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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영화에는 호텔이 있다 1.-<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4. 12. 1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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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하나의 완벽한 세계이고 완성을 추구하는 우주다.호텔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운영되는 하나의 생물체처럼 존재하는 특이한 건축물의 일종이다.호텔의 안쪽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호텔은 집이며 식당이며 휴식의 장소이며 여흥의 장소이며 모임의 장소이고 심지어 비즈니스와 관련된 일들까지 모두 다 처리할 수 있다.세계이자 우주인 호텔에는 당연히 계급이 있다.별 1개 짜리로부터 별 5개 짜리 호텔에 이르기까지 호텔은 투숙객들을 경제적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 받아들이며,투숙객들은 그들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는다.호텔 객실도 그렇게 나뉜다.방에도 계급이 있는 것이다.방들은 그 클래스에 따라 구조도 다르고 편의 시설의 종류도 다르다.호텔은 평범하면서도 이상한 곳이다.

 

 호텔은 미스테리의 장소다.호텔을 찾아간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낯선 사람들이다.호텔의 구조를  미리 알고 찾아가는 사람도 드물다.투숙객들은 호텔 내부의 지리를 알기 위해 호텔 측에서 비치해 놓은 책자를 읽어야 한다.호텔의 방들은 마치 감옥의 방들처럼 구획되어 있고 모든 방들은 그 안에 든 사람들의 비밀과 사생활을 보장한다.즉 익명성을 보장한다.아무리 체크인 할 때 자신의 이름을 프런트에 적어놓는다 해도 투숙객들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적어놓은 글씨는 그저 이름일 뿐이다.위조,거짓 예약,가명쓰기 모두 다 가능하다.아무도 서로를 제대로 알 수 없다.301호 투숙객은 302호 투숙객을 모른다.설령 옆 방에 잠든 사람이 연쇄살인범이거나 거물급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온전한 정체를 알 수 없다.호텔 역시 그들의 투숙객에게 서로의 정체를 알려줄 수 없다.더구나 호텔은 그 익명성이 생명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존재의 근거를 흔드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호텔은 그렇게 비밀과 익명성의 장소이다.그래서 가장 영화적인 장소가 될 수 있다.수많은 영화들이 호텔을 영화 속 공간으로 설정하는 이유도,호텔이 가지고 있는 그 비밀스러움,그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과 탄력 때문이다.게다가 호텔 공간은 언제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미쟝센적인 가능성을 부여한다.영화 작가들은 언제든지 호텔을 다시 짓고 다시 꾸밀 수 있다.우리의 세계 속에 수많은 다양한 호텔이 존재하듯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다양한 호텔을 마음대로 재현할 수 있다.에드워드 호퍼 식의 외로운 호텔로부터 두바이의 거대하고 화려한 호텔까지 호텔의 공간적 탄력성은 거의 무한대이다.그래서 호텔은 그 어떤 영화 쟝르든 마음대로 소화할 수 있다.호러 영화든 사랑에 관한 영화든 액션 영화든 스릴러 영화든 호텔은 모든 쟝르 영화들의 경연장이다.그래서 영화에게 호텔은 매우 매력적인 장소다.영화를 다루는 인터넷 사이트에 호텔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라.수많은 영화의 이름들이 줄줄이 달려나올 것이다.<그랜드 호텔>에서 <북 호텔>,그리고 ㅡ<밀리언 달러 호텔>에 이르기까지,'호텔'이란 공간 하나만 가지고서도 영화에 관한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호텔은 대부분 지나가는 자들의 공간이다.장기 투숙객들은 흔하지 않다.사람들은 호텔을 스쳐가고 그 안에서 불규칙하게 조우한다.여행이든 비즈니스이든 그들은 자신들 고유의 공간을 떠나온 상태다.존재를 고정시켰던 평소의 압박감은 확실히 느슨해진 상태이며, 그러므로 호텔에 도착한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의 폭발성은 더욱 강력해진다.호텔 안의 시간은 호텔 밖의 시간과 동일한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호텔의 공기 속엔 마치 카지노의 공기처럼 미량의 흥분제가 섞여 있고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심장박동수를 증가시킨다.집이 아니라,직장이 아니라,내가 매일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낯선 곳,본질적인 미지의 장소이기 때문이다.이런 장소를 영화가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2014년의 영화 속에서도 호텔은 어김없이 등장했다.웨스 앤더슨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만들었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메콩 호텔>을 제작했다.이 두 영화는 호텔을 소재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제목에도 집어넣었다.호텔이 등장했던 2014년의 영화는 그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지아쟝커의 <천주정>에서 홍콩의 관광객들은 중국의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성접대를 받는다.<아메리칸 허슬>에서의 호텔은 뇌물이 왔다 갔다 하는 함정의 장소였다.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 <바람이 분다>에서 주인공이 방문했던 호텔은 전쟁 직전의 독일 호텔이었고 <필로미나의 기적>의 스코틀랜드(아니,아일랜드였나?) 할머니는 미국 워싱턴 D.C.의 호텔에 묵는다.우리는 2014년의 영화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호텔을 보았던 것이다.

