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께 다녀온 지도 벌써 2주일이 훨씬 지났습니다.친절한 환대와 진정이 깃든 귀한 말씀들이 고마웠다는 내용의 전화를 드린다,드린다 하다가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이 생래적인 게으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난감합니다.(오늘도 이렇게 변명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게 그 한 밤의 시간들은 참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더구나 좋았던 가을이 갑자기 끝나버리는 분위기가 다분해지는 지금,제게 2009년의 가을은 신부님의 도시에서 보낸 가을로 남을 것 같습니다.제가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좋아하는 11월의 싸늘함이 더 더욱 아쉬워져서,제가 신부님의 도시를 찾아갔던 그 기나긴 여정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전 10월 보다 11월을 훨씬 좋아합니다.11월 아침 특유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차가운 공기는 저의 favorite things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신부님이 드디어 우리나라에 돌아오셨다는 기쁜 전언을 받았을 때의 제 의도는 은별이와 둘이서 신부님을 찾아뵙는 것이었습니다.아주 오래 전 부터 신부님과 은별이는 미팅 약속이 되어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신부님의 파트너 은별이가 심한 감기에 걸려서 멀리 떠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고,그 상황에서 저는 또 다른 귀한 분들을 신부님과의 미팅에 초대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처음엔 한 분이었던 것이, 언제나 비틀거리는 제 오지랍 때문에,두 분 세 분으로 늘어나게 되었고,결국은 한 부대를 이끌고 신부님의 조용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사실 분명한 실례였기 때문에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그리고 그런 종류의 이상한 실례에도 불구하고 저희 일행을 환대해주신 신부님께 또다시 고맙고 고마웠다고 덧붙여야겠습니다.(물론 우리 일행이,신부님이 평소에 처치가 곤란해하셨을 것이 틀림없었을 그 많은 음료수들을 해결하는 것으로 약간의 빚을 갚았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날 우리 일행은 신부님 앞에서 약간의 난장적 토론을 펼쳤습니다.신부님께 그런 종류의 얘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에,저는 그 자리에 앉아서도 또 조금 신부님께 죄송스런 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저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지성과 양식을 믿었습니다.황당하고 무례한 언사들이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억지 소리 같은 말들은 하지 않을 분들이라고 믿고 있었지요.그러나 어쨌든 그 분들의 자유로운 토론 때문에 혹시나 불편하시지는 않았는지 걱정됩니다.(그러나 이런 걱정을 무릅쓰면서까지 대화를 밀어붙였던 것은 또 신부님을,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부님의 글들을 신뢰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 날 밤의 주제는 좀 어지러웠습니다.아마 사회자를 자처했던 저의 부족한 능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저는 제가 결코 백분토론의 손석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분은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를 기준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했고,어떤 분은 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였습니다.어떤 분은 안티 크라이스트가 아닌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이어나갔고,어떤 분은 그 모든 입장들에 대한 백과사전식의 대답들로 다양한 논제들에 대응했습니다.개성들도 다양해서 그 입장들을 죄다 조율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였고,우리 중 한 분이었던 여성 참석자 한 분 만이 가장 침착하고 의연해 보였습니다.
어쨌든 즐거웠고 누가 뭐라 하든 명랑하고 유쾌했습니다.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고전적 진리를 필사적으로 찾아헤매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습니다.또 신부님이 조성하시던 따뜻한 분위기 자체가,잔잔하면서도 덜 권위적으로 보이던 미소 자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저의 모호한 위치 때문에 저 자신으로서는 약간 덜 얘기했던 부분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그것은 물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 일겁니다.아마 어떤 분들은 후속 토론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뭐,그렇게 대단한 의문은 아니며,저 자신 역시 제 질문들에 충분한 답을 가지고 있거나 아주 오랜 시간을 공들여 숙고했었던 것도 아닙니다.그러나 그냥 그렇게 툭 던지듯이 질문들을 던지고 싶었던 거지요.
첫째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수가 2000년 전 실재했던 예수(만약 그가 정말 실재했다고 가정하는 경우입니다.)와 아주 다르다면,우리가 그 날 밤 기본적으로 상정했던 예수라는 사나이의 속성과 존재가 사실은 전혀 딴판이라면,그래서 우리가 속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면,소위 예수교 신자라는 사람들과,저 같이 태어나자마자,아니 100년 전 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는 집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날 밤 그 방에 모인 분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그건 그렇고 예수는 정말 있었던 걸까요?' 였던 것입니다.물론 예수는,그 날 밤 그 방의 어떤 분이 대답해 주셨던 것처럼 '모자이크'된 존재일 것입니다.예수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해석들이 서로 부딪치며 싸워 왔던 어떤 와중에 최종적으로 정리된 어떤 존재일 것입니다.그렇다면 그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고 심지어 '구세주'라 부르며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교부들의 지혜를,그들의 총정리를 꼭 죄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정연하게 문자화된 예수의 정의를 고스란히 다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 다이제스트식 암기가 정말 영혼의 풍요로움과 구원을 가져다주며,인간의 궁극적인 마음의 평화를 획득하게 해 주는 것일까요?
