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역사는 때로 그 사회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반영한다.어느 한 때의 시기에 인기 있었던 종목과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선수는 어찌 보면 그들이 존재했던 시대의 요구와 생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가령 70년대의 수영 스타 조오련이 21세기에 나타났더라면,현재의 박태환이 얻고 있는 만큼의 스포트 라이트는 도저히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미디어의 발달상황과 두 사람이 거둔 성적의 차이도 있겠지만,우선 조오련이 가진 외모와 그의 출신배경으로서는 21세기의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시대의 변화,시대의 탓인 것이다.
또한 과거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어떤 종목들 역시,지금은 완전한 사양길 위에 서 있거나,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져 보따리 흥행에 만족하고 있는 상태로 전락해버리기도 한다.예를 들어 씨름이 그렇다.한 때 모든 체급의 시합들이 하루 종일 방송을 통해 실황중계되던 씨름은 (정확히 말하자면 민속씨름은),지금은 군 단위의 체육관들을 전전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변화는 그런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70년대의 대표적인 해외축구는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가 아니라,독일의 분데스리가였다.지금의 스포츠 채널들이 EPL을 중계하듯 당시의 문화방송은 매주 한 번 씩 심야에 분데스리가의 경기를 편성해 방송해 주었었다.텔레비젼 화면에 보여지는 그들의 잘 정리된 그라운드는 환상적으로 펼쳐진 녹색의 카펫 같았으며,그 위를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푸른 눈의 금발 청년들은 잘 조련된 글레디에이터들 처럼 보였었다.거기에 언제나 오버랩되는 것은 비만 오면 진흙탕처럼 변해버리는 우리나라의 '효창구장'이었으며,뻥축구와 악바리 태클이었다.거기서 느껴지는 거리감과 절망감은 의외로 상당한 것이었다.
이 모든 괴리감들을 약간이나마 상쇄시켜주는 사람들은,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점쟎은 두 신사들이었다.당시 그 프로그램의 캐스터였던 이철원과, 해설자 주형광의 중계 솜씨는 신문선이나 송재익 따위의 닭살스런 변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그들은 무엇보다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격조를 갖추고 있었다.그들의 지적은 부드러웠지만 예리했고,그들이 선수들에게 보내는 찬사는 과도하지 않은 섬세함 그 자체였다.
덴마크 (아님 스웨덴) 출신의 키 작은 스타 시몬센이나 하인즈 루메니게의 장면들은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이 난다.(물론 이 분데스리가 중계방송이 국민들로 하여금 당시의 한국축구수준을 폄하하게 만든 결정적 주범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이 영국이나 스페인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로 진출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세월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의하여 영락과 부침을 거듭했던 또 하나의 스포츠가 바로 권투이다.권투가 전성기를 누렸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그 본질이야 어찌 되었든 우리 사회가 고도의 성장을 지향하는 시기였으며 지방 인구의 수도권 유입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다.가진 것 하나 없는 많은 시골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대도시로 흘러들어 도시의 서민층을 형성했고,지방의 인재들은 서울의 대학으로 쏟아져 들어와 수도인 서울에 '지상의 방 한 칸'을 얻기 위하여 온갖 신산을 마다하지 않았다.당연한 얘기겠지만 서울 출신의 기층 서민들의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았고 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맨주먹이었으며 그들이 서 있는 약육강식의 링은,복서들이 적을 주시하며 서 있는 그 사각의 링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공간이었다.서울특별시 자체가 바로 정글이었던 것이다.
