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이 이미 시작한 지금, 2008년 영화에 대해 쓰려니 좀 이상하긴 하다.그러나 난 도대체 2009년이 2008년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심지어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분명한 사실에도 별 감흥이 없다.주위를 돌아보거나 신문 그리고 방송을 보아도 뭐가 달라졌다는 건지 ,아무런 새로운 기운도 느낄 수 없다.매일 매일 커 가는 은별이가 없다면 세월의 흐름 조차 깨닫지 못할 것이다.은별이가 쓰는 어휘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기 때문에,나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보면 내가 쓰는 이 2008년의 영화에 대한 글들도 어쩌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바보같은 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2008은 그냥 분류의 한 형식,길다랗게 이어오는 숫자의 한 배열에 불과할 것이다.2008년의 영화라고 특수할 것은 없다. 그저 어떤 일련의 영화들을 순서에 맞추어서 정리하는 것 뿐이다.사람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고 이름을 지어주듯 말이다.
그러나 21세기 초반 우리나라의 어떤 풍경들은 분명히 존재한다.그리고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반영할 수 밖에 없고,그 방법이 어떠하든 간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복사해낸다.영화 자신이 그런 반영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물론 2008년의 우리나라 영화들은 우리 사회가 처한 가장 치열한 현실들을 묘사하지 않았다.오히려 가장 우려스럽고 가장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대변했던 것은 텔레비젼의 시사 다큐 프로그램들이었다.영화는 이미 시사다큐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고,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행동한다.영화는 점점 엔터테인먼트의 세계로 빠져들어가고 있고,자본의 논리는 그 현상을 정당화하고,어떤 의미에서 보면 장려하고 북돋아주고 있다.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그저 돈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어떤 영화들은 조금은 다른 방법과 시각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조명한다.그들은 보이는 현실들을 피해가지 않고,또 그렇다고 목소리를 한껏 높이지도 않은 채,그들이 목격했던 광경들을 카메라로 기록한다.2008년에 내가 본 영화들 중,지금 얘기할 두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들이었다.
1.비스티 보이즈 -자멸의 한 풍경
윤종빈의 두번째 장편 연출작 <비스티 보이즈>는 강남 한복판을 무대로 삼아 유흥업계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의 일상과 파멸을 다루고 있다.이런 종류의 영화나 소설은 참 많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성의 체계에서 자멸하는 젊은 사람들의 얘기는 어쩌면 아주 단골로 사용되는 소재인지도 모른다.섹스 산업을 다루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감독 윤종빈의 센세이셔널했던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 역시 군대라는 닫힌 체계 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뤘었다.감독 스스로가 출연했었던 그 영화에서,그는 놀랄 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한 디테일을 가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뚝심있게 끌고 가는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주었었다.그랬던 그가 이번에 다룬 곳은 압구정동과 청담동으로 대표되는 강남의 밤 사회이며,역시나 그의 주인공들은 망가지고 파괴된다.
강남에서 파괴된 젊은 사람들을 다룬 영화는 그 전에도 꽤 있었다.1990년대의 강남 연작들,예를 들어 배창호의 <젊은 남자>,김영빈의 <비상구가 없다>,지금은 <쌍화점>으로 주가를 올리는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같은 영화들 역시 ,강남을 무대로 젊은이들의 어두운 이야기를 그려냈었다.이 15년 전의 영화들에 비해,윤종빈의 21세기 강남 영화는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같은 공간을 그려냈지만 시간적으로는 10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 양쪽의 영화들은 어떤 다른 점을 지니고 있을까..
배창호의 <젊은 남자>는,이정재와 신은경이라는 당시 X-세대의 대표자들을 출연시킨다.중성적인 매력과 더불어,남성들에게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을 과시하던 신은경이라는 당시의 잘 나가던 아이콘과, 훌륭하게 다듬어진 몸매로 다소 부족한 연기력을 쉼없이 커버하던 이정재를 가지고 배창호는 가진 것 없는 한 젊은이의 신분상승을 향한 꿈과 그리고 몰락을 다뤘었다.
위의 스틸 사진은 일급 패션모델을 향한 자신의 꿈을 방해하는 에이젼시 사장 김보연을 죽이고 난 이정재의 모습이다.그리고 ,,역시 그도 죽는다.그런데 이 영화의 이정재는 강남의 주류가 아니다.그는 변방의 비주류이며,주류에 합류하기 위해 그는 여자들과 자신의 섹스와 그리고 살인을 이용한다.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실패한다.
