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의 캐릭터들 사이에는 분명한 대결이 존재한다.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총격전이든,숨겨진 진실을 캐내기 위한 두뇌 게임이든,돈이나 정의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진 애를 다 쓰는 인생의 한 순간이든,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자연 혹은 기계 사이의 대결은 관객의 눈길을 스크린 위에 고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며,영화라는 예술 쟝르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심지어 영화는 자신의 인물들을 영화 속에 홀로 세워놓고도 대결을 창조해내는데,그런 대결에서는,인물들이 스크린 바깥의 관객과 대결을 벌이거나 아님 주인공 스스로의 내면과 혈투를 벌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칼 테오드르 드라이어의 <쟌 다르크>에서의 성처녀 쟌 다르크는, 거칠고 위협적인 종교재판관들의 심문을 상대해야 하면서도,스스로의 종교적 구원관을 지켜내기 위한 종교적 가치에도 전념해야 한다.또한 현실적으로는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의 강간 위협에 시달리면서,종국적으로는 그녀를 구원할 신의 은혜를 기다린다.
드라이어 감독의 극단적인 얼굴 클로즈 업에 의하여 매순간 스크린 전면 위에 표현되는 이와 같은 고뇌와 갈등은,그녀가 펼치는 대결방향이,영화 속 상대자들을 뛰어넘어서 스크린 바깥의 관객들,그리고 심지어 자기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이런 숨가쁜 대결의 향방들은 영화의 긴장을 뛰어 넘어 영화라는 예술이 가지는 주요한 특색이자 기능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벌어져온 그 수많은 대결들 중에서 가장 내 기억에 남는 대결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77년 장편영화 데뷰작 <결투자들 (the duellists)>속에서 벌어지는 두 남자의 15년간의 싸움이다.아무런 이권도 대의명분도 없이,그저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에 불타오르는 상습적 결투자 Harvey keitel과,불운하게 그의 결투대상으로 찍혀 15년간을 그와 싸움을 벌이게 되는 키스 캐러딘의 긴 이야기를 이 영화는 다루고 있다.
도망가면 쫓아가고 쫓아오면 또 물리치는 두 남자 사이의 이야기는,처음엔 싸움에만 골몰하던 두 남자 내면의 격정을 그리는 것 같지만,나중에는 그 대결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반적 대결로 승화시켜가고,마지막에는 그 모든 인간사의 허망함을 드러내게 하며 끝이 난다.
격동의 나폴레옹 시대를 완벽한 고증과 더불어 재현해내는 리들리 스콧의 연출력과 ,자연 그대로의 색조를 유지하면서도 바로 그 자연광 자체를 이용하여 변화무쌍하게 화면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카메라 워크는 그림 같은 영화 속 풍광과 더불어 ,영화 속 대결의 비장함에 아름다움을 더 한다.특히 최후의 결투 이후에 두 사람의 표정 위에 서린 고독감과 무망함은 인간의 끊임없는 편집증과 아집에 최종적인 종지부를 찍는다.
리들리 스콧은 떡잎부터 위대했던 것이다.두 시간의 긴장 이후에 이토록이나 흐린 결말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은 영화 예술의 기본이 감정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에 그 기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그는 결국 이 영화 <결투자들>을 만든 5년 뒤 <블레이드 러너>를 연출한다.
2008년에 내가 본 영화들 속에서도 수많은 대결들이 존재했다.물론 현실의 대결들이 워낙 첨예하게 대치했던 터라,영화 속 대결들이 오히려 몸을 움츠러뜨리고 왜소해져버린 감 마저 없지 않다.촛불집회의 한가운데에 명박산성을 쌓아올려서 국민과의 대결을 감행한 기득권 계층의 사람들과,그 산성에 맨몸으로 부딪쳐보는 시민들 사이의 대결 만큼 긴박했던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언제나 요동치는 대결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영화 속 대결이라는 것은 오히려 휴식이나 미학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그래서 한국의 관객들은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주걸륜이 펼치는 피아노 배틀의 이색적인 특성에 감동했고,<적벽대전>의 두 배우 금성무와 양조위가 중국의 오래된 악기들을 동원해서 두 사람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의 파동들을 표현한 장면에 두 눈을 모았던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대결들이 워낙 답답하고 비상구 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오히려 이런 미학적인 대결들이 두드러져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2008년 내가 본 영화들의 대표적 대결들은 이렇게 섬세하고 갸날픈 대결이 아니었다.굵은 선을 가진 남성 마초들의 충돌이었다.그리고 그 중 몇몇을 2008년의 대결로 선정한다.
