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메말라가는 나라,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땅과의 유대가 점점 상실되어 한없이 가벼워만지는 영혼들이 부초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불규칙하게 떠다니는 나라,화려하지만 구역질나는 겉치레로 외양을 장식하고 그 이면에서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자들이 전쟁의 겉모양을 흉내내고 있는 우리의 나라에서,이런 세계와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는 -정신적으로도 또 육체적으로도 - 공간과 시간,그리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이미지와 의미들을 그려낸 태국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 같은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이상한 청결함과도 비슷한 감각을 상기시킨다.
<엉클 분미>를 본다는 일이 청결하다는 뜻은 아니다.속물성으로 가득한 세속적인 도시에도 고아하지는 않지만 조야한 진실은 있다.그것은 일종의 젊음과도 비슷한 감각으로,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본능적인 용기로부터 비롯된다.이런 종류의 용기는 원래 정치적인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자본과 권력이 언제나 억누르려고 겨냥하는 일차적인 압박대상이 된다.권력은 언제나 개개의 용기들이 연대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데,우리나라 사회가 활력을 잃고 비틀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권력이 벌이는 이 최전방의 전투가 어느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용기와 어떤 에너지들은 <엉클 분미>같은 영화들 쪽으로 도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들은 이런 또다른 세계 속에서 또다른 감각을 익히고 궁극적인 세계관을 궁구하려 노력한다.이것이 '도피'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 와중에 또다른 전선이 형성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현실적인 부조리와 두 눈에 들어오는 오물적인 일들을 외면한다는 항의섞인 아우성 때문에,<엉클 분미>를 보는 에너지들은 현실적인 영역을 잃는 것이다.물론 이 에너지가 그런 영역을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런 종류의 갈등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다양성'과 '피안의 진리'와 '영혼의 구원'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체적 존재'같은 말들을 떠벌일 수도 있고,'지식인적 취약함'과 '세계를 이루는 계급적 밑바탕'과 '승리의 처절한 필요성'으로 대거리할 수도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선택의 문제이다.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시간적인 제한에 시달리고 있다는 당면한 한계 때문에,우리는 우리 앞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게다가 단 하나의 프리즘을 선택함으로써 형성되는 독점적인 시각들이 일으키는 잘디 잔 분란과 걱정들은,심지어 텍스트 자체를 보지도 않은 채,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결여한 채 말썽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텍스트 그 자체이다.텍스트야말로 기본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를 공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일단 눈 앞에 놓인 프리즘을 걷어치워야 한다.그것은 눈의 렌즈를 혼탁하게 만들어 백내장을 유발하고 안압을 높여서 녹내장을 유도한다.그리고 이 두 질환은 공통적으로 눈을 멀게 만든다.말하자면 눈 앞에 놓인 프리즘 때문에 눈은 청결함을 잃는다.아까 얘기했던 예의 청결함은 결국 텍스트다.제시된 텍스트가 어느 정도의 입체성과 결백성을 가지고서 우리의 눈을 공략할 수 있느냐,그리고 우리가 우리 안구운동의 사시성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느냐가 청결함,조야한 진실,그리고 어디에나 드러나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물론 내가 <엉클 분미>를 겨울에 이어서 봄에 또다시 본 것이,반드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한 영화를 두 번이나 본다는 내게 다소 이례적인 사태,그리고 심지어 한 영화 <엉클 분미>때문에 그 영화감독의 전작 <징후와 세기>까지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나와 그 영화 사이에 어쩔 수 없는 끌림 같은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가리키고,그것이 반드시 좋은 쪽으로 결말이 나든 또 그렇지 않든 삶에 있어서 한번쯤은 일어나는 우연한 돌발사태 같은 일일 것이다.
1.그는 친절해졌는가.
봄.이른 4월.완벽한 봄이 오기 직전.나는 <엉클 분미>를 두번째로 보았다.스크린으로 보았던 겨울의 첫번째 경험과 비교하여,봄의 경험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없었다.다만 이 영화의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이젠 어느 정도 친절해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 '친절함'에 대해서 어떤 정확한 이유를 제시하기는 좀 어렵다.그것은 어쩌면 그냥 인상일 뿐인지도 모른다.나는,<엉클 분미>가 과거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에 비해서 훨씬 정돈되어졌다는 느낌을 받았고,과거보다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낮과 밤들을 다소 평이하게 교차시키는 시간적 진행이나,사건이 일어나는 숲과 주인공의 집을 축으로 돌아가는 공간의 배치도 그의 과거 영화가 보여주던 거의 설치미술적인 배치에 비교하면 거의 평범한 수준이다.또 과거에 그가 사용했던 많은 상징적 요소들 역시 그 파워가 많이 약해졌고,하나의 공간과 시간을 집요하게 파고 들던 편집증적인 증상도 조금 완화되었다.
어쩌면 그런 변화에 깐느가 그랑프리를 안겨 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친절함은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숲에서 들려오는 숲 특유의 소리들이 들려오다가 홀연히 스크린에 자막으로 떠오르는 하나의 문장으로도 증명된다.
정글과 계곡,언덕 앞에 서면 짐승 혹은 다른 존재였던 나의 전생이 내 앞에 떠오른다.
이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며,이렇게 영화는 시작부터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넌지시 알려 준다.물론 그것은 '전생'이다.그렇다면 '어떻게'가 중요하다.어떻게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갈 것인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때 스크린에 소가 보인다.어둠 속 혹은 새벽녘인 것 같기도 하다.논에서는 뭔가가 타는 듯 연기가 피어오르고 소의 옆모습이 클로즈업된다.정면이 아니다.은근한 이동의 이미지.