김영빈은 그의 <비상구가 없다>에서 압구정동의 오렌지족들을 연쇄살인하는 살인자 문성근과 그곳의 젊은이들인 박상민과 심혜진의 이야기를 다룬다.
(프란체스카적인 심혜진의 모습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한때 그녀가 코카콜라 광고로 혜성같이 등장했던 새로운 여성상의 한 아이콘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김영빈은 이 영화에서 압구정동을, 정제되지 않은 욕망의 한 표상으로서,또한 죽여없애도 좋을 만큼 증오스런 자본의 상징으로 묘사했다.연쇄살인자 문성근의 직업은 청소업자이자 방제업자로서 영화 내내 벌레 죽이는 약이 든 통을 걸머메고 다닌다.문성근 역시 압구정동 외부에 있으며,심혜진과 박상민 역시 압구정동의 클럽 어딘가에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지만,본질적으로는 강남 문화의 주 소비계층이 아니라,그 동네 언저리에서 맴도는 주변사람에 불과한 존재다.
유하의 데뷔작 역시 본질적으로는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 여배우 엄정화다.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엄정화의 모습이 아련하게 남아 있는 엄정화다)
<젊은 남자>의 이정재처럼 모델로 성공하고 싶은 엄정화는 '갖가지 '방법을 써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낸다.반면 8미리 단편영화를 찍으며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하는 홍학표는 강남의 '비순수성'에 넌더리를 내며 고향으로 돌아간다.한 사람은 강남시민의 일원이 되는 데에 성공하고 한 사람은 실패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 세 영화들은 모두 다,강남의 밤거리를 자본주의적 욕망의 집합체로 파악하고 그 곳에서의 도약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표상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그리고 본질적으로는 그 곳의 주민이 아닌 사람의 눈을 통해 보여 준다.강남은 비도덕적이며 맑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되며,심지어는 제거해버려도 될 어떤 것으로까지 격하된다.그리고 여기에 당시의 풍경들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비스티 보이즈>엔 이런 종류의 도덕적인 판단이 없다.윤종빈 역시 강남의 밤거리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김영빈처럼 연쇄살인자를 동원해서 쓸어버리려 하거나 유하처럼 자신의 주인공을 낙향시켜버리지는 않는다.그것은 우선 <비스티 보이즈>속 젊은이들인 윤계상이나 하정우나 윤진서가 자신들을 강남의 국외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그들은 그들의 선배들처럼 강남 바깥 쪽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강남의 밤거리 한복판에서 밤을 향유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살아나간다.그들은 굳이 강남을 증오하려 하지 않고,오히려 적극적으로 강남을 이용한다.그들은 강남의 하위 계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역시 강남의 주민들인 것이다.
여기엔 바로 강남이,이 짧은 최근 30년간의 한국 현대사에서 이미 '지존'의 자리를 획득해버렸다는 데에 그 까닭이 있다.강남의 돈과 강남의 자본은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망의 한 형태로 자리잡았고,겉으로는 거부하는 것 같지만 돈과 지위와 소비에서 자유로워지는 한국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그래서 윤종빈이 만들어낸 2008년의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인생에 의문부호를 던지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분투하고 몸부림을 쳐대는 것이다.그런 그들이 좌절하는 이유도 결국 돈 때문이다.
호스트바의 마담인 하정우는 끊임없이 돈 때문에 씨름한다.그는 돈 때문에 여자를 때리고 돈 때문에 여자를 배신하고 유혹한다.돈 때문에 비굴해지고 돈 때문에 사채업자에게 꼼짝도 못한다.그리고 종내에는 일본행을 선택한다.
하정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로부터 힘을 얻는 이 캐릭터는 사실상 이 영화의 대표적 인물인 것이다.그러나 그는 과거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강남의 돈 타워를 거부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적응한다.그의 사기행각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이며,그것은 그가 '돈'이라는 이 시기의 강남 질서를 온 몸에 체화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면 바로 '돈'이라는 주제로부터 파생된 내러티브가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일 것이다.관객들도 안다.돈이 질서이고 돈이 권력이라는 것을.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그 내용을 스크린을 통해서까지 보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그런 의미에서 <비스티 보이즈>는 지나치게 솔직하다.거짓말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저 사채업자와의 에피소드를 포함한 모든 돈에 대한 내용을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이다.우리는 이제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빨랑빨랑 윤진서의 벗은 몸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섹스 씬이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영화는 점점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마틴 스콜세지가 <택시 드라이버>에서 그러했듯,카메라의 눈은 강남의 밤거리를 천천히 핥아나간다.화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밝은 대낮에 벌어지는 장면 조차 불미스러움 그 자체다.작심한 듯 윤종빈은 이 스타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이고,그 밤 풍경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눈은 점차로 피곤해진다.그 피곤함은 일종의 착시현상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관객은 서서히 그 밤의 일부로 변화해간다.
