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립영화
사실,나는 독립영화의 '독립'이 뭘 의미하는 지,정확히는 잘 모른다.특히 독립,인디..이런 단어에서 풍겨나오는,무언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그래서 어떤 자유가 보장된다는 의미,여기서 풍겨나오는 낭만적이고 한가한 냄새가 의식을 압도한다.어쩌면 이쪽 영화인들은 이름을 잘못 붙였는지도 모른다.현실이 이상하게 은폐되기 때문이다.물론 사전적으로는 자본과 배급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또한 그런 '독립'은 자본과 배급으로부터의 소외를 동시에 뜻할 것이다.영화 만들기에 마냥 편한 상황은 아니라는 소리다.그래서,언제 어디서나 '독립'의 댓가는 만만치 않은 것이다.
사실,영화의 배급을 좌우하는 자본은 일종의 완성품을 원하는데,여기서 '완성품'이 갖는 의미는 일종의 작품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구매력을 가진 대중의 구미에 적절하게 대응하는,그래서 온전한 의미의 자본력을 재창출해낼 수 있는 상품이다.그들은 일단 영화를 상품으로 상정한 후,'구매력'이라는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상품들은 유통의 경로에서 차단해 버린다.
이 와중에 사라지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적 상상력일 것이다.특히 비대중적인 상상력,예외적인 상상력들은 묻혀지고 사장된다.(박찬욱 쯤의 경력을 가져야 마음대로 상상하고 표현할 자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이 자꾸만 반복되고 관례화되다 보면,사회 전체의 상상력의 풀(POOL)이 줄어들게 되고,문화의 지형 역시 점점 협소해진다.공정화되고 자동화되어 가는 자본은 이런 과정을 당연시하게 되고,그러다보면 사회의 인문학적 깊이 마저 얕아져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문화적 가뭄이 도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영화들을 '독립' 영화라고 부를 때,그 '독립'은 만드는 사람의 자율성을 최대한도로 유지시킬 수 있는 동시에,그 자율성이 오히려 배급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암초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언설들은 매우 협소하고 또한 자극적이기까지 하다.문제의 본질이 꼭 자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그리고 관객에 대한 태도,그들을 너무 존중하거나 지나치게 폄하하는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관객 역시 영화의 알파와 오메가가 될 수 만은 없지만,어떤 영화작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그들이 단순히 멍청하고 세뇌당했고 꼭두각시처럼 조종되어지기만 하는 존재들인 것만은 아니다.관객은 사실 무서운 존재들인 것이다.
이상적인 영화들은 관객들의 위치 보다 약 두 걸음 반 정도 앞에 서 있다.그리고 끊임없이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는 체력과 성실성을 갖추어야 한다.그렇게는 못하겠다고,나는 내 위치와 보폭을 여전히 유지해야겠다고 강변하는 작가들이 있다면,그런 태도 역시 태도와 방편의 하나로 인정해주어야 하겠지만,대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강력한 일관성을 심장 깊숙한 곳에 장착하고 있어야 한다.근본적인 문제를 '소통'이라고 본다면,결국 그가 지켜낸 일관성 여부에 따라 관객은 그 영화작가의 미학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기덕과 홍상수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그들은 어느 순간,자신들의 세계로 걸어들어가 버렸고,그 세계의 일관성 속에서 일정한 부분의 자유를 획득하고 창작 작업을 지속해 왔다.나는 이들 역시 넓은 의미로는 독립영화인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그게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독립영화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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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독립영화의 르네상스,그리고 TV
누군가는 2009년을 독립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렀다.소수의 개봉관만을 확보한 독립 영화들이,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 이력과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독립영화로서는 놀랄 만한 흥행성적을 올린 것이다.만 명의 관객이 들어도 대단한 흥행성적이라고 치부되던 그 계통 영화들에게 어떤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기에,'르네상스' 같은 막강한 단어들을 독립영화계에 덧붙이게 된 것일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이 모든 일들은 매우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소위 메이저 영화들에 대한 관객들의 지겨움이 그렇게 표현된 것일런지도 모르고,또 그만큼 우리 관객들의 취향과 외연이 확장되었고 다양해졌는지도 모른다.또한 독립 영화쪽의 태도 역시 달라졌을 수 있다.좀 더 대중적이고 좀 더 시사적인 소재로의 접근이 이런 현상의 기초를 이루어냈을 수도 있다.
