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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을 위한 변명.<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06. 11. 1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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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40년에 발표한 소설을 파라마운트가 자기네 영화사 설립 40주년 기념작으로 1943년에 제작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원제; For whom the bell tolls) > 가 오늘의 영화가 되겠다.감독은 샘 우드,게리 쿠퍼와 잉그릿드 버그만이 주연한 고색창연한 영화로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되겠다..

 



1.고색창연한 영화,옛 영화

고색창연한 영화라..그러나 어찌 보면 63년 전의 영화라고 해서,단순히 '오래된 영화'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영화 아닌 다른 예술에서의 '63년'은 그리 오래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다만 영화란 예술이 가지는 특유의 '현대성',속도와 효율로 대표되는 바로 그 현대성 때문에,그렇게 쉽사리 '오래된 영화'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옛 영화들은 우선 느리다.호흡은 길고 사건은 천천히 진행된다.배우들의 대사와 감정 교환은 서로의 정체를 탐색하듯,여러번에 걸쳐서,어쩌면 지루하다시피 느리게 진행해간다.연인들간의 사랑 대사는 닭살을 돋게 하기 일쑤이고,그들의 연정고백과 사랑의 성공은,요즘 영화
연인들의 스피드에 비하면 한없이 느려터져 있다.

요새 영화주인공들이 섹스에 성공하고,아이를 낳고,불륜에 빠지며 이혼까지 할 시간에야,옛날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겨우 손을 맞잡고 서로의 눈동자들을 응시하고 있다.젊은 관객들이 옛 영화들을 못 참아 하는 이유는,아마 그 '스피드'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영화는 고즈넉하고 침착하다.숨가쁜 위기의 순간에도 한껏 가라앉아 있어서 감정의 중심을 잃지 않으며,피국이든 해피 엔딩이든 한발짝 한발짝 결론을 향해서 나아간다.현대의 영원한 불확실성과는 결정적으로 상반되는,고전적인 발걸음들이다.

이 느릿느릿한 정서들을 나는 사랑한다.버그만과 쿠퍼의 애절한 눈빛 교환을 샤론 스톤과 마이클 더글러스가 흉내낼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얼마 전 본 영화 에서 사랑하는 사이로 나오는 리즈 위더스푼과 호아킨 피닉스는 바로 이러한 정서,육체가 아닌 정신적 정서의 교감을 연기하는데,그제서야  난 두 배우의 가치를 새로이 인정하게 되었다.

또 이런 옛날 영화들은 ,우리 윗 세대의 관객들을 상상하게끔 만든다.그들의 연애관과 그들의 정서,그들이 한숨지었을 극장의 좌석들,그리고 그들의 데이트 풍속들을 떠올리게 된다.한 시대의 영화 속 연애는,그 시대의 현실 속 연인들의 사랑 방법을 반영하니까 말이다.

사실 난 지금 내 부모님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분들은 어쩌면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영화광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님들의 1959년 사진이다.47년 전의 이대 앞이다.





2,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오래된 영화광.

1950년대 후반에 데이트를 시작하여,1960년대 후반에 결혼한 그 분들은,데이트 내내 그리고 결혼한 이후에도 언제나 극장 안에서 둘 만의 시간을 대부분 보내오신 분들이다.단성사의 옛모습에서 대한극장 명보극장,동시상영극장,자동차극장,멀티플렉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우리나라 극장의 변천사를 죄다 알고 있는 분들이다.

가끔 최근의 관객들을 비웃으실 때면 언제나 '무슨 송사리떼들도 아니고 뭘 이리저리 우우 하니 몰려다니느냐'고 말씀하시는데 돌이켜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황산벌> 이후 이준익 감독의 팬이 되셨는데,박찬욱의 영화를 보고는 '잘 난 척 하는 변태'같다고 일갈해서 나를 머쓱하게 하셨었다.봉준호의 일련의 영화에 관해서는 '참 똘똘한 놈인걸?' 이라고 한 마디 하셨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코멘트들 모두 일리 있는 것들로 생각되었다.

