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 <이층의 악당>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이 만든 그야말로 능수능란한 영화.여러가지 이질적인 쟝르적 요소들과 또 여러가지 관객들에게 익숙한 요소들을 한 통 속에 집어넣고는,유능한 칵테일 전문가가 그러하듯,한바탕 리드미컬하게 흔들어댄 후 (그야말로 셰이크,셰이크!!),정연하게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다.
미스테리적인 보물찾기와 피와 폭력과 욕설과 가벼운 음모들이 불꽃놀이하듯 한꺼번에 터진다.거기에 20세기 말 우리나라 로맨틱 코미디의 멋진 커플이었던 한석규와 김혜수의 완숙한 (정말 계란 완숙이다) 연기와 호흡이 곁들여진다.오래된 관객들은 두 배우들의 얼굴에서 과거 그들이 수행했던 캐릭터들을 회상하게 되고,한석규는 1990년대 텔레비젼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연기했던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이자 결코 세상을 향하여 정직해질 수 없었던 건달-범죄자를 연기하며 이제는 약간 지쳐버린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반면 김혜수는 섹시한 40대 여배우라는 자신의 영화 외적 정체성을 집어던진 채,히스테리컬한 속물이라는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데,그곳이야말로 1985년 <깜보> 이후 그녀가 쭉 연기해왔던 영화 속 인물들의 중간기착지라는 것을 유능하게 증명해낸다.(그 외에 다른 캐릭터들은 매우 부수적이어서 언급하기가 귀챦다)
그리고는 손재곤 식의 블랙 유머가 있다.쓴웃음과 의외의 헛웃음 그리고 빵 터지는 웃음들을 불규칙하게 출몰시키는 그의 유머의 특징은,어떤 캐릭터가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순간,오히려 그 캐릭터의 상황이 우울해지고 쪼그라들고 한없이 위축된다는 데에 있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슬랩스틱 코미디스러운 상황이기도 하다.뻔뻔한 범죄자들과 단신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키 높이 구두를 신은 조폭 두목,H 그룹의 누군가를 연상케하는 뺀질뺀질하고 앞과 뒤를 잘 구분 못하는 재벌2세 등은 영화 곳곳에서 때때로 모여 허탈한 유머들을 정교하게 남발한다.
이것은 미덕이다.이런 종류의 웃음 코드들을 한 곳에 집합시킬 때,우리는 때때로 거대한 우울함의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게 되고,그것은 마침내 칼날이 되어 웃음 없는 세상의 일부를 생채기낼 수 있게 된다.이것이 유머의 기능이다.
이 영화의 악당은 결국 자신이 우습게 봤던 과부에게 뒤통수를 맞는다.과부와 딸이 그들 활극의 무대가 되었던 부담스런 2층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녀는 근본적으로 달라보이지 않는다.일상의 까다로움과 분주함이 아직도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마침내 악당이 그들을 찾아내어 두 세력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영화는 드디어 엔딩을 맞이한다.
악당이,복수도 가능하고 자신의 채권을 당당히 요구하게 될 수도 있을 그 때,손재곤은 일부러 정적인 결말로 영화를 끝내버린다.지치고 배고파진 악당 한석규는 김혜수의 새 집 거실에 널브러지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긴장과 탐색의 곁눈질을 완전히 멈추지는 않고) ,과부는 익숙한 속물적인 몸놀림과 말투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이것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의 여정과도 비슷하다.우리는 두 시간 남짓한 비일상적인 환상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엉거주춤 일어서서 극장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그가 본 영화가 아무리 화끈하거나 감동적인 결말로 마무리 되었어도 말이다.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변하지 않는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이런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어딘가 비타협적인 태도가 있는 것이다.사실 세상은 영화 같지 않기도 하고 영화 같기도 하다.온갖 모험과 서사와 감정의 넘나듬을 경험한 끝에,우리는 거실에 길게 드러눕고 마는 것이다.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유머다.
2011-3 <불량남녀>-스스로 속다.
