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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영화 키워드 1 <아이> PART2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08. 12. 1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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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1에서 계속..

 

우선 주성치의 <장강 7호>에서 주성치의 아들로 나오는 서교.

나는 이 꼬마가,주성치 특유의 기괴한 엽기성을 자양분삼아 오히려 현실적 존재감과 영화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어느 정도 획득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본다.

 

생각해보라. 극빈층의 아이이면서도 비싼 사립학교를 다니는 아이,다 헤어진 신발을 신고 다닌다고 동급생 뿐만 아니라 담임선생님에게까지 업신여김을 당하는 아이,그렇다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운동이나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닌 아이.한마디로 그 학교의 왕따.(이거 사실 한국적인 주제다.)

 

 

 

이런 아이가 꿈꿀 수 있는 팬터지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외계에서 날아온 초능력을 가진 애완동물 .바로 그것 아닌가.힘과 귀여움과 공부능력을 동시에 갖추고,게다가 보니 엠의 '서니'에 맞춰 춤을 출 수도 있고,무엇보다 왕따 신세인 자신의 친구가 되어 주며,결국은 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빠를 살려내기까지 하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영웅.이것이 팬터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팬터지이겠는가?

 

주성치는 자신의 장기인 엽기적 황당함의 강도를 엷게 조정하는 대신에,이런 종류의 현실감을 대신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갑자기 바른생활 사나이스럽게 배신해버린 그의 모습이 또 역시 엽기적이지만,스필버그가 되고 싶어하는 그의 내밀한 욕망에 우리는 심하게 간섭할 수 없다.채플린 쪽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이 훨씬 좋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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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아이가 있다.우리 아이들의 입장에서는,그 팬터지가 지나쳐 거의 비현실적인 존재로 보일 올해의 영화 아이는 아마 <님스 아일랜드>의 주인공 소녀 '님'일 것이다.

 

학원들을 순례하다가 밤 열 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나라 소녀들이 볼 때,님은 거의 외계인에 가깝다고 해야 무방할 것이다.학교도 시험도 없고,잔소리와 압박도 없고,성추행범과 교통사고도 없는 천혜의 섬에서,읽고 싶은 책을 읽고 거북이와 도마뱀을 친구로 가지고 있으며 바다를 뒷마당 삼아 고래의 꿈을 꾸는 님이 사는 '님스 아일랜드'는,우리 아이들에게 있어서 공휴일이나 방학 때가 되어야 그것도 상당량의 돈을 주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꿈과 희망의 에버랜드일 것이다.(그러나 그 에버랜드 역시 실은 삼성가의 재산승계와 무진장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차라리 님의 상황은 우리 소녀들에게는 무섭고 불안한 상황일런지도 모른다.영화 속 두 시간 정도는 그렇다 치겠지만,님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 볼 용기를 가진 소녀들은 10년 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님스 아일랜드>의 흥행부진은 이미 예약된 사회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모두 다 아이들의 영화는 아닐 것이다.어른들이 거의 완전히 배제된 채,아이들 만으로 영화를 이끌었던 영화 <렛미인>역시 '아이 영화'라고 하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오히려 전형적인 뱀파이어 영화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인데,그렇게 이 영화는 뱀파이어 영화의 쟝르적 특성들에 교과서적으로 충실하다.

 

흡혈과 살인,사지절단과 공포,피흐르는 입가와 날카로운 덧니들,또 영원한 타자로서의 뱀파이어,그럼에도 벌어지는 정상인과의 사랑,또 뱀파이어와 사람들 사이에 그어진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는 룰,아무래도 이 영화는 분명한 뱀파이어 영화다.

 

거기에 주인공 오스카르가 겪는 왕따의 문제.(또 한 번의 왕따) 싱글 맘의 문제,그의 아버지가 가진 동성애 코드,무엇보다 스웨덴 특유의 향기와 눈밭이 주는 소외되고 고독한 동떨어진 이미지.

 

또한 여주인공 이엘리의 숙명적인 무표정함,그녀의 예전 동반자의 이엘리에 대한 기괴한 사랑들이 어울려져 고딕 분위기가 아닌 로컬 분위기의 뱀파이어 영화를 창조해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쟝르적 특성은 주인공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더욱 더 인상적으로 각인된다.어른 뱀파이어와 어른 인간의 사랑은 오히려 뱀파이어 영화의 규칙 -'그들'과 '우리'라는 분명한 경계선- 을 항상 위협하고,바로 그 금기를 깨뜨리는 것에,또 그런 규범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에 영화적 포커스를 맞추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드러내지만,아이 뱀파이어와 아이 인간의 사랑은,뱀파이어 영화의 규칙에 너무나 충실하기 때문에 그들의 숙명과 비극성에 한층 깊이를 더 한다.

 

어른들 사이였더라면,주인공 오스카르가 이엘리에게 '너 정말 뱀파이어가 맞느냐'고 물어보는 장면의 순수한 의문은 아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또 그 씬 이후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으로만 대화하는 장면 역시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을 것이다.이 아역 배우들의 대단한 연기력은 이 뱀파이어 영화에 고전적인 비극미를 부여하고,종종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내러티브 상의 결점 - 영화는 너무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느라,그들을 둘러싼 주위 어른들의 반응과 세계관을 등한시하기가 일쑤이다 - 을 넉넉하게 상쇄한다.

