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고 여유 없는 시간들이 정말 무서운 속도로 내 곁을 달려가고 있다.거의 양 옆으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 정도다.거의 기묘하다 싶을 정도의 삶의 스테이지에 도달한 듯 싶다.하루 24시간 중에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은 거의 30분도 채 안 된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잠이 들기 전에 그 날의 시간 상황을 다시 점검하다 보면,필요없는 혹은 무익한,또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에 시간을 낭비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필수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24시간인 모양이다.
최근의 무지막지한 피로감과 더불어,내 삶의 어떤 국면의 요소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러서 저마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말하자면 나는 '피로사회' 속에 살고 있고,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진입한 지 아주 오래 되었다는 소리일 거다.자,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나를 압박하는 이러한 종류의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삶을 코칭한다는 소위 '멘토'들은 저마다 말한다.욕심을 버리고 마음 속의 '공'을 응시하라고.음..좋다..맞는 말이다.종교인들도 덧붙인다.마음 속의 종교성을 일깨우고 명상과 성찰에 힘을 쏟으라고..역시..맞는 소리다.말로 하기는 너무나 쉽다.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은 사실 누구나 느낀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수가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인 것만은 틀림없다.우선,나는 너무나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은별이 아빠로서의 삶 이외에도,또다른 얼굴들과 또다른 위치들이 정교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객관적으로 보아도 내 위치들과 임무들은 좀 과다하다 싶다.정신과 사회적 상황에 대한 체중감량 프로젝트를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시작해야 하는 것은 당위다.머릿속 이성이 경고음을 발하고,육체의 소모 게이지 역시 유량이 바닥을 치고 있다고 어디선가 시그널을 보내온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하다가 문제가 생길 거라는 소리다.누구한테? 바로 나한테 문제가 생길 거다.가끔은 일종의 오기와 더불어,그러나..함 해 보지..하고 씩 웃는 때도 있지만,그건 어쩌면 어리석음이 절반 이상 가미된 낙천성에 기인한 반사행동일 것이다.그러나 피로나 낙천성이나 소모되는 정신이나 육체나,,,사실은 어떤 인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음..인식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정확히 말하자면 역치 (Threshold)의 문제다.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시 말해 나는 어느 순간까지는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간 동일한 양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었던 내가,지금에 와서는 척추와 마음의 피로도를 호소한다는 것은,무게를 견뎌내는 내 능력이 감소했다는 반증이다.즉,나는 약해진 것이다.(노쇠해졌다고 진술해도 아마 그 의미가 통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자.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이런 넋두리를 시작했을까..아,참 이 블로그,이 글들..JIFF에 대한 글이 절반으로 두동강이 난 채,중단되었던 일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변명과 자책을 시도하려고 이런 소리를 늘어놓았었던 것이 틀림없다.변명과 자책? ..이것 역시 잘못 사용된 용어일런지도 모른다.사실은 그냥 현실이다.나는 지금 나 자신의 예비용량 (Reserve)을 동원해서 내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고,내 다른 감각들이 거기에 대해 보상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내 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거기에 이 블로그가 끼어든 것이다.내 기록들 말이다.따라서 나 자신의 피로에 관한 이 몇 단락의 언술 역시 또한 내 삶을 기록해 나가는 이 블로그에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에 썼던 jiff에 대한 이 글들은 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접을 것인가? 머..그래도 된다.의무감에 얽매여 영화에 대한 연대기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다.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감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접는 것도 상관 없다.그래도 좀 서운하긴 한 이유는 전주에서의 기억이 못내 속삭이며 조그만 메모라도 남겨 놓을 것을 권유하는 때문이다.그리고 나는 그 부드러운 권유에 굴복한다.그래서 정말로 메모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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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각,첫 영화를 놓치다.