복서들은 대부분 가방끈이 짧았다.그렇지 않았음 굳이 맨몸을 부대껴가며 서로의 안면에 정권을 날려야 하는,그렇게 해서 피가 터지고 살이 찢겨나가는 그런 참혹한 스포츠를 인생의 탈출구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그들은 자신의 체급에 체중을 맞추기 위해 체중감량이라는 기본적인,그러나 극한의 고통을 필요로 하는 일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으며 (현재의 다이어트 열풍을 거기에 비교해 보라) 가장 날선 주먹들을 벼리기 위하여 새벽의 거리를 달리고 모래로 가득찬 (?) 샌드백을 두드렸으며,그리고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사각의 링에 섰던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의 사람들이 복싱을 좋아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복싱은 가장 가진 것 없는 사나이가 주인공이 되는 스포츠였으며,비싼 운동기구들을 사거나 담당코치의 환심을 사지 않고도 선수가 될 수 있는 운동종목이었으며,인간의 원초적인 공격본능을 충족시켜주는 경기종목인 때문이었다.배경이나 경력이나 명문대 출신의 학력,그리고 돈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사람들은 모두 그 점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동양타이틀전이든 세계타이틀전이든 중요한 시합이 벌어질 때마다 텔레비젼 앞에 모여 앉아 함성을 지르고 줄담배를 피워 무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것은,어쩌면 그들 스스로의 모습이었고 경량급 체중이어서 심하게 왜소한 사나이가 되었든 짧게 치켜 깎은 스포츠 머리의 근육질 사나이가 되었든,링 위의 복서들이 내지르는 주먹 한 방 한 방은,누구 하나 마음대로 원망할 수 없었던 당대의 서민들이 휘둘러대는 종주먹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엔,우리나라 선수들의 권투시합 뿐만 아니라,미국 선수들의 중요한 시합 역시 '위성생중계'되었었는데,무하마드 알리나 마이크 타이슨,슈거 레이 레너드나 그의 라이벌 토머스 헌즈,또 로베르토 듀란이나 대머리 헤글러가 등장하는 시합은 언제나 라스베가스의 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졌고 그 휘황찬란함은 링사이드에 앉아있던 정장 차림의 관객들과 더불어 ,아주 이질적인 낯설음을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게 제공해 주었었다.우리나라의 링사이드엔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던 때가 없었으며,그토록이나 화려한 조명이 갖추어지는 때도 없었던 것이다.그저 우리나라 선수의 분발을 응원하는 '으� 으�'를 연호하거나 반소매 흰 와이셔츠를 입고 한 손에 신문지를 말아 쥔 직장인 스타일의 남자가 한국에서 벌어지는 프로복싱 빅 매치 관객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 시대는 프로복싱의 시대였다.수백억원을 벌어들인 박찬호도 없었고 녹색 그린 위를 골프채를 들고 걸어가는 박세리도 없었다.자유계약선수가 되어 단칼에 수십억원을 계약하는 야구선수들도 없었다.농구장에 오빠부대가 나타난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였고,매끈하게 잘 생긴 스포츠 스타들이 나타난 것도 한참 후였다.당시엔,오직 거칠지만 수줍어하고,인터뷰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싸웠다거나 대통령 각하께 고맙다는 인사 밖에 할 줄 모르던 촌스런 사나이들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이는 승부 만큼은 언제나 솔직했다.아니 뭘 감추려 해 봤자 감출 것도 없었다.스포츠 찌라시들 역시 지금처럼 선정적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그들의 승부 몇 개를 기억한다.대부분 너무 어린 시절의 시합들이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당시의 몇몇 챔피언들을 되새겨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약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그 시합들 중엔 어쩌면 글로 써서 올리기에는 약간 엉뚱하거나 내 개인적인 가족사와 연관되어진 것도 있고,또 진정한 명승부도 있다.나는 지금부터 그 승부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상관하지 않고 무작위적인 순서로 내 기억속의 권투시합들을 늘어놓으려 한다.보충해주실 사항이 있으시면 댓글로 보충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염동균 vs 로얄 고바야시
염동균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WBC (세계복싱 평의회) 챔피언이었다.그리고 그가 세계타이틀을 따낸 날은 11월 24일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나중에 확인해보니 정말로 1976년 11월 24일이었다).그가 벌인 그 날의 타이틀전의 정확한 영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다만 일본의 로얄 고바야시가 엄청나게 느린 선수였으며,염동균은 빠른 푸트웍과 스피드를 이용하여 그의 근처를 시종일관 빙빙 돌며 그를 쉴 새 없이 괴롭혔고 결과는 염동균의 완벽한 판정승이었다.
