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에 대한 글을 쓰고,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뒤로 가장 많은 항의를 받아보았다.뭐,여러가지 내용이었는데,박정희와 전두환부터 시작하여,내 성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모든 질문에 다 답 메일을 보내기는 힘들다.그래서 원래 쓰기로 했던 <거미여인의 키스>에 대한 후속 글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내게 화를 냈던 분들,양해 부탁드린다.
= =
나는 이 영화를 보며,여러가지 문제를 동시에 느꼈었다.그리고 그 제각각의 문제에 모두 다 의견을 말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첫번째 문제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였다.영화 속 두 주인공 마누엘과 발렌틴은 끊임없이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얘기한다.(물론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긴 하다) 특히 마누엘은 자신이 인생 내내 기다린 '진짜 남자'에 관해서
얘기한다.
나 역시 '진짜 남자'란 무엇일까,좀 더 나아가서 우리가 남성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혹시 그것은 관습이나
교육에 의해서 그저 만들어지는 망상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혹은 여성성이라는 반대 개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조차 없는 것이 아닐까,등등
갖가지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운운하는 형님뉴스의 개그맨이 생각나기도 했다
)
그러나 이 주제를 이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다루는 것은 그리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언젠가 그런 비슷한 주제를 다룬 것 같기도 했다.<말타의 매>에 대한 리뷰에서였다.찾아봐주시기
부탁드린다.
또한 아르헨티나를 위시한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적 현실과 이 영화의 상관관계를 다뤄보고 싶었으나,그건 좀 방대하고 능력
바깥의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거미여인의 키스>보다는 칠레의 문제를 다뤘던 <영혼의 집>의 리뷰를 쓸 때가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파트 2는 지리멸렬하게 끝날 수도 있게 되었다.다 미뤄버렸으니까.
그러나
마지막으로 동성애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영화 속 몰리나는 확실한 동성애자였고,결국 몰리나와 발렌틴은 어떤 한계상황 속에서 사랑에 빠지게 되니까
말이다.그 얘기는 하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할 듯 하다.그래서 PART 2.다시 시작!!
그러나 이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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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루거나 동성애자가 주연이나 조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생각보다 많다.우선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한 두
개가 아니다.
스티븐 프리어스의 파워풀한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풋풋한 모습이 인상깊다.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에이즈와 연계되었던 <필라델피아>,부산영화제에서 보고 충격먹었던 프랑소와 오종의
<타임 투 리브>
리버 피닉스를 아련하게 떠올리게 하는 <아이다호>,잊을 수 없는 장국영의
<해피 투게더>,그리고 <패왕별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신선하던 시절의 <토탈 이클립스>,또
<바운드>,<마담 버터플라이>,<결혼피로연>,<원초적 본능>,<커밍 아웃>,<새비지
나이트>,그리고 이혜영이 나왔던 <사방지>에 이르기까지 정말 한 두 개가 아니다.아마 읽는 분들의 머릿속에서도 수많은 다른
영화들이 명멸했을 것이다.
이 영화들에 그려진 동성애에 대해서 뭔가를 분류하고 진수를 뽑아낼 능력이 내게 있을까?오,이것 역시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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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이성애자인 내가 동성애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아직도 동성애자를 경원시하고 혐오하는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 ,그들에 대한 내 이야기가 뭔가 그들에게 상처가 되고 흠집이라도 내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책임질 수
있나?
그 정도의 조심성도 없이 글이랍시고 쓴다는 것이,적어도 내 양심에 만큼은 거리껴지는 게 아닐까? 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철면피인 것일까?
무엇보다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자신이 가진 여러 개념의 범주들과 살아온
경험과 소유하고 있는 정서의 총합이 근거가 된다.자신의 것들을 피할 방도는 없다.
경험과 정서는 차치하고 나서라도,개념이란 것 처럼
모호한 것은 없다.대부분의 개념은 100%
온전하게 혼자서만 존재하진 않는다.그것은 반대개념과 함께 존재한다.예를 들어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다.슬픔이란 개념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란 개념은 쉽게 정의된다.