우선 이 포스터를 보라.임창정을 깔고 앉은 엄지원은 이종격투기의 어떤 공격 자세를 취하면서 남자를 압박하고 있다.일부러 약간만 강조한 듯한 섹시한 다리를 포스터 한 쪽에 장치해서 서투른 남성 관객들의 눈길을 유도해내면서 그녀의 얼굴은 평소의 단정함을 내팽개친 채 극악스럽게도 일그러져 있다.그녀 머리 뒤에선 촌스런 주황색 공간을 배경으로 쉼없이 날아들어오는 \자 수십개가 보인다.그들의 난투가 돈과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엄지원의 엉덩이 밑에 깔려 있는 임창정도 좀 보자.비명을 지르고 있긴 하지만 이 비명 속에서 약간의 엄살과 개그가 묻어나온다.통증 보다는 당황함과 황당함이 더 엿보인다.그의 왼 손에도 만 원 짜리 지폐 몇 장이 소유자의 상태에는 아랑곳 않고 풀 죽은 듯 아니면 무심한 듯 그렇게 펄럭이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불량'남녀이며 그 옆엔 아주 작게 본격코믹혈투극이라고 쓰여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포스터의 느낌들을 거의 100% 믿어버렸다.나는 실제로 엄지원과 임창정 사이에 돈을 매개로 한 혈투에 가까운 투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그 싸움이 비록 사실적인 유혈극은 아닐지언정,적어도 그런 정도의 치열함이 숨쉬고 있는 싸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즉,나는 B급 정서를 생각했다.식칼이 날아다니지 않을 거면 적어도 베개 정도는 왔다 갔다 할 거라고 상상했고,두 사람 사이에 벌어질 끊임없는 언쟁 속에 가차없는 욕설들이 교환되었음 하는 바램을 가졌다.아니 바램이라니,나는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실히 믿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그런 어처구니 없는 착각은 바로 이 포스터 때문이었다.영화 내용이야 어떻든 포스터나 스틸 사진 만큼은 확실히 뽀대나게 뽑아내는 한국 영화적 상황에서,이렇게 컨트리삘 만빵인 포스터야말로 영화의 자신감을,영화의 B급 정서를 확실하게 증거해주는 표상이라 믿었던 때문이었다.
이 믿음은 영화가 4분의 1 정도 진행되고 나자 여지없이 배신되었다.도대체 이 두 사람이 왜 '불량'남녀라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불량스럽기는 커녕,영화는 그들의 재정상태 - 임창정은 카드연체자여서 신용불량상태로 떨어져 있으며 엄지원은 그의 카드 변제를 독촉하는 카드회사 직원이다- 와 심리상태에 대한 선의의 변명을 잘도 준비해 놓고 변호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게다가 그들은 결국 사랑에 빠진다.사랑을 찾아서 도로를 달리는 임창정에게서 나는 그넘의 불량끼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순정파 불량남녀라..뭔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술 취해서 주사 부리는 연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는 엄지원 역시,'돈'이라는 싸움터에서 벗어나자 우울하고 정갈한 캐릭터로 바뀌어 버린다.서울만 탈출하면 모두 다 순수해질 수 있다는 소리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도덕적 교훈인가 보다.
그래도,또 그렇기 때문에 이 로맨틱 코미디의 가치는 저 불량스러운 포스터에 있다.저 포스터는 앞으로 우리 영화가 정말로 불량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불량스러움이란 꼭 범죄적인 그리고 반사회적인 모습 만을 가리키지 않는다.치명적인 삐딱함,거룩한 체제에 처절한 똥침을 날릴 수 있는 과감함,거기서 획득되어지는 진짜배기 풍자의 맹아들이 저런 포스터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그 때를 ,그런 영화가 나오게 될 그 날을 위해서 저 포스터를 기록에 남긴다.꼭 그래야 할 것만 같다.
