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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독립영화들 PART3 - 여고생의 힘2.- <똥파리> <반두비>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09. 6. 1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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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익준과 신동일의 독립영화 <똥파리>와 <단두비>에는 20세기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두 명의 여고생들이 등장한다.이 두 여고생은 예전 그들의 언니들처럼 엄친딸도 아니고 디즈니 만화의 공주들처럼 예쁘거나 착하거나 순종적이거나 얌전한 소녀들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성대를 강하게 울려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방 안에 틀어박혀 머리를 싸 쥐고 고민하는 대신,바깥 거리로 나가 행동한다.욕하고 소리지르며 엉터리 같은 세상에 발길질을 해댄다.이 두 사람이 우리나라 영화의 그리 길지 않은 여고생의 계보에,그저 이례적인 존재로만 존재하게 될런지 아니면 터프한 여고생들의 전범으로 사용하게 될런지,우리는 그 가능성과 미래를 아직 예측할 수 없다.그래서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렇게 인터넷 한 귀퉁이에나마 기록으로 남겨놓으려는 것이다.

 

똥파리

 

 

 

 

각본과 감독과 주연을 겸하고 있는 독립영화계의 알려진 배우 양익준의 강력한 욕설과 처절한 주먹질로 시작되어,대를 이어 진행되는 폭력의 양상과 서민층을 짓누르는 직접적인 폭력의 양식들을,사채업계와 양아치들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진 세계 내에서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똥파리>다.욕설과 폭력은 매우 구체적인 수준이며,기존의 메이저 영화들이 그러하듯 그런 욕설과 폭력들을 싱겁게 미화하지 않는다.양아치 세계의 양아치 생활 역시 연민이나 자기동일화를 관객들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양익준 감독 본인이 가지는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연민까지 사라져 있는 것은 아니다.그는 바로 자기 자신인 극중 주인공 상훈에게 끝없는 형벌을 부과하고 쉴새없는 자기 비하를 단행하며,급기야 예전의 자기자신이었던 고등학생 양아치의 칼에 찔려 죽는 것으로 최후의 자살을 단행한다.그리하여 아버지의 시절로부터 이어진 폭력의 순환고리가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들의 삶은 여전히 심상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은,어둡고 강렬한 영상언어에 담아 관객에게 전달한다.

 

 

 

 

폭력을 다루는 메이저 영화 특유의 말랑말랑한 교정작업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아니 그런 작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관객은 이질감과 낯설음 그리고 '리얼하다'는 감정을 함께 갖게 된다.그것이 개봉관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던 이 영화가 관객을 흡인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똥파리>는 사실상 어디서 많이 보았던 익숙한 정서적 구조를 가진 멜로드라마다.부모로 인한 상처의 대물림,방황하는 야수적 남성,죽음으로 결론지어지는 감정의 정리,배다른 누나와 아빠 없는 조카에 대한 애틋함,..이 영화의 정서는 어딘가 과거 우리나라의 멜로 영화와 닮은 데가 있다.특히 감정의 처리방식이 그렇다.그렇다,어쩌면 <똥파리>는 진부한 멜로 드라마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부함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굳건한 닻이 하나 있다.그것이 바로 배우 김꽃비가 연기하는 여고생 캐릭터이다.연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고생이,영화 <똥파리>에서 수행해야 할 작업은 상상 외로 많다.그녀는 고통을 마음에 지니고 있는 거친 양아치 상훈을 상대해야 하며 그의 상처를 보듬어야 하는 동시에,자신의 일그러진 일상과 가족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연희의 삶 역시,출구없는 답답함 그 자체이며 괴로운 몸부림으로 연희는 그 사막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과거 우리 영화 같으면,이런 역할에 결코 여고생을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적어도 20대 중반은 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캐릭터를 상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여고생은 너끈하게 자신과 자신의 친구인 양아치의 고통을 메운다.그녀는 영화가 자칫 멜로드라마의 함정에 빠지려 할 때마다,특유의 무표정과 깡다구,짐짓 보여지는 사려 깊은 언사를 통해 영화의 추락을 막아낸다.그녀의 표정 속엔,분노와 연민 성실함과 격렬함 달관과 미숙이 한 데 뒤엉켜 있으며,이로써 김꽃비가 연기하는 연희는,어린 여고생이자 주인공의 보조적 카운터 파트너 역할을 뛰어넘어 하나의 독립적인 지위를 쟁취해 낸다.