아버지가 더블 데이트를 하시다가 현장에서 들킨 곳도 극장 안이라고 했다.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커다란 머리통 하나'가 저 앞좌석에 보이더란다..ㅎㅎ스무 번도 넘게 들었을 그 이야기를 ,우리 남매들은 들을 때마다 박장대소한다.(아마 난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 같다.극장에서 들켰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이다.다만 똑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어렸을 적 집에서 기르던 개들의 이름도 헐리웃 배우의 이름이 붙여져 있곤 했다.이상하게 수컷들에게만 영화배우들의 이름을 갖다 붙이셨는데,대표적인 건 쿠퍼 (게리 쿠퍼) 와 몬티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애칭) 였다...

텔레비젼의 시대가 개막되고,고만고만한 나이의 자녀들 때문에 극장에 가시는 것이 점차 어렵게 되자,부모님의 영화는 텔레비젼의 '명화극장'과 '주말의 영화'로 옮겨 갔다.한 개의 방에서 다같이 잠을 자는 상황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영화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억지로 자라고 하면 더욱 더 잠들기 싫어했던 나와 누이 동생은 ,마치 잠든 척 이불을 뒤집어 쓰고서  그 작은 틈새로 텔레비젼의 영화들을 훔쳐보곤 했었다.컴컴한 방 안에서 회색빛으로 빛나는 브라운관의 광채는,동굴 같은 이불 속에서 볼 때에 더욱 더 마법적으로 비쳐졌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영화들은,줄거리보다는 장면 하나하나가 끊어진 필름의 한 토막처럼 가끔씩 단속적으로 떠오르는데,이젠 그 장면들이 그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포함된 것인지,아님 나중에 다 자라서 해당 영화들을 보고 난 후 각인된 것인지,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혹시 내 기억이 맞다면,오늘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연인 버그만을 억지로 떠나보내고 최후의 기관총을 발사하던 게리 쿠퍼의 장면들과,그 이후로 화면 가득히
울리는 조종을 클로즈업 하던 장면은,명화극장의 엔딩 시그널 장면이었을 것이다.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언젠가 어머님께,그동안 보아 왔던 영화들에 나왔던 가장 인상 깊은 대사를 꼽아보라고 말씀드렸을 때,어머니가 지목했던 영화도 바로 이 영화였다.거기에 나왔던 대사,I'll go with you wherever you go,자신의 죽음으로 연인을 탈출시키려는 게리 쿠퍼가,그를 혼자 놓아두고 갈 수 없다며 매달리는 버그먼에게 말하는 대사인데,이것이 내 어머니의 베스트 대사였던 것이다.

3.잉그릿드 버그만,그리고 첫 키스

사설이 길었다.영화로 돌아가자.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게리 쿠퍼가 연기하는 미국인 대학강사 로버트 죠단은 반파시스트 진영에 가담해서 전투를 치르는 폭파전문가다.스페인의 산악지방에서 집시 게릴라 부대와 힘을 합해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을 영화는 그리고 있는데,거기에 파시스트들에게 윤간당하고 머리까지 빡빡 깎인 19세의 야성적인 스페인 처녀 마리아 (잉그리드 버그만)와의
사랑이 곁들여져,전쟁영화라기 보다는 멜로 영화의 양상으로 영화는 흘러 간다.

그리고 보통의 좋은 영화가 그렇듯이 유니크한 조연배우들의 연기와 선 굵은 갈등들이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전개된다.집시 빨치산 부대의 여대장인 필라 역의 카티나 파시누는 거침없고 호방하며 솔직하면서도 의외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는 여걸을 연기하는데 ( 그놈의 여걸 식스가 여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다 ), 그녀의 존재가 이 영화의 또다른 중심을 잘 통제하고,혁명이나 전투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게릴라 보스 아킴 타미로프의 연기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다..이들은 그리스 출신의 연기자들이다.(아마 카티나가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을 것이다)

동굴 깊은 곳에서 갈등하는 집시와 조던의 모습을 교묘히 잡아내는 빛과 그림자는 옛날 영화 특유의 미학을 한껏 보여주며,전쟁영화 특유의 비인간성을 상쇄시켜 준다.