또한 어떤 개념은 영역과 한계를 자동적으로 정의하려
노력한다.'정상'의 반대에 '비정상'이라는 개념이 있듯이 말이다.(물론 이 말에는 더 나아간 논의가 필요하다.태클은 '아직'
사절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서로의 영역과 한계를 구획하며 서로에게 배타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둘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존재할 때,그래서 가끔 비극을 낳는다.
그런데 정상과 비정상은 무조건적인 반대개념인 것일까? 초등학교 국어시간엔,비슷한말과 반대말을
가르친다.굳이 그런 식으로 하는 이유는 가르치고 싶은 단어를 쉽게 정의하여 아이들의 머리에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함일 것이다.지나치게 편의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호모섹슈얼리티를 정의하고 묘사하고 판단을 내릴 경우에 그들은 도대체 어떤 개념을 사용하는
것일까? 초등학교 시절의 비슷한말,반대말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것은 아닐까? 너무 양분화된 개념,양극화된 개념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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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메일을 보낸 어떤 분은 동성애를 '질병'이라고 정의했다.또 어떤 분은 ,미국의사협회에 의해 질병으로 정의되었던
동성애가 질병의 범주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언급하셨었다.역시 동성애를 질병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자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내가 오독했다면
지적해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는 특히 '학문의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하셨었는데,학문 자체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학문엔 '죽은 학문'과
'살아있는 학문'이 있는 것이다.물론 이 분의 주장이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그가 썼던 글의 표현 방식은 그런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이 분들이 동성애를 정의하며 사용한 개념이 바로 정상과 비정상,normal 과 abnormal
이다.
normal ; 정상,표준인,규격대로의 , 의학적으로는 자연상태인
abnormal ; 그 반대의 개념,당연히
비정상적인.
이 개념은 호모섹슈얼리티라는 '비정상'을 교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어떤 것으로 보는 입장으로 발전시킨다.육체적 정신적
정상성이 파괴된 어떤 상태로 보는 것이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질병'이라는 단어가 직결되고
말이다.
비정상 상태를 질병의 상태로 바로 치환시키는 관점도 문제가 있지만,우선 질병을 바라보는 개념에도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물론 의학교과서들은 '환자의 치료'를 위해 여러가지 guideline을 제시하지만,천만에,normal 과 abnormal 사이에는
subnormal 이라는 개념도 있다.( 교과서의 가이드라인에도 있다 )
아주 건강한 상태는 아니라도,그렇지만 강제적 치료나 격리가
필요하지는 않은 상태,subnormal 의 상태. (그렇다고 동성애가 subnormal 이라는 것은 아니다 ) 이 subnormal 을
무시해버리는 의사들은 결코 좋은 의사가 아니다.이 subnormal 의 상태를 그대로 지켜보면서 환자의 자가면역력을 통해서 공세적인
치료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환자가 치유되기를 원하는 의사도 있고,반대로 확실하게 공격적인 방법으로 subnormal 이 abnormal
화 되는 것을 미리부터 차단하려 하는 의사도 있다.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의사란 거의 없다.
한 순간의 판단착오가 자신을 찾아온
환자를 '전형적인 환자'로 만들 수도 있으며,'아직은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환자'란 단어가 가지는 심리적 효과가
막대하기 때문에,(하물며 질병이란 단어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 과정은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서양학문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서양의학이 abnormal 화된 개체를 교정하고 정상화시키는 데에 주력한다면,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동양의학은 비정상이 되기 이전에 미리부터
막아야한다는 입장이다.
얼핏 들으면 동양의학의 방법론이 훨씬 옳은 것 처럼 보이지만,동양의학의 이러한 축적된 전통은 이미 비정상이
되어버린 개체에 대해 의외의 취약성을 보이기 쉬운 것이며,반면 비록 서양의학이 치료의 효율성 쪽에서는 동양의학에 비해 우위를
자랑하겠지만,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객체들을 '격리'시키는 방식으로 치료의 과정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환자라는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결손이 항상
문제로 자리잡게 된다는 근본적인 결함을 보인다.양자가 서로 보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나 철학적 기본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쉽지 만은
않은 일이다.
