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아바타에 관한 짧은 글들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0. 3. 5. 11:12

본문

1.늦게.

 

천만 관객들이,마치 시민적인 의무라도 되는 양 줄지어 몰려가서 보는 영화들을 나는,그 쌓여올라가는 관객의 숫자가 거의 천만에 이르러서야 겨우 보게 되곤 한다.이것은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만은 아니고 언제나 꼭 그렇게 되고야만 마는 어쩐지 징크스 같은 일이다.<괴물>도 그랬고 <왕의 남자>도 그랬다.나는 언제나 뒷북을 치듯이 극장에 찾아가 몇 주 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듬성듬성해진 관객들 사이에서 그 영화에 대한 각종 정보들과 칭찬 그리고 험담들을 곱씹어가며 영화를 본다.내 속엔 그렇게 남들보다 늦게 보는 것이 더 편안하다는 본능적인 방어감각 같은 것이 숨쉬고 있는 모양이다.

 

2.달랐다.

 

그러나 <아바타>는 달랐다.역시 1000만에 이르러서야 극장엘 찾아간 내 시간표는 같았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거기에 있었다.내 주변관객들의 연령대가 매우 넓다는 흥행영화 특유의 현상은 예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지만,관객석의 밀도는 천만영화답지 않게 여전히 빽빽했다.한가한 극장 안의 풍경을 바라며 들어갔던 나를 어쩐지 실망시키는 이상한 전환점 같은 순간을 나는 경험했다.

 

다른 건 또 있었다.그것은 중노년 관객들의 눈빛이었다.바야흐로 흥행에 성공해서 연일 언론의 관심을 무슨 융단폭격처럼 조명받는 영화들은,평소엔 영화 따위에 관시미가 없는 4.50대 이후의 중년관객들 -특히 남성관객들-의 발걸음을 극장으로 돌리게 한다.그런 영화를 보지 않으면 어쩐지 세대에 뒤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중산층적 감각 혹은 더 새로운 세대와의 소통과 교감의 필요성 (조금은 강제적으로 부과되었을 법한)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나이대의 관객중 하나인 나로서는 그런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우선 즐겁다.그들은 짐짓 정색을 하고 영화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얼굴 표면으로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점쟎게 극장 내부를 둘러보며 영화에 대한 비판적 품평을 준비한다.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들은 금방 본 영화에 대한 감흥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지도 않는다.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도 마찬가지다.그저 한 번의 낮은 헛기침,그리고 작은 각도의 두리번거림으로 모든 것을 대체한다.

 

3.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아바타>는 또 달랐다.40대말에서 50대 초반까지의 아저씨들 - 의사들은 가끔 이들을 '4회말 5회초'라 부른다.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자기확신이 강한 나이여서 그런지,그들은 대개 의사들의 설명을 강하게 불신한다.또한 환자들에게 가장 불친절한 연령대의 의사들 역시 바로 그 연령 범위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의 눈빛에서 ,나는 그동안과는 다른 무언의 기대를 보았다.짐짓 젠체하고 짐짓 젠틀한 척 보호자연하는 평소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나는 가끔 그들의 몸짓 안에서 풍겨나오는 이상한 기대감을 보았다.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4.감각의 제국

 

영화라는 매체,혹은 예술쟝르의 시작을 생각해 보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의 영화들에서 기차와 노동자들을 찍었다.관객들은 달려오는 기차와 걸어오는 노동자들에 놀라 황급하게 몸을 피했다.명백하게 그림과 사진술의 후손으로 태어난 영화는,그들의 조상들에겐 부족한 사실감,그리고 활동성을 주무기로 삼았다.움직임이 있다는 것,거기에서 느껴지는 입체감 그리고 획득된 새로운 현실감이 바로 영화의 비밀병기였다.영화가 예술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미국과 프랑스와 러시아의 새로운 선구자들이 등장한 이후였다.

 

다시 말해 영화의 시작은 분명히 테크놀로지였고 그 신기술은 인간의 경험과 오감에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이 새로운 현실감,눈 앞에 펼쳐지는 세계 안에 내가 들어가 있다는 느낌,스크린 내부와 외부 사이의 거리가 최대한도로 좁혀지는 듯한 착각,그래서 얻어지는 감각적 만족이 아주 좁게 바라보는 영화 기술의 진행방향이었을 것이다.3D가 되었든 CG가 되었든 그들의 목표는 가장 그럴듯한,-조금은 역설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가장 현실적인 '감각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는 기술 자체의 변증법을 통해 어떤 경우엔 매우 비논리적으로 발전되는 것이고,그것이 만들어낸 '새로운 감각'이라는 것도 언제나 관객에게 만족을 주거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만은 아니다.감각의 개별적인 다양함 때문에라도 추한 진보와 매끄러운 진보가 동시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그것은 때로 매우 비도덕적이고,어떤 때는 요새 같으면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그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엄청나게 닮게 되기도 한다.

 

어쨌든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멈추지 않는다.다만 그 빠르기를 견제할 수 있는 몇몇 요소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5.씁쓸할 수 있다.

 

우리의 4회말5회초들이 기다린 것은 바로 '기술'이다.그들은 배우들의 연기나 영화의 완성도 ,그리고 내러티브의 변용을 기대하지 않았다.그들은 신문과 인터넷에서 보고 방송으로 들은 역사적 진보의 한 순간 (물론 이는 매체의 매체적인 뻥튀기가 다분히 가미된 말이다)을 경험하고 싶었을 뿐이다.그런 행사에 증인으로 참석한다는 것은- 지방선거를 앞둔  이 때 지역의 주력인사가 여는 출마선언 겸 자서전 출판 행사에 할 수 없이 봉투를 들고 참가하는 동네 유지 아저씨들의 심정처럼- 출석부에 도장을 찍는 행위와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말들은 일방적이고 공정하지 않은 폄하로 치부될 수 있다.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에게,<아바타>를 통해 당신이 본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질문해 보라.열에 다섯은 바로 그 '기술',(신기술)을 언급할 것이다.이런 사실은 인생을 짓쳐 달려왔던 중년의 남자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든다.도태의 가능성이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언급되는 '신자유주의스러운' 세상이다.속으로는 구세대의 사업에 치중하지만 겉으로는 기술력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계에 우리는 산다.모르면 탈락하고 뒤쳐지면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배웠다.변화는 가끔 위험을 수반하고 신기술은 종종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조금은 씁쓸할 수도 있다.

 

6.그럴 가능성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뭐 전혀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것이다.당연하다.영화를 그냥 영화로만 보아야 할런지도 모른다.어쩌면 내 주위에 위치한 사람들이 대부분 매우 비관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거나 루저들인지도 모른다.그럴 가능성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계속)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