그러나 누구보다 돋보이는 사람은,가슴 깊은 곳에 지독한 상처자국들을 지녔지만,자신의 감정을 전혀 감출 줄 모르고 새롭게 다가온 사랑에 정말로 자연스럽고 과감하게 반응하는 스페인 처녀 마리아 역의 잉그릿드 버그만이다.영화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지성적인 여배우 중의 한 사람이었던 버그만은,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비할 수 없이 순수하게 전쟁 속의 열 아홉 살 처녀를 연기해 간다.

 

 



카메라는 항상 그녀의 얼굴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 하는데,그녀의 약간은 중성적이면서도 신비한 눈동자는,이 스웨덴 출신의 여배우가  당시 그녀 또래의 다른 헐리웃 여배우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웅변하는 것만 같다.

그녀의 입술 양 옆쪽으로 가늘게 잡혀지는 주름 하나 는 ,성형외과들에서 생산되는 여배우들의 기계적인 보조개 천 개 보다도 더 아름답다..

로베르토와 마리아가 만들어낸 극한상황에서의 사랑은 ,그들의 닭살스러운 대사들 마저 정당화시킨다.( 그런데 사실 정말로 닭살이다)

예를 들어 그들의 서로에 대한 호칭은 <나의 귀여운 토끼>와 <영국양반>이다.만약에 최민수와 손예진이 이런 대사를 주고 받았다고 생각해봐라.관객들,멀미한다.또 키스하는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며,키스할 때 두 사람의 돌출된 코가 부딪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던 마리아의 키스 전 대사나,

IF you do not love me,I love you enough for both 같은 마리아의 유행가 뺨치는 대사는 정말 닭살이다.그러나 그들이 처한 삶과 죽음의 양극단이라는 현실 때문에,이런 종류의 감정 표출들이 오히려 더 빛나고 아름다움을 더하게 한다.상황이 닭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키스할 때,코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운운하는 대사는 ,바로 내가 첫 키스할 때 써먹었던 대사이다.하마터면 분위기 다 깰 뻔 했지만,그날 난 그 시절의 그녀와 결국 키스했고 실제로 부딪쳤던 것은 코가 아니라 앞이빨들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곁길로 새는 것 같지만),사실 내가 처음으로 키스할 뻔 했던 상대는,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 다른 친구였다.대학 1학년 때 어둠침침한 까페에서 맥주를 앞에 놓고 갑자기 눈을 감고 있던 그 친구에게 입술이 다가갈려다 멈춰버린 거였다.

바로 그녀가 (맥주집의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여배우가 잉그릿드 버그만이었다.버그만의 코를 ,그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라고 말했었는데,그 때의 그 코에 대한 언급이,일 년 후의 또다른 코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지고,앞이빨들이 부딪치는 데에 까지 이르르고 말았다.하나의 키스 역시 전혀 우연적인 사건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닮은 여배우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인지,,아직도 잘 모르겠다) 

          

4.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뿐만이 아니다.수많은 영화인들이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그 전쟁을 다루어왔지만,특히 이 영화와는 어쩌면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영국의 좌파 감독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일 것이다.

샘 우드의 영화가 ,스페인 내전의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로맨스와 폭파시도에만 집중하는 반면에,켄 로티는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었을 스페인의 사회주의 혁명이 어째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느냐,하는 것을 정치적인 시각에서 조명한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원작 소설 역시,정치적인 시각들을 다분히 고의적으로 피해가지만,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기 <카탈루냐 찬가>는 마치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처럼 ,스페인 내전의 핵심인 '계급투쟁'을 정면으로 다룬다.거기에 비해 헤밍웨이는 로맨스와 동지애에만 소설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헤밍웨이와 우드의 영화는 1940년과 1943년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소설과 영화이다.그나마 좌파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50년대에 미국을 몰아쳤던 매카시즘이 아직 불어닥치기 한참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다.