늦잠을 자는 통에 예매했던 첫 영화를 놓쳤다.물론 160킬로미터 정도의 시속으로 달려가면 이 영화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또 과거 같음 그렇게 했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매우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영화를 흘러가게 놓아두었고,나 때문에 영화를 보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는 어느 이름 모를 관객 한 사람에게만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나는 내 첫 영화 <파라다이스,신념>이 상영되는 동안,영화관 대신 전주의 거리들을 어슬렁거렸다.어쩐지 이곳은 변한 것이 없어보인다(물론 이것은 내 착각일 것이다).작년에 보았던 옷 가게와 식당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JIFF의 젊은 스탭들이 거리를 오가며 영화제를 알렸고,그들의 고함 소리는 풋풋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이 정도의 고함소리와 즐거운 분위기로 이 거리에 균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3년 전에 들렀던 한식집을 찾아냈다.식당의 주인 아주머니는 나를 기억해내지 못해도 나는 그 분을 기억한다.메뉴도 똑같다.나는 이상한 데쟈뷰에 시달리기 시작한다.그러나 데쟈뷰는 금방 회복된다.최근의 분주함과 피로가 툭하면 시간과 공간 감각을 상실하곤 했던 내 성향을 어느 정도 고쳐놓았다.나는 그 상황에 약간의 유감을 가진다.나는 시간과 공간 감각을 잃어버리기 위해서 이 곳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또 상관 없다.흔들림은 또다시 찾아온다.이례적인 흔들림은 삶의 권태에 대한 훌륭한 백신이며,영화제 기행이야말로 매우 건전하고 항독성이 있는 예방 백신인 것이다.나는 기다린다.
전날 밤의 비와 한기,그리고 차가운 바람들은 사라져버렸다.영화제의 신이 전주의 관객들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봄이 도처에서 흩날린다.핑크색 복싱 글로브 같던 복사꽃 조차 사라졌는데도,봄은 여전히 거리의 한복판을 따라 유유히 자신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나는 이 곳에 잘 온 것이다.
2.굿바이 모로코.
영화제에서 영화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자 도박이다.물론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나 화제작을 고르는 매우 확실하고도 쉬운 방법도 있겠지만,영화제 홈페이지에서 각 영화들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눈길과 손가락이 다가가는 영화도 있다.2013년의 내게 있어 이 영화 <굿바이 모로코>가 바로 그랬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면 법적 양육권이 아빠에게만 귀속되고,.이 영화의 여주인공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모로코를 탈주하려는 이유는 바로 그 상황,아이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그래서 '탈주'하려는 것이라고,영화제의 홈페이지가 그녀의 사건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탈주'.예나 지금이나 나는 바로 이 단어에 꽂히고 만다.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단어들이 가져다 주는 매혹 때문에,가끔씩 어지럽고 가슴이 뛴다.예를 들어 실종,예를 들어 사라짐,또 예를 들어...
그러나 판타지 스러운,현실을 아예 망각하는,거기서 완벽하게 벗어나버린 영화적인 탈주와 실종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어쩐지 그런 탈주는 진짜 탈주 같지 않다.물리학과 사회학의 법칙을 도외시하는 탈주는 탈주가 아니다.그것은 그냥 백일몽일 뿐이다.오히려 탈주에 대한 갈망과 갈증만 부추길 뿐이다.사실 우주 저 멀리로 스페이스 건쉽을 타고 날아가는 여행은 내 삶의 범위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그런 대리만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탈주와 탈출의 얘기를 나는 좋아한다.그리고 <굿바이 모로코>야 말로 그런 영화라고,영화제의 홈페이지는 넌지시 눈치를 주고 있었다.그래서 예매했었다.
그렇다.영화는 '벗어나려는 자'들을 다룬다.이 영화의 여주인공 두냐는 매우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이혼 후 양육권을 빼앗긴 탓에 (이슬람권에선 이혼하면 무조건 아빠에게 양육권이 주어진다고 아까 말했다),아들을 데리고 모로코를 벗어나려는 꿈을 꾸고 있고,그녀가 부리는 아프리카 출신의 불법체류 노동자 가브리엘 역시 모로코를 벗어나 스페인으로의 탈주를 꿈꾸고 있다.가브리엘을 사랑하는 북유럽 출신 동성애자 극장주 페르센은 가브리엘과 사랑하는 시간 자체가 답답한 현실에서의 탈주이며,일종의 인력업체를 운영하는 두냐와 동거하는 디미트리는 동구권에서 모로코로 온 기술자로서 그들의 공사장 내에서 발견된 카타콤 시대의 프레스코 벽화 유적을 밀반출해서 얻은 돈으로 새 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다.즉 이 영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들 삶의 배경인 모로코를 굿바이하려는 인물들인 것이다.