 

나는 장차 오스카르가 국립혈액원 같은 곳에 취직해서,살인사건을 저지르지 않고도 이엘리의 양식을 공급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바램을 가졌었는데,그것은 이 영화가 2008년에 내가 본 '참으로 좋은 영화'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한편,실수로 아이를 임신하고 만 16세 소녀 '주노'를 '아이'의 카테고리 안으로 밀어넣을 수 있을까? 이 깜찍하면서도 발랄하고 엉뚱하면서도 솔직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를 '아이'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려는 것은,이 소녀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맞이했으면서도 속물적인 계산에 연연하지 않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위 사람들에게 맑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엘렌 페이지의 탁월한 연기와 더불어 (아마 그녀는 샐리 필드의 길을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우리나라 여배우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고 말이다) 이 영화를 수놓는 다른 연기진들의 앙상블과 간간이 등장하는 애니매이션,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음악의 힘은,영화의 맑음을 해피엔딩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것은 디아블로 코디의 각본과 제이슨 라이트만의 연출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이들의 비결은 에둘러 돌아가지 않기,각 세대들 자체로 곧바로 짓쳐 들어가기,그래서 나오는 결론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거기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해결점을 포장 없이,다른 말로 말하면 근엄한 윤리적 해석이나 사회학적 분석 없이 받아들이기 따위의 단어들로 얘기될 수 있겠다.

 

이렇게 이 영화는 미국의 어느 좁은 사회,어느 계층의 상황을 잔잔하고 유머러스하게 조명함으로써,전체 계층의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진단해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만 16세 소녀의 임신이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우연적인 사건을 이렇게까지 만들어낸 것은 일종의 '젊음의 힘'인 것이다..

 

반면,16세 쯤의 소년소녀들을 다룬 우리나라 영화가 있었다.

<고사,피의 중간고사>

2008년 여름,거의 '유일한' 우리나라 호러영화였다.하긴 현실이 '호러'이니 굳이 영화까지 만들어서 공포의 대열에 또 하나의 명단으로 가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이 영화는 시작부터 '호러'다.

 

불타는 책상들과 피흘리는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오프닝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아,마치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은유하려는 듯한 의욕으로 영화는 시작하지만,영화의 긴장은 딱 거기까지다.학교라는 단골공포공간과 시험과 경쟁이라는 그 '학교' -특히 우리나라 학교- 들의 강력한 압박무기,영화의 시작 즈음부터 줄창 제시되는 생리혈을 비롯한 숱한 피의 알레고리들은,정체모를 가해자와 무죄한 듯 보이는 피해자의 cat and mouse game 의 구조가 너무나도 허술하기 때문에,그저 핏빛 상징물들의 지속적인 나열들로 끝이 난다.

 

공포의 기본은 무의미함이 아니라,의미 뒷편의 숨겨진 진실이다.세상의 겉면을 장식한 합리적 세계 뒤에 숨겨진 무질서 (random)  하고 치명적인 폭력들이다.이런 세상들을 표현하여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관객들을 제대로 설득해내기 위해서,미리 제시된 기본 설정 자체가 그만큼 합리적이어야 한다.말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이다.

 

이 점에서 이 영화 <고사>는 그 기본이 심하게 어그러져 있다.나무로 치면 고사되어 있다.즉 도심의 외국어 고등학교에 일단의 사람들이 '완벽하게' 감금된다는 설정,이 설정 자체가 심하게 우습다.도대체 갇힌 사람들의 가족들은 무얼 하고 있으며,갇힌 사람들 역시 탈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도 조차 별로 해 보지 않은 채,미로에 감금된 실험용 흰쥐들처럼 우왕좌왕하기만 한다.무슨 환자들도 아닌 데 말이다.

 

이런 설정 자체의 허망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수인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들 만이라도 극적이거나 허를 찔러야 할 터인데,그냥 왔다갔다 하는 현학만이 남발되고 있을 뿐이다.결국 남는 것은 피 뿐이다.피의 시리즈 만이 공허한 스크린 위에서,영화에서 학생과 선생들에게 제시된 문자와 문제와 더불어 모자이크 같은 무늬를 그린다.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관객들 사이에서 비교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공간이 '학교'였다는 것,개성있는 배우들을 기용했다는 것,그리고 희생자가 '아이들'이라는 것,바로 그것이었다.그렇게 2008년의 유일한 우리나라 호러 영화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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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영화 사상 최고의 아이는 찰리 채플린의 1921년 영화 <키드>에 키드로 나온 재키 쿠건이다.

 

최악의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버려진 아이,떠돌이 찰리와 함게 사기와 절도로 세월을 버텨나가는 그 아이 재키 쿠건의 눈동자 속엔 영화가 만들어진 1920년대,바로 그 시기가 있다.가난과 홈리스 생활 속에서도 사랑과 인간적 소중함을 잃지 않으려는 아이의 눈물 속엔,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당대 사람들의 인간적 희망이 담겨 있었다.그것을  채플린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멜로 드라마에 비벼 넣어 관객의 심금을 자극했던 것이다.이렇게 걸작 영화 속의 모든 캐릭터들은 그 캐릭터가 태어난 시대를 상징하고 표현해낸다.그래서 역으로 시간이 흘러도 그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불멸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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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내가 본 영화 속 아이들 중엔,불멸성은 커녕 '우리'아이들 조차 없었다.

이것은 영화인들이 우리 아이들을 외면한 결과인가,아니면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아이'라는 일군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인가,..그것도 아니면 ,내가 어른의 입장에서 변해버린 아이들의 위상과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속 어딘가의 아이라는 고정관념 만을 찾고 있는 것인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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