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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쓰는 겨울영화 4 <시네도키,뉴욕>-우리의 가건물들을 위하여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0. 2. 2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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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휴먼 네이처> <이터널 선샤인>의 능력있는 각본을 쓴 작가 찰리 카우프만의 감독 데뷔작 <시네도키,뉴욕>은 어찌 보면 매우 난해하고 어지러운 영화다.앞뒤가 잘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기도 하며,갑작스럽게 나타난 캐릭터가 영화의 주도권을 움켜쥐었다가 그냥  사라져버리기도 하고,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에피소드들이 나열식으로 나타나 그 의미를 반추해보기도 전에,이번엔 문명이나 도시에 관한 거대담론이 등장해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흩어놓아버리기도 한다.

 

불타고 있는 집에 사는 여자와 어쩐지 환자 같은 정신과의사가 등장하고,작가겸 연출가인 주인공은 자신의 공간과 지위에서 점점 더 밀려난다.연극 속에서 그 작가의 역할을 담당하는 배우가 작가의 역할을 빼앗으며 그런 종류의 인물복제및 교환은 영화가 결론부로 다가가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더 심한 혼돈 속으로 치닫는다.

 

 

또한 그것은 감독겸 각본을 맡은 찰리 카우프만 특유의 세계이기도 하고,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팬들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익숙한 시츄에이션이기도 할 것이다.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자체의 외피를 단 한 꺼풀만이라도 벗겨내도,이런 혼돈과 무질서를 너무나 쉽게 목도하는 바,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도 이런 혼돈이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아주 반대로 아주 단순하게 이 영화를 읽어보자.뉴욕에 거주하는,연극연출가라는 직업을 가진,중년의 지식인 남자 예술가,아내는 딸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 다른 남자와 함께 살며,그 자신은 그를 둘러싼 숱한 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좌충우돌한다.자신의 신체증상에 과도한 근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신과를 비롯한 모든 전공과목의 의사들을 죄다 전전하며 닥터쇼핑을 하고,이런 행동의 근본원인은 결국 죽음과 종말에 관한 두려움이다.

 

재즈가 주가 되는 인상적인 음악들이 영화의 전편을 흐르고 영화의 주된 이야기꺼리는 예술작업( 이 영화에선 연극) 창작과정이다.그리고 주된 배경들은 뉴욕의 거리들과 까페들 그리고 아파트와 연인과의 침대 속이다.

 

누가 생각나는가? 뉴욕을 영화화하면 그 누구라도 이렇게 만들게 되는 것인가?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나는 누군가를 곧장 떠올렸고 그의 이름은 우디 앨런이다.말도 안된다고 눈을 치뜨며 반박하려는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우디 앨런 역시 바로 저런 소재들을 가지고 그의 수십년간의 영화생활을 지속시켜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두 사람은 완벽히 다르며 거의 숲과 사막 사이의 차이 만큼이나 거리가 있다.더구나 찰리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신경증과 우디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신경증은 임상적으로도 그 종류가 다르다.우디의 남자들은 자신의 내면을 긁어대는 고민들과 투쟁하지만,자신의 현실감 -세계에 대한 오감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감각-을 결코 완전히 놓쳐버리는 일이 없다.우디 앨런의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속에서,자신과 세계의 존재를 질문하고 고민하지만 그 세계의 중심축은 오히려 그 인물들을 감싸고 돌며 그 인물의 완전한 탈락을 막는 방어막 구실을 한다.