또,아무리 똑같이 생긴 예수를 마음 속에 그려놓고 있다고 할지라도,각자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신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가령 지금 청와대에 5년 만기 전세로 살아가는 세입자님의 신의 모습은 4대강을 파헤쳐서 건설 경기를 일으키는 새마을 운동의 청교도 같은 삽 든 예수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뉴라이트가 떠받드는 예수의 마음 속에,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 따위가 존재할 구석이나 있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매주 교회에서 사랑이니 구원이니 믿음이니 해 가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사실은 사교모임이나 상업적 카르텔에 불과할 '교회생활'에 열심인 것 아닙니까..
왜 똑같은 예수가,이토록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문자 그대로의' 예수를,'문자주의적인' 기독교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만이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우리가 문자주의적 기독교에서 벗어나서 다른 종류의 지향을 가지는 기독교회를 향해서 나아간다고 생각해본다 해도,또다른 심연이 존재할 여지가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믿음'과는 완전히 다른,'깨달음'을 향한 기독교를 이상적인 기독교라고 가정해 볼 때,여전히 제기되는 문제들이 있는 것입니다.그것은,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정성과,경제적인 어려움,그리고 고위험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예수라는 존재를 치열하게 생각하고 내면의 부름을 향해 귀를 기울일 수 있을 최소한도의 시간이나마 확보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누가 그런 시간을 줄 수 있을까요.일 주일에 한 번 씩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는 것으로,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런 기독교가 주류 기독교로 등장할 때,또다른 종류의 소외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요? 비의에 가득 찬 사람과,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중 공동체가 성립되는 것은 아닐까요?
시민들의 머릿속은 내면적인 것과는 완연히 다른,어쩌면 거의 대척 지점에 서 있는 가치들도 꽉 차 있습니다.사람들은 한국 기독교 특유의 기복신앙을 비난하지만,그 기형적인 기복신앙들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들은 그들 스스로 제공해 버린 것입니다.또한 우리는 매우 작은 존재들이며 두뇌를 움직이고 사유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이런 이들에게 '문자주의로서의 기독교'는 어쩌면 아주 안성맞춤인 양심의 도피처이자 마음의 면죄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그 내면을 떠나 사회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도 어려운 상황일 것입니다.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사회를 변혁하는 데에만 온 에너지를 집중하기도 어렵습니다.교회 역시 많이 분화되었고,우리 사회의 정치 세력 역시 그 분화가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물론 우리는 이것저것 다 해야 할 것입니다.인내천 사상의 그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가 초월주의자이면서도 철저히 현실론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다고 저는 생각하지만,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그리고 아마 이 모든 것은 교회,또는 한국 기독교,그리고 교인들의 정체성 자체와 상관이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저는 제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대답하기 어려워 합니다.이력서의 종교란에 기독교라는 세글자를 쓰기야 쓰겠지만,도대체 기독교인이 뭐냐고 물어볼 때 대답을 못 해 우물쭈물할 것입니다.기독교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이거 좀 너무 개념이 넓은 것 아닐까요? 착하게 산다..이건 굳이 종교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분류 가능할 카테고리가 아닙니까.
예수의 말들 역시 완전히 개성적이지 않습니다.예수 이전의 성현들,동서양의 고전들에도 예수가 했던 말들과 유사한 말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의 나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까? 설마 묵시록적인 예언들을 얘기하시리라곤 믿지 않습니다.천국 역시 무슨 지역적인 개념은 아니지 않습니까.천국은 김밥천국으로 충분하니까요.또한 천국은 네 마음 속에 있는 거야,라는 대답 역시 충분히 식상합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저는 그 날 밤 가지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시간도 없었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죠.물론 그 사이 해답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답장은 해 주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편지는 그냥 편지이니까요.그리고 신부님 말씀대로 질문하는 것이 바로 종교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대신 이 첫번째 편지의 마지막에 음악을 하나 덧붙일까 합니다.제가 생각하는 진짜 종교의 참모습을 표현하는 시어로 이루어진 노래입니다.
노래 제목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폴 사이먼과 제니퍼 홀리데이,그리고 루써 밴드로스가 1987년 폴 사이먼이 교회 하나를 몽땅 빌려 가스펠 싱어들을 죄다 소집했던 콘서트에 나와서 함께 불렀
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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