내가 이 시합을 기억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하나는 당시에 내가 살던 대전시의 어느 동네에 아마도 실제의 염동균이 연습했을지도 모를 '염동균 체육관'이라는 이름의 체육관이 있었다는 것인데,당시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염동균의 진정한 라이벌이었던 홍수환 때문에 늘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우리 동네의 주먹인 염동균이,어쩐지 뺀질거리기만 하고 말만 앞세우기 좋아할 것 같은 홍수환 같은 선수 정도를 가볍게 때려눕히지 못하고 언제나 그에게 고전하기만 하는 때문이었다.(실제로 1977년 홍수환과 염동균은 두 차례 라이벌전을 가졌는데 한 번은 무승부였고 한 번은 홍수환의 판정승이었다)더구나 우리 동네 아이들 중 일부 배신자들이 끝끝내 홍수환의 우위를 얘기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그는 '우리'선수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날 11월 24일이 엄청나게 추웠다는 것이고,챔피언의 탄생이라는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이다.새끼들은 곧 추위를 피하기 위해 곧 따뜻한 연탄창고로 옮겨졌고 혹시 얼어죽기라도 할까봐 아버지는 석유곤로를 강아지 일가 앞에 가져다 놓으셨다.아버지와 나와 여동생은 창고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새로 태어난 어린 강아지들이 어미개의 젖을 빨아먹는 광경을 구경했었는데,염동균의 시합과 우리 개의 출산은 32년이 지난 지금,11월 24일이라는 시간적 숫자와 더불어 내 두뇌 한 켠에 분명하게 박혀 있다.이상하고도 희한한 것이 바로 기억이다.
염동균은 그 후 두 차례인가 방어전에 성공한 후,진정한 강자이던 월프레도 고메스에게 KO패하여 타이틀을 잃은 후 다시는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그 시합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남미 고메스의 홈링에서 벌어졌으며,시합 역시 염동균이 먼저 고메스를 다운시키며 승기를 잡았으나 오히려 역전 KO패했던 아쉬운 경기였었다.고메스의 다운 때,경기를 진행했던 중남미 출신의 주심이 일부러 카운트를 늦게 해서 염동균의 KO승 기회를 막아버렸다는 비분강개한 신문기사들이 줄을 이었던 불운의 시합이었다.
그러나 고메스는 그렇게 약한 선수가 아니었다.당시의 밴텀급의 영웅들,특히 Z-brothers라 불리우던 Zarate(카를로스 자라테) 와 Zamora(알폰소 자모라),그리고 그들 모두를 물리쳤던 살바도르 산체스와 더불어 월프레도 고메스는 일종의 4대 천왕을 형성하고 있었고,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밴텀급 역사상 최고의 절정기였다.그런 고메스를 상대로 염동균은 만만치 않은 경기를 펼쳤던 것이다.
얼마 전 그때의 염동균이 다시 링에 섰다.이미 50대 중반에 이른 그가 복싱의 중흥이란 대의를 위해 19세의 여성 세계챔피언과 시범경기를 벌였던 거였다.나는 우연히 그 시합을 TV로 보게 되었다.가장 신기했던 것은 염동균의 그 '자세'였다.
여전히 그는,저 윗 사진의 로얄 고바야시를 상대로 했던 그때처럼,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큰 머리가 힘들다는 듯 가끔씩 머리와 어깨를 흔들어대며 잽과 스트레이트를 뻗어대는,옛날의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우리 동네의 상징적인 주먹이었던 그가 말이다.나는 그를 보자 마자,'11월 24일'을 재생시켰고,그 재생이 이 DUellists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게 하고 명승부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들었다.삶이란 작은 디테일들의 연속인 모양이다.
![]() |
프로권투 세계 선수권 대회 프로권투 수퍼헤비급 세계 선수권 대회 개최(장충체육관) |
- -
다음 글은 홍수환과 김상현,그리고 김성준에 관한 것이다..
2012년 가을의 어떤 이미지들 1. (0) | 2012.11.15 |
---|---|
베이징의 <놈,놈,놈> (0) | 2008.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