어른 둘과 아이 하나가 보이고 다시 묶여있는 소의 모습이 보인다.소는 어딘가로 가고 싶은 듯 줄을 당긴다.그리고 그 줄은 이내 끊기고 만다.소는 어딘가로 이동하는데.뛰어가는 소의 모습은 먼 거리에서 논과 뒷편의 산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카메라는 논 사이를 뛰는 소의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클로즈업으로까지 잡았던 소의 모습을 거의 아련하게만 처리하는 것이다.논길을 달려가는 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마치 소가 논과 숲과 산을 향하여 실종되는 것처럼.
결국 소는 숲으로 간다.(아핏차퐁의 모든 것들이 숲으로 가듯.) 소는 숲 속 어느 곳에서 멈추며 짧은 울음소리를 낸다.이때 관객은 당연히 영화의 첫 장면,'숲 앞에 서면 전생이 떠오른다'는 자막을 떠올리게 된다.그렇다면 혹시 저 소가 전생을 떠올린 것일까? 그래서 저렇게 갑자기 숲을 향하여 뛰어갔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벌어지는 영화 속 일들은 저 소의 전생이라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소의 질주 자체가 누군가의 전생이라는 것일까.
혹은 이 질주는 그냥 고삐 풀린 소의 질주일 수도 있다.그냥 평이한 일탈일 수도 있는 것이다.아무 것도 아닌 해프닝.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영화는 포르노의 구조를 닮아버리고 말게 된다.섹스 씬을 향하여 기획된 아무런 의미없는 가지 가지 해프닝들.그러나 아핏차퐁은 포르노 감독이 아니다.또 우리 역시 포르노의 관객이 아니다.역시 이 소는 분명 전생과 관련이 있다.
또한 소는 당연히 불교적인 동물이다.기독교 대국이니 뭐니 해도,우리나라의 관객들은 저 소의 질주를 보면서 당연히 심우도를 연상할 것이며 불교적인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더구나 기독교의 동물은 소가 아니다.양과 뱀이다.소는 기독교와 거의 관련이 없다.그러나 저 소는 동아시아의 소가 아니다.굽어진 뿔은 오히려 인도의 물소를 연상시키고 저 곳은 타일랜드의 어느 변방이다.
이때 소 주인이 소를 찾으러 나타나고 소를 찾아 목에 매인 줄을 당긴다.소는 당연히 주인을 따라간다.사람과 소는 화면 왼쪽으로 사라지고 숲만이 덩그러니 화면에 남는다.그리고나서 이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른다.
엉클 분미(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아저씨)-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우리는 remember가 아니라 recall이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저 이상한 물체-현재로서는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다-가 나타난다.사람이나 원숭이의 형상을 한,그리고 1970년대나 80년대 헐리우드 공포 영화에서 가끔 유령의 증표로 사용했던 빨간 눈을 한 저 괴물.(스필버그 역시 그의 초창기 영화에서 저 빨간 눈을 초자연적인 존재의 표식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저 곳에서 무언가를 지켜 본다.아마 떠나가는 소와 사람일 거다.그러나 저 생물을 보면서, 영화가 시작하고 5분 정도 지난 현재까지의 주된 주제라고 생각하는,그래서 급기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을 '친절하다'라고까지 묘사하게 만든 '전생'과 직접적 연관을 재빨리 떠올리기란 좀 어렵다.저것은 무엇일까,나아가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정말 친절해졌는가..
이때 장면은 재빨리 태양이 지배하는 시간-낮 또는 아침-으로 바뀌고 아핏차퐁 특유의 차 안의 풍경이 전개된다.차 안 쪽에서 차창 바깥을 비추었다가 때로는 차 안의 사람으로 카메라의 방향을 바꿔가는 언제나의 광경.뒷자리에서 앞 차창에 비친 도로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그의 이상한 인증샷이다.그리고 아핏차퐁 영화의 단골 출연 배우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아핏차퐁 월드의 여배우 제니이라 퐁파스 그리고 몇 번이나 자기 모습을 드러낸 <징후와 세기>의 스님 사크다 카에부아디.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들이 등장하고 익숙해진 샷들이 나타난다.예를 들어 분미 아저씨의 집에 도착한 뒤에 나오는 창문 샷.
<징후와 세기>에서도 여러 번 변주되었던 창문이다.르네 마그리트의 몇몇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저 창문들은 대부분 숲이나 열대의 나무들과 연결되어 있고,한 세계와 또다른 한 세계를 연결시키는 출입구의 기능을 한다.
그런데 <엉클 분미>의 등장인물들은 이어지는 몇몇 대화로부터 자신들이 위치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한다.분미의 중요한 농장 일꾼이 라오스와의 국경을 넘어온 불법체류 노동자라는 것.사크다 카에부아디가 연기하는 통의 입에서 '이싼 사투리는 잘 못 알아듣겠어'라는 대사가 나오게 함으로써,이 지역이 태국의 북동부인 이싼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아주 평이하게 전달한다.이런 정보 제공은 과거의 아핏차퐁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물론 태국의 관객들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태국의 북동부가 방콕으로 대변되는 태국 사회의 중심부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으며,과거 몇십년 전 공산주의 운동의 한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안다.많은 반정부적인 청년들이 라오스의 공산조직 쪽으로 넘어갔고,그쪽 정글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쳤으며 태국의 군부독재정권은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하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안다.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영화가 어떠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이것은 과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다.
더구나 이 영화의 한 주인공 분미가 불치의 신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사실도 아울러 제시된다.
고용주인 분미를 치료하는 라오스 노동자 자이의 장면을 조금은 길다 싶게 묘사하고,분미가 아직은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일일이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마치 자신의 친절함을 의도적으로 전시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그는 정말로 친절해진 것이다.적어도 영화의 첫 밤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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