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는 친절해졌는가.
광주에서 진행되었던 가을의 공연과 영화 축제에서는 또 하나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있었다.그의 가장 최근 영화이며 올해의 부산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던 <cemetry of splendour> 가 그것이었다.아마 이번 가을에 부산에 갈 수 있었다면 분명히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올해 부산의 영화제엘 가지 않았다.동행하기로 했던 사람들의 약속 펑크와 영화를 예매해주기로 했던 사람의 부주의,거기에 이러저러한 사정이 겹쳐져서 올 가을의 부산은 내 삶에서 빠져버렸다.그러나 아마 올해 내가 부산 영화제에 갔더라면 나의 마지막 부산이 되었을 것이다.딱히 이유는 없다.(오랫동안 내 글을 보아오셨던 분들이라면 글 바깥에서 영위되어지는 내 삶의 과정이 그렇게 인과관계가 분명하기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실 것이다.^^)
나는 특별한 이유없이 올 해 가을을 영화에 관한 한 내 마지막 부산행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지난 20년간 내가 보았던 부산에서의 영화들에 관한 길고 느린 글들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러나 부산은 날아갔고 글도 날아갔고 자동적으로 마지막 부산 역시 날아갔다.삶은 정말..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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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metry of splendour >- 찬란함의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번역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냥 그대로 사용하겠다- 를 9월 광주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그렇게..얘기할 수 있겠다..
<찬란함의 무덤>은 그동안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들 중 가장 정리되어 있고 가장 서정적이며 가장 선적인 (linear) 인 내러티브를 가진,그래서 가장 친절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이런 얘기에 대해 약간의 항의와 이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다.아피찻퐁 특유의 시간 틈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그렇다고 매양 그렇듯 관객들을 당황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또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또한 태국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벗어나 독립영화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공간인 컨깬 (이 영화의 다른 제목은 <컨깬의 사랑 love in kon kaen> 을 무대로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과 공간의 미쟝센은 그 어느때 보다 아름다웠고 고즈넉했다.
슬픔과 웃음이 등장했고 한숨과 미소가 교차했다.부드러운 위로와 간절한 삶에의 염원이 영화 전반을 조용하게 흐르고 있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심정을 편안하게 했다.물론 아피찻퐁 월드의 특징은 고스란히 살아있었다.그러면서도 그의 정조는 시종 말랑말랑하고 어쩐지 슬퍼보이기까지 했다.어느 순간 나는 2011년에 던졌던 질문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친절해졌는가.
2.컨깬의 사랑
그러나 이 질문은 꽤 멍청한 질문이다.2011년 <엉클분미>에 대한 글을 쓸 때 던졌던 '그는 친절해졌는가'라는 이 질문은 사실 폐기되어 마땅한 질문이다.질문의 핀트가 영 맞지 않기 때문이고 질문에 대답할 사람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사실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하겠는가.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나 이젠 친절해졌어요'라고 대꾸하겠는가? 아니면 그의 최근 영화들을 보았던 사람이 '아 그 사람 이젠 친절해졌어요'라고 얘기했다고 해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가 친절한 영화가 되는 것이란 말인가? 뭔지 맞지 않는다.
물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영화를 만들며 관객의 반응과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단 관객에게 영합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볼 테면 보고 보기 싫음 보지 말라는 배짱으로 영화를 만들다는 말이 아니다.그는 그저 자신의 느낌과 자신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또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원리를 따라가기만 한다.또한 구구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필름에 옮길 뿐이다.거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거기에 무슨 친절과 불친절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반면 2014년의 깐느 영화제는 그들이 사랑했던 영화작가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작품을 경쟁 부문에서 제외시켰다.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작가의 작품을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다.그러나 이 결정은 어딘가 이해 가능한 측면이 있다.깐느가 아피찻퐁의 신작 <찬란함의 무덤>에 새로운 어떤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열병의 방>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그간의 작품들의 총합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처럼 ,<찬란함의 무덤> 역시 동어반복이라는 느낌을 주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세계관이,또 세계가 그에게 주는 감흥이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역시 영화를 흐르는 정조다.<찬란함의 무덤>에는 부드러운 안타까움이 있다.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으며 공간에 대한 향수 어린 추억이 있다.그것은,이 영화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태국에서,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공간 컨깬에서 만드는 마지막 영화이기 때문이다.그는 몇몇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고 따라서 <찬란함의 무덤>은 - 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알 수는 없으므로 - 그의 타일랜드 시절을 마감하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그래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이 영화에 <컨깬의 사랑> 이라는 또다른 제목을 붙였다.그는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는 것이다.또 그래서 이 영화는 매우 정치적인 영화가 되고 마는 것이고 말이다.
3.잠,질병,병사.
영화는 잠자는 병사들과 함께 시작된다.무대는 컨깬이며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에 의해 수면 상태에 빠져 있고,학교를 임시개조한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잠,질병,병사..무언가의 메타포로서 기능할 만한 제재들이다.단 병사들이 언제나 잠 속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그들은 가끔 깬다!! .깨서 밥을 먹고 일어나 걸어다니기도 한다.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기도 한다.그러다가도 갑자기 수면상태에 빠져버린다.침상에서 밥을 먹다가도,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가도,그들은 갑자기 잠 속으로 침몰한다.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가도 이렇게 갑자기 잠에 빠진다...)
마치 몸 속에서 각성 상태를 담당하는 중추들이 일시에 기능을 잃고 마비 상태에 빠져버리기라고 한 듯,그들은 어느 순간 몸을 가누지 못한다.또한 이 병사들은 전시상태의 병사들이 아니다.병영에 주둔하고 있는 모습이나 전투를 암시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영화는 초반에 잠깐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는 군복 차림의 젊은 남자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그 노동하던 병사들이 쓰러진 병사들과 일치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잠에 빠진 병사들은 전시가 아닌 평화시의 병사들이다.그들의 질병이 전쟁이나 살육,또는 거기에 수반되었을 폭력에 대한 징벌은 분명히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상황을 늘어놓고,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이야기의 축이 될 만한 캐릭터 하나를 등장시킨다.그의 단골 여배우 제니이라 퐁파스 (단 <찬란함의 무덤>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여배우의 이름 끝에 widner라는 또다른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그녀는 아마 결혼했나 보다) .그녀는 수면병에 빠진 병사들 중 가족이 없는 병사들을 간병하는 자원봉사자로서 영화에 등장한다.
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그녀가 간병하는 병사 (<열대병>에서 게이 병사로 출연했던 Rob Romnoi가 오래간만에 등장한다) 가 깨어났을 때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그가 잠들었을 때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 쓰여진 그의 수첩을 읽기도 하고,종내에는 다른 세계에 위치한 그와 교류하기도 하는 등,모자관계 같은 사이를 이어나간다.
잠,질병,병사,기면상태..여전히 이 영화의 초반 설정은 이례적이다.
이 병의 정체는 무엇인가.그들을 잠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그런데 아피찻퐁은 달라졌다.옛날 같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뒷 이야기로 훌쩍 넘어갔을 그가,이번엔 이야기와 설득의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그는 좀 더 설명적인 캐릭터들과 에피소드들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진행시켜 간다.어쩌면 그가 사랑하는 땅 컨깬에 대해 바치는 마지막 이야기여서 그러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깐느는 그의 친절함을 외면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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