시각적인 풍경 뿐만 아니라 그 밤거리의 풍속들을 묘사함에 있어서도,윤종빈은 결코 디테일을 도외시하지 않는다.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또 사람들의 몸짓 속에서 드러나는 그 솔직함은 이 영화의 풍경들에게 괜챦은 리얼리티라는 선물을 선사한다.심지어 그는 유흥업계 내부에도 일종의 계급이 있다고 얘기하기까지 한다.텐프로 룸살롱 아가씨와 안마시술소 종업원 사이의 심연을 그는 담담하게 뇌까린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섹스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이다.섹스와 술을 수입의 도구로 삼고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점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감독 역시 그들의 삶에 그 어떤 도덕적 잣대나 가치판단의 도구들을 들이대지 않는다.섹스와 술은 그들에게 그저 생활의 방편이고 도구이다.다른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는 것처럼,그들은 호스트 바와 안마시술소에 출근한다.그들은 그 점에 대해 특별히 괴로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는다.관객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태도 변화이다.<비스티 보이즈>의 영어제목은 moonlight of seoul이다.서울의 달빛?
90년대 초반의 문화방송 드라마 <서울의 달>이 생각난다.
그 드라마 속 주인공 한석규의 직업은 '제비'였다.저 오래된 스틸 사진은 한석규가 '땐스'를 배우는 장면이다.한석규 역시 신분상승의 욕망에 불타고 어떻게든 한 몫 잡아보려는 염원을 가진 사나이다.그는 일정부분 자신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되지만 채시라를 향한 순정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물론 공중파 방송의 드라마라는 한계가 있긴 했지만 한석규의 캐릭터는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결국 파멸에까지 이르는 그의 인생과정은 당시 한국 드라마 특유의 권선징악의 한 과정이다.그러면서 한석규가 자신의 성공방법으로 이용하는 섹스는 '나쁜' 방법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스티 보이즈>속 젊은이들의 자멸은 선악의 개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윤계상의 살인은 거의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그것은 그의 삶의 한 종막으로 다루어지고 어떤 조용한 과정의 일환인 것처럼 보인다.이 일상성은 그들의 직업- 섹스산업 종사자-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이제 그 직업들은 그렇게 눈살을 찌푸릴 일이 아닌 것이다.섹스산업 역시 대세가 된 것이다.
내 진료실에 찾아오는 호스트바의 관계자(?)들을 보아도 그렇다.거의 육개월 간격으로 차가 바뀌고 같은 기간에 시계가 바뀌는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이것도 노동의 댓가라고,또 자신 역시 자신의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프로페셔널이라고.그는 팔목에 둘러진 롤렉스 시계를 흔들며 내게 그렇게 강변했다.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섹스가 산업이 된 한 시대를 얘기하는 것이다.
<비스티 보이즈>의 감독 윤종빈은 이 모든 것들을 세심하게 기획된 디테일들을 가지고 연출해냈다.비록 갑작스런 치정 살인사건이 터져 나와,<젊은이의 양지>식의 결말이 선택되어 좀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건 어쩌면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가지는 관성적인 엔딩인지도 모른다.그러나 같은 자멸의 한 풍경이긴 하지만,윤계상의 그것과 이정재의 그것은 좀 다르다.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다르고,그들이 속한 거리에 대한 의식이 다르다.세월은 자멸 조차 이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당대의 풍속과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수준의 상찬을 필요로 하는 영화인 것이다...
영화 하나를 더 써야 하는데 지쳤다...ㅠ.ㅠ.미뤄야겠다.
2009년 겨울- 함께 본 영화 <적벽대전 > (0) | 2009.03.04 |
---|---|
2009년 겨울- 함께 본 영화. (0) | 2009.03.02 |
2008년 영화 네번째 키워드 <풍경> PART1 (0) | 2008.12.30 |
2008년 영화,세번째 키워드 <타임 스와핑> PART2 (0) | 2008.12.26 |
2008년 영화 세번째 키워드 <타임 스와핑> PART1 (0) | 2008.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