 

그래서 21세기의 여고생 김꽃비는 더 이상 남성들의 종속변수도 아니고 (과거 70년대 강주희가 그랬던 것처럼),80년대의 하이틴 스타들의 위상 따위는 우습게 쳐다보아 버린다.또 여고괴담의 언니들처럼 유령에 쫓기며 비명을 질러대는 것도 아니고,무엇보다 그녀에게 주어진 제도의 틀- 특히 학교 - 마저 눈빛 하나만으로 무시해 버린다.<똥파리>속 연희는 교실에 앉아있다가도 양아치 상훈의 전화를 받기라도 하면,교복 차림 그대로 학교 바깥으로 나가 외부에서 벌어지는 상훈의 삶에 동참한다.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그랬다가도,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로 복귀하곤 한다.

 

그녀에게 학교는 그녀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작은 동사무소에 지나지 않으며,학교 (담임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역시,김꽃비의 태도를 교정해 보려거나 폭력적으로 억압하지 않는다.학교는 이미 연희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다.철저하게 계급의식에 충실해야겠다는 듯,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행정기관으로서의 역할 만을 수행하고,그런 학교에 대해 우리의 여주인공이 딱히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21세기의 여고생 연희는 ,이제 성인의 문턱에 접근했으며 제도권으로부터의 자장에 무심하게 반응한다.

 

반두비

 

 

<반두비>의 여고생 민서는,김꽃비의 연희에서 한 두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조금은 삐딱하지만 정의감이 넘치는 여고생과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사이의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신동일 감독의 3번째 장편영화 <반두비>에서,핸드폰 광고에 출연했던 이력 밖에 없던 신인 여배우 백진희는,우리 영화사상 최초로 여고생의 강력한 반골기질을 보여 준다.

 

아니,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민서는 자신의 기질을 구체적인 행동과 말로 표현한다.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카림을 사랑하게 된 민서는 ,카림의 임금을 체불하는 악덕 사장의 저택에 곧장 쳐들어가서 사장의 멱살을 움켜쥐고 말한다.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신문지 뭉치를 보면서 말이다.

 

 - 이딴 신문을 보고 있으니까,니가 이렇지..

 

아마,그 신문은 조0,이나 동#나 중* 일보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 영화 전체의 정서가 그렇다.아이들을 학교에서 학원으로 수송하려는 봉고차엔 MB학원이라는 로고가 붙어 있고,원어민 영어강사의 수업에 대해서 얘길 나누는 학생들의 어깨 뒷쪽으로는 공정택의 교육감 선거 포스터가 보인다.원어민 강사는 ,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을 쥐박이라고 부르느냐고 묻고,한국여자들은 참 같이 자기  쉬운 상대라고 비아냥거린다.그런 선생의 성기를 강한 악력으로 움켜 잡고 꼼짝 못하게 하는 여고생이 또 우리의 주인공 민서다.

 

 

영등위는 여고생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매겼다.이미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 공개된 영화에 말이다.6월 25일이 개봉일이라 자세한 줄거리를 밝힐 수는 없으나,이 정부에 짜증난 사람들은 가서 쉬면서 웃으시기 바란다.(2008년 영진위의 자금으로 만든 영화다..ㅎㅎ)

 

다만 이 영화의 당당한 여주인공 여고생 민서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야기를 더 덧붙여야겠다.

