해버린 것이다.그는 지금 정체모를 대결자를 찾아 공허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드 영화 자체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은 아니다.본질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영화인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눈요기 시리즈이기도 하다.찰리 채플린의 1918년작 무성영화 에서 조차 등장하던 카 레이스 장면은 90년이 지난 2008년의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본드 걸들의 자태 역시 그렇게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이번에 나온 본드 걸 올가 쿠릴렌코의 워킹은 그녀가 <맥스 페인>에서 보여주는 워킹과 99% 똑같다)

 

그저 상대가 없는 본드만 힘들 뿐이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는 앞으로도 대결자들을 찾아 헤맬 전망이다.물론 몇몇 금기시되는 세력들에게는 대들지조차 못하겠지만..

 

4.2008년의 대결

 

2008년 우리 사회는 숱한 대결들을 목격했고,이어지는 2009년에는 아마 더 할 것이다.이명박이라는 목소리가 약간 이상한 사나이를 전면에 내건 기득권 팀은,예전부터 보아와 너무도 익숙한 클리셰들을 사용해서 전투를 진행한다.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형사 백성찬이, 범죄자들을 짓밟아버릴 벌레 같은 대상으로 보듯,그들은 그들에게 항의하는 시민들을 검찰에 소환한다.

 

별로 새롭지도 않은 방법으로 말이다.마치 과거 제임스 본드가 적들을 확실하게 제압하던 방법처럼 능글맞고 느끼하게 말이다.(그래도 정작 그때는 매 시리즈마다 여남은개의 신무기라도 소개되곤 했지만 우리나라의 제임스 본드의 무기는 구식 그대로다.레고산성과 물대포,언론탄압이라니 말이다.) 그들은 지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찍고 있는 중이다.

 

진짜 본드는 이제 상대방을 찾아 전세계를 유랑하지만,우리나라 본드의 눈에 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들의 바로 근처에 살고 있는 소외되고 힘없는 이웃들인 모양이다.

 

한편 시민들이 찍고 있는 영화는 아무래도 <영화는 영화다>일 것이다.그러나 영화 속 캐릭터들처럼,그들의 주먹이 더 이상 허공만을 갈라서는 안된다.외롭고 힘든 싸움일 뿐이다.오히려 그 영화 속 스타 강지환처럼 자신의 아이덴티티부터 찾으려 분투해야 한다.'돈'이라는 '스타성'과 '지위'나 '경쟁'이라는 허상에 더 이상 마약에 탐닉하듯 몰려들어서는 안된다.왜 저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한 7명의 선생님들에게 그렇게도 커다란 강수를 두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생각보다 큰 문제라고 본 탓이다.가치관의 싸움에서 지기 시작하면,완벽한 패배를 목전에 두기 마련인 것이다.

 

영화 속 강수타가 그러했듯,이제 우리나라 시민들은 일종의 위상추락,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연합을 경험해야 한다.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히 우리의 시민들은 벌이는 대결 마다 상처를 입고 말,<영화는 영화다>속 두 남자의 경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간절한 소망을 품은 채,그 대리 소망을 대중매체나 인터넷 위에서나 찾으면서 말이다.진정한 추락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인 것이다.

 

소지섭처럼 간지만 나면 뭘 하겠는가?

실제의 모습은 따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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