벗어나려는 힘이 있으면 잡아당기는 힘도 있게 마련이다.이 영화에서의 잡아당기는 힘은 사회제도와 욕망이다.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어린 시절의 친구 알리를 이용하던 두냐는,알리의 욕망이라는 그물을 만나 난항에 빠지고 결국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는 치정과 살인과 부패와 부정이 혼합된 막장 드라마로 향하게 된다.결국 영화는 후반부의 귀결적인 살인극 이후에 두냐만이 아들과 함께 모로코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그렇게 정교하거나 스토리 텔링의 확실한 매력이 있거나 영상미로 승부하는 영화는 아니다.어쩌면 그저 그런 범작의 범주에 머물 수도 있는 영화일 수도 있다.영화의 끝맛 역시 매우 미묘한 씁쓸함을 남긴다.이 영화를 본 후 나는 이렇게 메모했다.
- 탈주라는 대전제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면 성공적인 탈주는 오직 우연과 운과 부정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그래서 탈주에 성공하게 된 여주인공의 눈은 희망이나 꿈이 아닌 불안으로 가득했다.즉 욕망은 불안을 낳았다.
즉 알리가 디미트리와 가브리엘을 죽인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고 나서야,벽화 밀반출을 하려는 고고학자와 박물관 관계자가 지역의 고위 관리와 뇌물이 얽힌 듯 보이는 부정을 저지르고 나서야,두냐는 '굿바이 모로코'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과연 이것이 온전한 탈주인 걸까.차라리 진정한 탈주는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현실의 탈주는 무지막지한 댓가를 치뤄야만 가능하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영화는 던지고 있는 것일까? 오,이 씁쓸한 메세지.유혹의 자기장을 둘러싼 투명 유리창에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 영화엔 잡초 같은 강인함을 지닌 여배우 루브나 아자발이 있다.<인센디어리>,우리 나라에서 <그을린 사랑>이라고 번역된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왔던 배우다.그 영화에서도 아자발은 극한의 고통함을 끝까지 버티어내는 강인함을 보여주었었다.그녀는 이 영화 <굿바이 모로코>에서도,절벽에서의 외줄타기와도 유사한 그 위험의 와중에서도,살인과 암매장과 협박과 돈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끝까지 아들과 함께 모로코를 탈출해내는 강한 여인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해낸다.
내가 언제나 베스트 여배우라고 손꼽는 스페인 출신의 빅토리아 아브릴의 후예가 아닐 수 없다.(그런데 빅토리아 아브릴은 지금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IMDB라도 찾아봐야겠네..) 마지막 씬의 불안감을 표현해내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흔히 볼 수 없는 눈빛 연기였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아주 예전의 어떤 영화제에서도 그녀를 보았던 것을 기억해냈다.2005년이었던가,2006년이었던가.<PARADISE NOW>라는 팔레스타인 영화였다.팔레스타인을 압제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두 청년의 얘기를 다룬 영화였다.루브나 아자발은 그 때 그 청년 중 한 사람의 연인으로 등장했었다.그녀는..그때도 강인했다.비폭력의 의견을 강하게 견지하며 자신의 연인과 대조적인 삶의 태도를 취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10여년이 지난 지금, 썩 잘 만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영화의 충분한 위로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극장을 나왔을 땐 다시 봄이었다.나는 잠시 영화를 잊고 봄을 냄새맡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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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가 블로그를 운영하는 방법을 바꾸게 한다.여기서 그친다.전주에서의 다음 영화들은 또 언젠가 그 영화와 이 블로그들이 나를 잡아당기는 그 날,-어쩌면 아마 내일이 될런지도 모른다-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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