이렇게 '질병'과 '환자'라는 문제는 너무나 민감한 것이며,기본적인 폭력성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의사들에게 고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
또 normal 과 abnormal 이라는 개념 역시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거대한 편차를 보인다.
얼마 전 동성간의 결혼식을 올린 영국 가수 엘튼 죤이 조용필이었다면
?
동성애를 즐겼다고 알려진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한국의 대학교수였다면?
<왕의 남자> 의 감우성과 이준기가 찐한 프렌치키스
장면을 영화 속에서 선보였다면?
아마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엘튼 죤의 동성결혼식이 영국 사회에서 일정 부분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그들 사회의 동성애자들의 숫자와 파워가 우리나라보다 강력해서가 아니다.그들 사회의 구성원들이 엘튼 죤을 바라보는 개념이
normal 과 abnormal 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그렇다면 어떤 개념일까?
usual ; 일상적인,통상적인,평소에도 볼 수
있는,과
unusual ; 비일상적인
,별난.
의
개념일까?
아니면
ordinary ; 보통의 ,평범한
etraordinary 의
개념일까.
뭐,이런 식의 개념들은 얼마든지 많다.regular 과 irregular , typical 과 atypical,
common 과 uncommon, 또 routine,conventional,customary,exceptional..등등 아주
많다.
결국 개념 따위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영국 사회에서 엘튼 죤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의 문제를 '사람의 문제','익숙치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문제'로 본 탓이다. 영국인들은 엘튼 죤을 격리시켜야 할 환자로 보지 않고 같은 동네에서 살아가도 될 이웃으로 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신 어떤 분이 제게,'너의 바로 옆 집에 게이 부부가
산다면'이랄지,'너의 아내가 갑자기 커밍아웃한다면'이랄지, '너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 뒤틀린 성정체성으로 괴로워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따위의
질문을 던진다면,그 분 참 가엾은 분이시다.질문은 유효한 상황에 맞춰서 던져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다.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도 의미가 있다.대답하자.지금 13개월 된 내 딸이 20년 후에 내게,'아빠,이상하게 난 여자친구에게만 끌려' 라고 하거나 ,25년 후에
'아빠,나 여자와 결혼할래' 했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문제를 양극단으로만 파악하는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선선히 예스라고
'대답해야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왜 ? 나는 동성애를 비정상이라고 보지도 않고 사회의 타자로 배제하지도 않으며,'사람'으로 보니까,금방 저
위에서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나 오,하나님,세상은 그렇게 단세포처럼만 굴러가지는 않는다.아빠가 딸의 그런 질문을 받자 마자
'선선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인간적인 일이다.정상적인 반응은 일단 놀라는 것이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후에 나는 우선 딸에게 이성에의 좋은
점을 역설하기 시작할 것이다.내가 이성애자라는 사실을 딸도 알고 있으므로 그런 나를 이해할 것이다.안타까운 애원이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설득과 권유는 협박과 강요와는다르다.나는 딸을 정신병자로 취급하거나 호르몬 검사를 받게 하거나 강제로 격리하지는 않을 것이다.다만 여전히
안타까울 것이다.
20년 후에는 어떨런지 모르겠지만,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동성애자의 문제는 다분히 majority (다수) 와
minority (소수) 의 대립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다수의 소수에 대한 혐오,그리고 이어지는 형편없는 배제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딸의 아빠로서 그 점이 안타까울 것이며,그 후의 나의 행동은 ( 예를 들어 동셩애 커뮤니티를 지지한달지 )뭐라고 자신할
수 없다.솔직한 말이다..