또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하나의 일회성 사건으로 ,말 그대로의 예외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채 그냥 그대로 묻혀져버리고 우리의 독립영화들은 예전부터의 소외와 배고픔으로 다시 돌아가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그러나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독립영화계의 2009년을 힐난하거나 폄하할 만한 근거는 아무 데에도 없다.
단,2009년에 관객의 주의를 끌었던 독립영화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사람들,그리고 영화제작에 돈을 대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종류의 주의를 스스로 환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그 대상은 텔레비젼이다.
최근의 우리나라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무의식적으로 TV를 경계한다.TV와는 뭔가 다른,대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요소들,거대한 스펙터클들,화려하고 복잡한 CG들, TV에서는 도저히 다룰 수없는 폭력과 섹스들을 다루고 또 보고 싶어 한다.TV와의 차별화를 위해서이다.
따라서 TV에서도 다룰 수 있는 정적인 소품들이나,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마음들을 다루는 심리극,평범한 일상사 위주의 드라마들,노인들이나 소외계층을 소재로 하는 사회극들은 당연하다는 듯 영화적 소재의 목록에서 사라진다. 이따금 예외적으로 아름다운 영화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도,또 그런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의 후속작이 잘 이어지지 않는 것도,다 그런 탓이다.영화의 자본들은, 이런 소재들은 TV에서도 충분히 다뤄질 수 있는 소재들이고,오히려 TV쪽이 더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TV드라마 조차 막장화되고 있다.소품과 정적인 드라마들은 이제 TV에서도 퇴출되고 있다.점점 강한 자극이 요구되는 시대에,이런 소재들은 소녀적인 감성이나 약자의 전유물처럼 취급되어 어두운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더구나 영화의 입장에서,자신의 진지를 지켜내기 위해 상대해야 할 상대방은 TV보다는 훨씬 더 괴물스러운 헐리웃이다.헐리웃은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막강한 재력&저력과 더불어,영화 외적인 법적 제도적 공략을 통해 시장을 잠식해 들어온다.
한편 관객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다분히 물량적이다.그들 또한, 어떤 '자극'을 통해서,자신이 극장 안에 들어가 스크린 앞에 앉아 있을 때까지 투자했던 소자본들을 모조리 회수할 수 있길 원한다.TV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상황'들을 굳이 극장까지 가서 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블록버스터적 감수성이 관객들의 두뇌를 미리부터 선점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관객과 영화계와 사회의 이런 상황이 현재의 지형을 형성하고 있으며,그 사이에 독립영화들과 메이저 제작사들에서 만들어진 작은 영화들이 섬처럼 드문드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이 당연시 되어져서는 곤란하다.현란한 액션과 정신없이 거대한 블록버스터들은,어쩐지 내게 이명박 시대의 건설경기 부양이나 대운하를 연상시키고,글로벌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략을 떠오르게 한다.영화가 점유할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공간을 더 확장하고,궁극적으로 '우리 영화'라는 것을 지켜내려면,다른 종류의 시선과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옆나라 일본만 해도 가끔씩은 조용한 흥행작들이 터져 나온다.좀 오래 되었지만 후루하타 야쓰오의 <철도원> 같은 영화들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독일의 도리스 되리가 만든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역시 노인들의 사랑과 죽음을 다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전혀 호들갑스럽지 않은,아주 차분하고 정적인 영화들 역시,헐리웃 블록버스터와 싸워 이길 수 있고 즐겁고도 편안한 시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그 어떤 사회,그 어떤 나라에서도 증명될 수 있다.
몇몇 우리나라 독립영화들이 거둔 가볍지만 무거운 대중적 성공은,바로 이런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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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몇 개 보고서,이렇게까지 수다를 떨다니 좀 심했다.사실은 2009년에 내가 보았던 몇몇 영화들에 대한 글을 써보려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다.머,지금이라도 시작한다.그 영화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워낭소리> <낮술> <반두비> <똥파리> <은하해방전선>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3.워낭소리
<워낭소리>는 하나의 정서로 접근하는 영화이다.사라져가고 있는 것,잊혀져가고 있는 것,퇴락해가고 있는 것,시대에 뒤떨어져가고 있는 것,그러면서도 고집스런 무언가,고향과 부모를 연상시키는 무언가,마음속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노스탤지아,발전과 개발로 대표되는 현사회에 저항하는 (그래서 평범한 도시인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무모한 전근대적 심성.
<워낭소리>는 이런 정서들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조합시켜서,뗄래야 뗄 수 없었던 어떤 소와 어떤 노인의 운명 안에 끼워넣는다.영화는 노골적으로,늙어가는 (또는 죽어가는) 노인과 소의 육체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그들의 비틀거리는 발걸음과 신음소리를 들려 준다.