물론 스페인 내전의 진상에는 <카탈루냐 찬가>와 <랜드 앤 프리덤> 쪽이 훨씬 더 가깝게 접근해 있다.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의 지원을 받는 국가주의자들,파시스트 프랑코를 수반으로  한 팔랑헤당,군부 토지소유자 자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진영에 맞선,프랑스와 멕시코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호전적 무정부주의자,사회주의자들로 이루어진 반 파시스트 진영의 다툼이 스페인 내전의 진실이다.

이 전쟁의 중요성,넓게 말하자면 자유와 억압의 전쟁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을 이 전쟁의 중요성에 공감한 세계 각지 4만명의 젊은이들이 '국제 여단'이란 이름 하에 파시스트 진영과의 전쟁에 동참했다.이런 정치적 로맨티즘은 이 전쟁 이후엔 어쩌면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 전쟁에서의 패배가 20세기 진보진영의 앞날을 결정했던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논란의 여지가 참 많겠지만 말이다.

한편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은 혁명의 실패를,당시에 진보적 자본가들과 사민주의 진영,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아나키스트들,그리고 맑시스트들의 연합정권인 '인민전선'의 분열과 리더쉽 부재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민전선 정부는 정권을 잡자 마자 혁명적 개혁에 착수하기는 커녕,정권의 안위를 위해 기득권층과 중소자본가 부르조아에게 아부하며 그들을 안심시키기에만 여념이 없었다.이런 수동적 태도가 혁명의 실패를 불러온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켄 로치의 입장이다.특히 스탈린 식의 인민전선이 어떤 종류의 참혹한 실패를 불러왔는지,켄 로치의 영화는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비단 사회주의 혁명 뿐만이 아니라,그 어떤 개혁에 있어서도,소위 '진보주의적 자본가'의 구미만을 생각하고 실제의 지지계층의 이해에 등을 돌리면 어떻게 된다,라는 것을 1930년대의 스페인 좌파는 그 처절한 학살극으로 실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 등을 돌리고 있는 오늘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걸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이치다..세월이 흐를 수록 이 영화는 대중의 눈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임에 틀림 없다.잉그리드 버그만의 그 빛나는 얼굴에도 말이다..안타깝다..

5,4만명의 국제여단

그러나 반 파시즘 전쟁에 참가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세계 각지의 4만명 청년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예를 들어,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이려 이라크로 떠나거나,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에 항의하여 총을 집어드는 청년들의 대열을 우린 이제 쉽게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물론 단순한 비교가 어렵다는 사실 만큼은 잘 알고 있지만,이런 종류의 정치적 로맨티시즘,자기 국가나 자기 자신의 안위가 아닌 세계 평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로맨티스트들이 '많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단 세계 평화 뿐만이 아니라,우리를 둘러싼 이슈나 국내정치에도 마찬가지다.이제 사람들은 그 어떤 폭압과 ,심지어 살인을 보더라도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많은 원인이 있겠지만,'국제 여단'류의 로맨티시즘이 사라져버린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자본의 힘은 개인개인을 이미 압살해가고 있다.먹고 사는 일의 압박은 그 모든 것을 능가해버린다.먹는 벌이를 확보하면,집 사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자기 집 장만'에의 꿈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낭만주의는 고작해야 길거리 노래방과 인터넷 위에서만 존재하고,그 단어는 점차 무능력자로 금치산자로 전락해간다.

6.386

한 때 정치적인 마케팅 용어로 등장했다가,이젠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나아가서 정치적 실패의 대명사로까지 격하될 것이 분명한 '386'이라는 단어에서,어쩌면 그 일원일지도
모르는 나는 마지막 로맨티스트 (정치적인) 의 자취를 찾는다.

그 세대는 승리의 기억을 가진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도 모르고 ( 그럼에도 계급의식 따위는 없었던 ) ,먹고사는 것의 압박에도 불구하고,또 그에 따른 필연적이고 급격한 보수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현재 여전히 로맨틱한 꿈을 잊지 않는 유일한 세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도,이들은 여전히 미력한 진보에의 꿈이나마 잊지 않을 것이고,늙은 반파시스트파가 되어서,거대한 억압의 흐름을 맞더라도 미약한 저항이라도 아끼지 않을 세대로 남을 것이다

이 세대가 지향했던 것은 그냥 '반억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어쩌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NL이니 PD니 하는 것들도,그들만의 리그에서 펼쳐졌던 공염불이자 과거의 로망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그 공허한 노트 위의 싸움 조차,자신이 어떤 계급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 조차 망각한 채 벌였던 싸움이었으므로 더욱 더 허망한 백일몽이 되고 말았다.이 세대에 유난히 변절의 악평이 쏟아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계급적 기반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던 그런 상황 말이다..