반면,만약 어느 날,아내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커밍아웃한다면,샤론 스톤 같은 미소를 지으면 내게 다가와
자신이 사귀고 있는 동성의 연인과 나와의 한 집안 동거를 요청하거나,그것도 아니라면 정중하게 결별을 요구한다면? ( 말도 안 되는 상상,하지
말라고 ?그렇게 자신있어 하지 마라.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삶이다 )
어떤 사람들은 또다시 예단할 것이다.딸에게
그랬듯이 아내에게도 관용을 베풀라고,설득과 권유 끝에 닥칠 상황을 인정하라고..오 갓,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부녀관계와 부부관계는 전혀 다른
것이다.부부관계엔,부녀관계엔 없는 섹스라는 개념이 따라 온다. (물론 섹스가 없는 부부들도 있다 )
아내의 제안을 수용하려면,나의
섹스관념이 변해야 한다.일부일처의 개념을 변경해야 하고,새로운 형태의 가족공동체를 인정해야 한다.경우에 따라선 프리섹스를 받아들여야 한다.그래도
그 다음엔 분명한 선택의 상황이 강요된다.
그리고 딸의 경우든 아내의 경우든,그들의 파트너에 대한 내 감정도 변수가 된다.파트너들이
아주 괜챦은 사람일 가능성과 아주 개차반 같은 사람일 가능성 등등이 변수의 하나로 또 제공된다.
이렇게 삶은 길고 커다란 대로가
아니다.자꾸만 옆가지로 갈라지는 미로이다.그래서 우린 숱한 선택의 상황을 마주 대하고 살아가게 된다.이런 상황들을 다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의 답안 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나는 진정한 의미의 인터넷 초딩들이라고 부른다.내 말이 그른가?
인간사이의 문제들 역시
기계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변수와 우연한 해답,폭소를 떠뜨리게 하는 함정이 곳곳에 숨어 있다.명랑하게,또 불행하지 않게 살려면
'중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완전한 아웃사이더나 고집스런 인사이더 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두 세계 사이를
슬라이딩하면 살아가는 사람이다.그들을 나는 아웃슬라이더 ( outslider ) 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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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이성애자인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마음을 여는 대목은 몰리나 역시 발렌틴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동성애적 성향을 제외한다면,몰리나 역시 발렌틴과 같은 이성애자들이 소유한 섬세한 배려와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어느
순간이다.또한 그의 '인간으로서의 실체' 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몰리나는 영화 말미에 발렌틴에게 그의 마지막 영화 얘기를
건넨다.
어느 먼 미지의 섬,언제나 길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거미여인의 이야기를,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미줄에 온 몸을 감긴
채 자신의 섬에 영원히 감금당한 거미여인의 이야기를,그 어떤 사랑을 만나도 거미줄의 반경을 벗어날 수 없는 여인의 이야기를..바로 자신의
이야기이다.
몰리나에게 있어서 거미줄은 자신의 호모섹슈얼리티이다. 가는 곳 어디에서도 천대받고 학대받는 동성애자들의 신세를 또한
거미줄은 은유한다.발렌틴은 몰리나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으며 드디어 그의 동성애적 성향까지를,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호모섹슈얼리티까지를
다 받아들인다.그 순간 발렌틴은 몰리나를 게이가 아닌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더 이상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도 없으며 배제시켜야
할 타자도 없는 것이다.이 인식의 전환이 두 사람을 희망없는 한계상황에서 구원하는 것이다.이제 그들은 더 이상 수인이 아니라,인간인
것이다.
몰리나가 발렌틴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은 더 늦게 오지만 더 강렬하다.가석방허가가 나서 교도소 문을 나서기
직전까지도,몰리나는 발렌틴의 지령성 부탁을 거절한다.두려움 때문이다.그러던 몰리나가 발렌틴을 위하여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는,이제
온정이 넘치고 따뜻한 애정으로 가득 찬 발렌틴이 몰리나가 가석방이 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말했던 당부 때문이다. 발렌틴은
말한다.
-- 한 가지 부탁이 있어.사람들이 더 이상 널 모욕하지 않도록 해 줘.