또한 주연배우 임창정의 가치를 꼭 언급하고 싶다.그의 가치는 좀 미래적인 것이며 그가 배우 생활을 종결지을 때 쯤에야 산정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그러나 그에게서는 의외의 서민적인 포스가 풍겨나온다.그는 결코 백마탄 왕자가 될 수 없을 외모를 지녔다.임창정이 재벌 2세로 등장한다면 관객은 바로 사기의 냄새를 맡을 것이다.그러나 그의 이런 서민적 풍모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그에게선 간간이 의외의 페이소스가 풍겨나오기 시작한다.삶의 어두운 면이 아닌 쓸쓸한 면,생활에 의해 피로해진 정신이 마스크와 몸짓을 통해 서서히 표현된다.그가 스스로 자신의 이런 면을 알았음 좋겠다.
어쨌든 스스로의 착각에 의해 들어간 극장 안에서 나는 조금은 어이없어 하고,또 그에 의한 반작용으로 마구 낄낄거리다가 극장 바깥으로 걸어나왔었다.
2011-4 투어리스트.
죠니 뎁과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하고 <타인의 삶>을 연출했던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가 감독이다.이 정도 되면 일단 라인업만 가지고서는 그냥 MUST SEE다.더구나 아내는 뎁의 광팬이다.죠니 뎁이 출연한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서도 은별이를 어디에 맡기고 극장에 가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엔 죠니 뎁만 출연하는 것이 아니다.실은 이 영화는 뎁 보다는 안젤리나 졸리의 것이다.죠니 뎁은 영화 내내 자신의 매력을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영화 내용 자체가 그러했으므로 뎁에겐 매우 불공평한 일이었다.반면 안젤리나 졸리는 어느 영화에 나와도 자신의 아우라를 발산할 줄 안다.실제로 졸리가 등장하면 적군과 우군이 혼란스러울 정도다.그녀는 고전적인 헐리웃 여배우처럼 생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카리스마 넘치는 여배우들이 행사할 수 있었던 배우적 권력을 누릴 수 있는 21세기의 거의 유일한 여배우이다.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전혀 성형이 필요없을 하나 밖에 없는 여배우'인 그녀는 미국을 떠나서도 자신의 매력을 여유있게 드러낸다.그리고 마지막 반전과 해피엔딩을 향해 유유하게 달려간다.
그런데 그 이상은 없다.감독은 헐리웃 특유의 초스피드나 무지막지한 감각적 쾌락 따위는 우습게 본다.(물론 그가 그런 걸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끝까지 여유를 가지고 사건들을 묘사하며 그렇게 영화를 끝내버린다.따라서 강한 액션과 스릴을 기대하고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인 관객들이 어느 정도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자 결국 주인공은 영화가 벌어지는 무대 베니스,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베니스의 그 유장한 물결들,고풍스럽고 시간을 증명하는 듯한 건물들,태양과 바다,밤의 베니스가 보여주는 따뜻하면서도 비밀스런 깊음.나는 어느 순간 베니스를 바라보며,아 가고 싶다 베니스~를 연발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나는 누구? 바로 이 영화의 제목 '투어리스트'다.wanna be tourist.이것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에 속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영화는 대부분 관객을 속이지 않는다.영화 광고와 영화 평론,그리고 영화를 다루는 언론이 관객을 속일 수 있지만,영화 자체는 관객에겐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우리를 속이는 것은 우리 스스로다.
그리고 베니스와 안젤리나 졸리와 죠니 뎁이라면,또 스스로 속아줄 만도 하다.
겨울의 영화들5 <초능력자> <불청객><여의도><타운<<걸리버여행기><상하이> (0) | 2011.03.01 |
---|---|
겨울의 영화들4 -<어웨이 위 고> <러브 앤 드럭스><김종욱 찾기> (0) | 2011.02.26 |
겨울의 영화들2-<심야의 FM> -채권자와 채무자. (0) | 2011.02.23 |
겨울의 영화들 (0) | 2011.02.22 |
꼭 언급되어야 할 2010년의 영화들.1 (0) | 2010.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