 

그러나 찰리 카우프만의 인물들은 거기서 몇발짝 더 나아간다.그들은 세계 속 자신의 의미를 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세계 자체의 의미 역시 질문한다.그리고 그들의 현실은 우디 앨런의 현실과 달리,서서히 비틀리고 왜곡된다.그들의 세계는 인간 두뇌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 축소되거나 수많은 동일인물들로 복제된다.(존 말코비치되기) 시공간감각들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쌍둥이들이 등장해서 관객의 감각을 교란시킨다.사랑하는 연인들 마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위치해 있어서 가장 괴로운 절망 속으로 빨려들어가기까지 한다.(이터널 선샤인과 어댑테이션)

 

카우프만의 세계 속 인물들은 이렇게 '현실'이라는 기본적 원칙에서 살그머니 비껴 서 있고 현실감각이라는 서로의 공통분모 속에서도 엇나가 있다.그들은 마치 실종자들처럼 자신의 세계 속을 헤매이고 있고,그러면서도 '진실'을 알고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찰리 카우프만 세계 속 시민들이 결국  찾아내는 비상구는 바로 가건물로서의 세상이다.그들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세계를 하나의 건물처럼 제시한다.그것이 두뇌 속이 되었든 연극무대가 되었든 그들은 자신의 세상을 스크린 위에 전시해 그곳에 자신을 투사하고 스스로를 실종시킨다.

 

그 가건물로서의 세계에,중간결산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시네도키,뉴욕>속에 나오는 뉴욕의 연극세트이다.

주인공 케이든은 무려 17년간 단 한 개의 연극을 구상하고 있다.그는 거대한 창고를 빌려 자신의 세계와 똑같은 세상을 건설한다.스스로를 반영하는 캐릭터를 그 안에 집어넣고 자신의 현실을 투사하는 다른 인물들을 배치한다.자신의 과거와 현실이 그대로 그 세계 속 내러티브로 작동하고 미래의 운명 마저 그곳에서 결정되는 듯도 보인다.

 

 

 

 그것은 케이든이 운명처럼 던진 최후의 몸부림이자 승부수이다.그는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려 그 세계와 완전히 똑같은 가건물을 건설하는 것이다.그것이 하필 연극무대라는 것은,또 자신이 그 연극의 각본이자 연출가라는 사실은,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컨트롤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만,그의 생각처럼 그 일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17년이란 세월 동안 그는 완성된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어쩌면 당연스런 귀결처럼 느껴지는 이 과정 속에서 그는 점점 더 늙어가고 에너지를 잃어간다.삶과 세계를 장악하기는 커녕,그는 그 가건물 속에서 잊혀지고 실종되어진다.그가 만들어낸 묘한 시뮬라크르가 그를 점점 더 압박하고 가건물 특유의 내구성이 그의 창작자로서의 권리를 앗아간다.그가 만들어낸 배우들이 오히려 가건물 내부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케이든은 그 내부에서 서서히 몰락해간다.그리고 남는 것은 결국 죽음이라는 이름의 휴식 뿐이다.

 

 

그래도 그 세상은 여전히 흘러갈 것이다.수많은 복제품들이 존재할 테니까.

 

그렇다면 케이든의 의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 것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찰리 카우프만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운명이 ,특히 창조를 업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운명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을- 끊임없는 가건물짓기와 현실창조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가건물을 짓는다.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과,글 쓸 공간을 위해 인터넷 한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이 블로그도 결국은 건물의 모형이며 내부이다.나는 가끔씩 이 건물에 들어와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가구배치를 새로 한다.전선을 연결하고 난방장치를 해놓는다.

 

결국 그것이 다다.나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건축해놓는 것이고,2010년 2월 어느 날 지어놓은 결과물들을 바라보며,이것이 바로 내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케이든의 거대하고 환상적인 실험처럼 말이다.

 

케이든의 이 실험이 전적인 환상에 불과해도 좋다.그가 이 영화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지어낸 꿈이어도 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우리와 케이든이 지어내는 가건물들은 영원히 세상 어느 구석에서 숨쉬며 존재하기 때문이다.전체로 부분을,부분으로 전체를 가리키는 제유 (synecdoche) 는 이렇게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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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1.시네도키가 맞는 발음인가,아님 시넥도키가 맞는 발음인가.

사족2.수많은 매력적인 여배우들이 등장하는데,마침내 다이앤 위스트와 제니퍼 제이슨 리가 등장하는 걸 보고

         한마디로 깜놀했다.

사족3. Jon Brion의 음악이 기가 막힌다.

http://www.youtube.com/watch?v=662uPQ7Xr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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