 

 

민서 역시,<똥파리>의 연희처럼 학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행정기관으로 전락한 (그저 학생들을 일정기관 수용해서 상급교육기관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학교의 담임선생님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여기엔 약간의 사연이 있으며 영등위는 이런 장면들을 트집잡아서 고등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것을 금지시켰다),이미 결핍이 드러나는 가정 역시,민서를 압박하거나 강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연희가 영화의 상처를 몸으로 껴안는 성모마리아의 역할을 하느데 반해,민서는 좀 더 바깥의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그녀는 사회의 약자들과 연대하고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과감한 결단력과 앞뒤 재지 않는 무대뽀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다.과거의 소녀들처럼 ,순결의 외피로 치장되지도 않았으며,자신이 속한 사회의 근간이 바로 돈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그리고 때로는 비도덕적인 방법을 통해 금전을 조달한다.그녀는 결코 성처녀가 아닌 것이다.

 

또한 그녀는 욕설과 폭력을 사용할 줄 알며,자신을 가로막는 벽 앞에서 좌절하거나 버둥거리지도 않는다.이 글 속의 모든 다른 여고생들과는 달리,민서는 결국 학교라는 굴레를 박차고 나와서 일말의 후회도 없이 사회로 진입한다.가장 진화된 여고생 캐릭터인 것이다.무엇보다 '독립'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독립'적인 여성상에 근접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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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와 반두비

 

나는 이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보았다.반정부적 소품들이 군데군데 삐죽거리며 솟아 있는 이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은 ,GV( 감독과 주연배우가 등장하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 타임에 감독의 안위를 걱정하기까지 했다.(세상이 정말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난 이 영화를 보기 직전 박찬욱의 <박쥐>를 보았다.낯선 도시의 낯선 시민들과 함께 본 <박쥐>는 내게 그리 특별한 영화는 아니었다.그동안의 박찬욱이 이리저리 컬렉션되어진,유명가수들의 greatest hits 같은 영화라고 나는 생각했다.노출된 송강호의 성기 역시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못했다.관객들 역시 잠깐의 웅성거림만으로 그 잠깐의 장면을 응대했다.차라리 익숙한 것들의 재배열,소위 말해지는 uncanny한 방법으로 접근했음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솔직히 말하면 좀 안타까웠다.

 

20분 후에 보게 된 <반두비>와 <박쥐>는 거의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를 지닌 영화였다.

<박쥐>가 우리 관객 너머의 어떤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면,<반두비>는 철저하게 한국의 시민들과 거리를 겨냥한 영화였다.<박쥐>가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정밀하게 조합해 만든 점묘화라면,<반두비>는 대상을 확실하게 응시하는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였다.<박쥐>의 송강호와 김옥빈이 인간 내면의 깊고 기괴한 정서들을 변칙적이고 구부러진 회로들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면,<반두비>의 카림과 민서는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적 환경들에 정서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세상을 대하는 매우 다른 태도들을 보면서,그것에 대한 가차없는 가치판단을 내리기에는,나 역시 그 동안 보아 왔던 것,경험했던 것들이 너무 많다.그러나 굳이 한 편의 손을 올리라고 한다면 <반두비>쪽이다.그들의 에너지가 훨씬 역동적이고 또 젊은 것이다.

 

영등위,그리고 여고생

 

마지막으로 영등위,영상물 등급위원회인지 영화를 보는 등신들 위원회인지 하는 사람들,이 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내린 분들에 대해서도 짧은 말 몇 마디를 남겨야 한다.

 

여고생들이 그렇게 두렵나? 여고생들의 촛불에 3도 화상을 입은 상처들이 그렇게 아팠던가?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그 윗세대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 '금전사회'에 인질로 잡혀 있으므로,그래서 특히 대학생 세대들이 다 진압되었으므로,남은 건 여고생들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남학생들이야 한국아들적 책임의식과 '군대'라는 막장적 청소도구가 있으니 걱정도 안 될 테고.

 

그래도 그렇지,상영관 조차 제대로 확보 못 한 독립영화 하나 못 보게 막는단 말인가? 보수라도 좀 배짱있는 보수를 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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