이 말은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있어서 더 이상 단순한 게이가 아니라는,몰리나가 게이이기 때문에 모욕당하고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발렌틴에게 있어서 몰리나는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것을,그러면서도 몰리나의 인간 자체를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몰리나는 생명을 거는 것이다.진짜 사랑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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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의 성적 경향은 의미가 없다.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무슨 액션을 취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우리는
'인간'을 그것도 'case by case' 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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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재미없기 때문에,한 가지 에피소드를 덧붙이고자 한다.
레지던트 시절,나는 환락가로 유명한 어떤 동네에서
일 년 정도 응급실 야간당직 아르바이트를 했었더랬다.그 당시 내 월급은 90만원 정도였는데,무슨 무슨 보증 때문에 월급의 반이 차압당하고 있어서
견딜 수가 없어진 지경이었더랬다.
매일매일 응급실엘 찾아와 갖은 소란을 다 피우는 깍뚜기 아저씨들과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친해졌던 어느 가을 날,자신의 손바닥에 스스로 대못을 박은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그는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흘리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4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핏물이 군데군데 튀긴 촌스런 정장 양복을 걸친
자그마한 체구의 그 환자는 응급실 침대에 버티고 앉아있기만 했다.
같이 온 사람들의 시끄럽고 당황스런 채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사코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통증이 심할텐데도 ,그는 입을 앙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흐르는 피가 응급실 바닥을 적셔가기
시작하고 의료진은 점점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있었다.그를 병원까지 끌고 온 여남은명의 여자들이 그에게 소리도 질러 보고 애원도 해 보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지만,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절규하기 시작했다.
- 은영이를 불러 줘!! ( 아마 은영이가 맞을
것이다 )
그는 통곡하고 소리지르고 병원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하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그렇지 않아도 잔뜩 술에 취한 그와 그의
소위 보호자들의 악다구니 속에 좁은 응급실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응급실에 누워있던 다른 환자들까지 나서서,그들을 제지하려는
통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갈 즈음,내 곁을 지나가던 중년의 아저씨가 최대한의 경멸을 담아 이죽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 미친 년들 .
순간 뭔가 이상한 직감에 챠트를 다시 뒤적거리고 나서야 나는 그 환자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동성간의 삼각관계가 부른 자해소동이었던 것이다.그제서야,나는 그냥 곱상한 중년 아저씨 같은 그 환자가
남장여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란에 튀어나온 방사선과 기사가 내게 소근거렸다.동성애자들은 동성애 파트너를 찾기가 심히 어렵기
때문에 저리도 절망하는 거라고..
그의 말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았겠으나,내겐 그 환자의 절망이 진정처럼
느껴졌었다.
누군들 사랑을 잃으면 저리 괴로와하지 않으리..
누구라도 자신의 목숨 같은 사랑을 잃는다면 손바닥에 대못을
박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불 같이 급한 성미를 가졌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각 속에는 단순히 '섹스'를
위해 섹스를 찾아헤매는 '짐승'들의 무리로 동성애자들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게 되었다.'미친 년들.'이란 아져씨의 비아냥에는 갖가지
복잡한 동성애자들에 대한 관념들이 한꺼번에 뭉뚱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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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커밍아웃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고,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도 활발하다.사회의 일반인식도 적지 않게
달라졌다.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야 한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이다.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이다.<거미여인의
키스> 속의 몰리나와 발렌틴의 영혼은 최후의 순간 깨끗해졌다.그것으로 다인 것이다.
미쉘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엔 일시적 일탈이었지만,이젠 하나의 인간형이 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묘사다.푸코는
동성애자다.그는 동성애에 관해,정상/비정상의 구분과,배제라는 것이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통찰했다.내게 그런 통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좀 지쳤는데,마지막으로 발렌틴과 몰리나는 아마 지금쯤 다시 만나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저런 언덕 위에 놓인 두 개의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아 있을 것이다..
선택.PART ONE. 늙어감.그리고 <천국을 향하여> (0) | 2006.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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