1.전형적인,너무나 전형적인 대결.<눈에는 눈,이에는 이>
영화의 대결들 중 가장 많이 반복되어지고 가장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대결은 범죄자나 범죄 세력과 그를 막으려 하는 사람 혹은 사람들 간의 대결이다.형사로 대변되어지는 공권력과 범죄자,사립탐정과 마피아,보안관과 서부의 무법자들 사이의 대결,..모두 다 이런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범죄자들을 추려내어 때려잡는 일을,'벌레잡기'정도에 비유하는 적당히 능력있고 적당히 부패한 형사 한석규와,어떤 영화에 출연해도 하여간에 비쥬얼 만큼은 제대로 보여주는 차승원이 보여주는 MBA출신의 두뇌파 범죄자 간의 대결 역시 계속 변주되어오는 이런 전형적인 대결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자칫하면 진부함 만을 자아낼 수 있는 이런 전형성 속에 놓인 영화가 자신만의 영화적 자존심을 획득하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다.첫째는 플롯의 정교함이다.사건의 앞뒤 맥락을 치밀하게 구성해서 영화 속 사건의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그러려면 무엇보다 합리적이어야 한다.용의자 한 명을 설정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개연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그런 인물들이 모여서 결성된 범죄조직을 검거하려고 한다면 퍼즐의 조각들을 제대로 꿰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 개의 클리셰들에 코웃음을 치기 시작하는 관객들의 집중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액션의 화려함이나 과격한 스턴트만 가지고서 문제를 다 풀 수 있다고 말하기는 매우 매우 어려운 것이다.이 영화 <눈눈이이>는,영화의 설정이 아주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설정의 세부를 움직이는 개개의 퍼즐에 몇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마치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 놀이용 큐브처럼,손목 관절에 통증을 야기한다.이런 사소한 결함들이 쌓이고 쌓여 관객의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범인들의 정체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공항의 CC TV다.영화내내 신출귀몰하기 이를 데 없는 범인들의 그간 이력치고는 좀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실수라 할 수 있겠다.대사의 전달을 거의 방해하기까지 하는 음향과 더불어,이런 미진한 디테일들의 파노라마는 관객들의 심장박동을 마구 불규칙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런 퍼즐들의 오류는 ,오히려 영화 속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면을 장점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즉 캐릭터 간의 대결구도를 오히려 두드러지게 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말이다.
<눈눈이이>가 약간의 참고를 했음이 분명한 마이클 만의 1995년 영화 <히트>는 플롯의 기계적 정교함을 약간 누그러뜨리는 대신에,영화의 주체적 대결자 두 사람의 캐릭터를 극대화시키는 영화적 선택을 감행하는데,바로 이것이 이 영화에게 탁월한 아우라를 부여한다.
대담한 판단력과 냉혹한 폭력을 주무기로 하는 범죄자이지만 연인에 대한 사랑과 동료에 대한 애정 때문에 결국은 패배하여 죽고 마는 로버트 드 니로와,
유능하고 과감한 형사반장이지만,일상의 고독과 우울에 가득 차 있는 알 파치노의 대결은,혹시나 영화 자체의 플롯이 아무리 허접했었다 할지라도 빛나고 또 빛났었다.(그리고 이 영화는 그렇게 빈 공간이 많은 영화가 아니다)
<눈눈이이>역시 이런 종류의 충돌을 시도했어야 옳았다.차승원은 너무 배후에서만 머무르며 이죽거린다.곤란하다.한석규 역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상대를 향해 초장부터 돌진했어야 맞다.
<히트>의 두 캐릭터는 이렇게 만나서 밥을 먹기까지 한다...
물론 이런 아쉬움이 두 배우들의 탓인 것은 아니다.두 사람은 최선을 다 한다.그러나 이 영화는 너무나 많은,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클리셰들로 휘감겨 있다.감옥,죄수들의 규합,제3자인 절대악당(클리셰들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송영창의 악역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것이다),현금수송차의 강탈( <히트>를 도무지 안 떠올릴 수가 없다) ,사표내기 직전의 건들거리는 형사,게다가 범인들의 부모와 가족들..뭐,한두가지가 아니다..
문제는 이 익숙함이,정교하지 못한 플롯을 두 캐릭터간의 대결로 영화적 포커스를 전환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알려졌고,어느 정도의 배우적 성격과 연기력까지 확보한 두 남자배우를 이 정도로 밖에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일종의 낭비다.전형성은,역시 전형성으로 승부해야 옳은 것이다..
(다시,쉬는 시간...)
2008년 영화 세번째 키워드 <타임 스와핑> PART1 (0) | 2008.12.24 |
---|---|
2008년 영화,두번째 키워드 <대결> (0) | 2008.12.19 |
2008년 영화 키워드 1 <아이> PART2 (0) | 2008.12.16 |
2008년 영화 키워드 1. <아이> PART1 (0) | 2008.12.16 |
2008년 부산국제 영화제.<그들 각자의 영화관> (0) | 2008.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