할아버지는 연신 '아프다 아파'를 반복하고,소는 너무나도 힘겹게 할아버지를 태운 수레를 끌고서 오르막길을 올라 간다.소와 노인의 이러한 초상은,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그들의 부모 세대들이 겪었던 신산한 고생을 연상시켜서,경의를 표하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또 영화는 짐짓 냉혹하게도,어떻게 그 세대들이 뒷 세대로부터 밀려나고 경원시되어간다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데,주인공 소가 새로 들어온 소에 의해 계속 밀려나고,여물통 한구석으로 쫓겨나고,젊은 소의 뿔에 받혀서 상처가나서 피를 흘리는 모습들이,고집스럽게 기계를 사용한 농사법을 거부하고 재래식 '유기농' 농법을 고수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육체적 고통들과 연속적으로 맞물려서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미친소가 웬말이냐'며 수입소를 거부하는 농민단체의 시위는,할아버지의 일상사와는 거의 관련이 없으며 ,'이제는 소를 팔아버려야 한다'ㅡ는 추석 날 찾아온 자식들의 성화는,젊은 소에게 밀리는 늙은 소의 모습을 다음 장면에 보여주는 방법을 통해,'밀려나고 허물어져가는 ' 옛 세대를 상징한다
.
또 소를 팔기 위해 찾아간 우시장에서,노인에게 돌아오는 것은 경멸과 모멸 뿐이다.우시장의 사람들은 적어도 500만원은 받아야겠다는 노인에게 고작 60만원 만을 제시할 뿐이고,이런 '고물','폐품' 을 어떻게 팔려고 하느냐며,'고기까지 질길 거라'며, '다른 소까지 안팔린다'며 할아버지와 소를 싸잡아 조롱한다.할아버지의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흘러간 트로트 음악의 멜로디와 함께 줄창 '소값의 폭락'을 얘기하고,점점 늙은 소와 할아버지는 뒤꼍과 무대의 뒷편으로 사라져가는 존재로 전락해가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할아버지의 반응은 오직 하나의 일갈 -안 팔아!- 이다.이 안 팔아는 관객들에게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줌과 동시에,영화의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를 결정적으로 강화시킨다.노인은 이 시점부터 ,더 이상 소에게 과도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소가 끄는 수레에 올라타지도 않는다.그저 함께 걸을 뿐이다.(영화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소가 죽음에 이르기까지,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한 묶음이었다는 사실을 스크린 바깥의 관객들에게 말없이 증언할 뿐만 아니라,자신들의 수십년이야말로 관객들이 잊어버리고 있던 한 세대였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또 노쇠한 커다란 눈망울에 고인 소의 눈물은,이런 종류의 영화적 메세지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도구로 작동하는 것이다.
대학시절의 여름방학을 제외하고는,농촌과는 거의 인연이 없는 나로서는,처음부터 이 영화에 정서적으로 감응하기가 쉽지 않았다.심지어 처음엔 할아버지가 너무 심하게 소를 학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했다.그냥 새 일소 한 마리 사서,일평생 일한 늙은 소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며,혼자서 웃음짓기까지 했다.
그것은 아마 내가 뼛속까지 도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나와 먼 삶의 방식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그러나,나와 같은 심정을 품었을 관객들이 또 있었을 것이다.
내가 <워낭소리>를 보았던 극장은,영진위의 지원을 받는 예술영화 전용 상영극장이었는데,평소에는 2~30명 정도의 관객만이 옹기종기 모여 한기를 참아가며 (심지어 겨울엔 극장에서 담요까지 대여해 준다) 영화를 보던 그 극장에,그날만은 100명이 훌쩍 넘는 관객들이 '와글거리고 '있었다.반 이상이 가족 단위 관객들이었다.아빠와 아들,엄마와 딸이 곳곳에서 <워낭소리>를 보고 있었다.
난 혹시,저 딸과 아들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품지나 않았을까,하는 제멋대로의 상상을 했었다.이런 상상 - 소가 불쌍해,할아버지 너무해.. - 하는..
이런 세대의 차이,사는 환경의 차이에 대해서 영화는 오로지 '멜로'와 '감성'만으로 승부하는 것처럼 보였다.다른 방법이 없었을 수도 있으나,다큐멘터리적 방법을 쓰는 이 영화가,관객의 감정을 공략하는 또다른 지성적인 무기를 개발했었음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가졌었다.TV와의 차별은 또다른 방식으로 얻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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