마치 1930년대 스페인의 '인민전선'이 정권을 잡고서도,자신의 지지계층의 계급적 이해애 충실하지 못하여 몰락하고 말았던 것처럼,386의 정권들도 그와 비슷한 수렁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예정된 패배인 것이다..

그러나 386세대와 386정치인들을 동일시하지는 말아 달라.이제 곧 386의 3자를 떼게 될 내 입장에서도 그런 동일시는 좀 억울하다.그 모든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는 보수적인 로맨티스트의 입장에 서 있고,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도덕성'을 무기로 정권에 참여했으면서도 그 '도덕성'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비난을,조선일보의 더러운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좀 억울하지만,이 '세대'와 '정치인'을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옳지 않아..

물론 변명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안다.

7.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오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첫 장면은 17세기 영국의 사제이자 종교시인인 죤 던의 싯구로 시작한다.

 

...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고립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대륙의 일부. 흙한덩이가 바닷가에서 씻겨나가는만큼 유럽대륙은 작아진다. 모래톱이 씻겨나가듯, 그대 친구나 그대의 영지가 줄어들 듯 누군가의 죽음은 나를 감소시킨다. 나는 인류와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니 조종이 울릴때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묻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나니...



그 누구의 죽음도 나의 소멸이려니..그것은 내가 인류의 한 사람으로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묻지 말아라.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는 가를..

뭐,이런 시인데,정확치는 않다.그러나 이 시는 단 한 사람 인류의 죽음도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물론 죤 던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런 말을 했다.그는 런던에서 흑사병을 앓아 누워있으며 병자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 이런 시를 썼다.헤밍웨이는 이 시를 전체 인류의 연대로 파악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아는 세대가 바로 지금은 우스워진 386세대다.1987년의 6월은 몇몇 학생의 죽음으로 촉발되었다.이 세대는 그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이 죽음의 종소리가 내 죽음을 위로하는 종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세대였다.그것이 동지애로 그리고 연대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제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주가에 일희일비하고 ,역시 오르락내리락하는 전셋값에 오만상을 찌푸리는 우리 세대,적당한 타락과 쥐꼬리만한 자본에 흥겨워하는 이 세대의 자화상에 대하여 ,세대 스스로도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그렇지 않았다면 2004년에 광화문을 향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나아가는 부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초라해지고 파편화 되어버린 이 386의 고막 속엔 아직 울리는 종소리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기억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음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8.Miscellaneous

ㄱ.네이버에 이 영화를 검색하면,느닷없이 성인인증을 요구받게 되었던 때가 있었다.우리의 
    위대한 네이버는 이 영화를 에로물로 분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ㄴ. 이 영화의 원제 For Whom the bell tolls 의 정확한 번역은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이다. toll이란 단어는 '죽음,장례식을 알리기 위하여 천천히 규칙적으로 울리다'
      라는 뜻의 단어이다.그냥 종은 울리다는 일본어판 제목의 오역이다.ring과 toll은 다르다

 ㄷ. 전쟁으로 인해 직접적 상처를 받은 스페인 처녀 마리아나,지금도 전쟁의 희생자가 되어
    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한반도에서의 국지전 정도는 불사할 수 있다는,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머리를 박박 깎아버리고 싶다.( 아주 온건한 표현이지 않은가?)

 ㄹ.로버트 죠단의 한 구절이다.
    ,- 근심이란,두려움과 똑같이 어리석은 일이다.그것은 다만 일을 더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ㅁ. 우리 아버지의 썰렁한 유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처자식을 위하여 종을 울리지.
         두부장수의 말씀..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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