 

그 중 두 호텔 -영화 제목에 호텔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을 얘기할까 한다.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콩 호텔>.이 두 영화는 올해 내가 본 가장 좋은 영화들 중 하나다..

 

1.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눈의 앞,그리고 눈의 뒷쪽의 즐거움.

 

이 글을 시작하면서 호텔을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라고 얘기했었다.그런데 웨스 앤더슨은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인 호텔이라는 소재를 통해 또 하나의 세계이자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냈다.그리고 그 세계는 감각의 향연이자 신나는 얘기들의 놀이터이다.이 영화의 호텔은 그 세계로 진입하는 출구이며 그 세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단초다.관객이 웨스 앤더슨의 호텔 안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는 자신의 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바로 그 호텔처럼 말이다)

 

 

 

동유럽에 위치해 있는 걸로 설정된 가상의 국가,어느 산 중턱에 옛시절-그러니까 가장 좋았던 시절-의 성처럼 위치한 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며 관객은 저절로 환상적인 여행길에 접어드는 것이다.

 

 그 여행과 그 세계의 가장 두드러진 포인트는 시각적 쾌감이다.예쁘면서도 정교한 건축물들은 작은 디테일들에 조차 서양의 건축사 전체가 살아 있다.조그만 문양 마저도 세심하게 신경쓴 웨스 앤더슨의 세계는 그로써 진짜 그렇게 섬세한 세계가 있다는 실재감을 준다.기하학적인 대칭으로 매칭된 구도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에 어떤 시절과 어떤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데,그곳과 그때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안의 한적함과 풍부함,그리고 시간대를 잃고 무언가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그렇게 이 영화의 다른 세계로의 진입은 빠르고  상쾌하며 관객의 시각적 즐거움을 공략하며 이루어진다.

 

 

 

그러나 앤더슨은 영화의 시작부터  이 세계가 이야기 안에 있는 이야기-그러니까 픽션일 수 있다는- 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영화가 시작하면 어떤 작가의 동상 앞에서 책을 들고 있는 소녀가 있고,그 책의 작가가 바로 그 동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관객들은 알게 된다.그리고 세월이 또 과거로 흘러 그 작가가 집에서 인터뷰를 시작하고,그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로 진행된다.액자 안의 또다른 액자,또 그 안에 또다른 상자가 들어있는 것이다.즉 이 영화는 이야기-허구이다.그러면서도 그 이야기 속 모든 디테일들이 소름끼칠 정도로 미학적으로 장치되어 있는 탓에 관객은 환상 속에서도 실재감을 느끼게 된다.(실재감이 없는 환상은 공허함과 슬픈 뒷끝을 남긴다.가장 우수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모든 예술가들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리얼리티를 심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환상은 다분히 동화적이고  따뜻하다.원색의 컬러들이 줄을 잇고 감각-시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을 다 포함하는- 을 자극하는 소재들이 관객들에게 저절로 미소를 선사한다.공기를 바꾸는 향수가 있고 입에 군침을 돌게 하는 수제 케이크가 있다.눈 뒷쪽에 온기를 선사하는 색깔의 향연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서 칙칙한 흑백의 캔자스에 머물던 도로시가 먼치킨 랜드에 도착하자 마자 바뀌는 컬러 영화의 세계처럼 관객의 두 눈을 환하게 한다.가령 이런 핑크.

 

 

 

 

 적들의 추격을 당해 위기의 순간을 맞은 두 연인 시얼샤 로넌과 토니 레볼로리가 호텔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다음 장면이다.그들은 케이크 트럭 안으로 떨어져서 목숨을 건지는데,그 트럭의 적재함 안에는 핑크빛 케잌 상자들이 가득하다.순간  세상이 확 변하는 것이다.생명의 위기가 로맨스의 한 순간으로,칙칙하기 이를 데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꿈 속 동화의 세계로.이런 종류의 두 세계 사이를 줄곧 진자운동하면서 웨스 앤더슨의 세계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것은 우선은 시각적 쾌락,그 다음은 위로와 꿈이다.우리의 마음 속에도 저런 원색의 아름다운 미각적 세계가 있었고 우리의 세계 속에도 정말로 좋았던 어떤 때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넌지시 우리에게  알려준다.말이 아닌 이미지를 통해 말이다.

 

모든 색깔이 다 로맨틱한 것은 아니다.어떤 레드와 바이올렛은 불안과 패닉과 폐쇄감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틸다 스윈튼이라고는 도무지 여겨지지 않는 노부호 마담 D가 불안에 떨며 이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프에게 안겨 있는 장면이다.저 곳은 호텔의 엘리베이터 안이다.붉은 색깔의 엘리베이터 내부가 호텔 직원들의 바이올렛 컬러의 제복과 어울리며 마담 D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설명해 준다.호텔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죽게 될 것이라는 그녀의 예감,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위로하려는 레이프 파인즈의 마음,그리고 뒷쪽에 사무적으로 서 있는 로비 보이들의 모습이 좁은 공간 속 미쟝센을 통해 적절하게 묘사된다.

 

이런 예들은 얼마든지 있다.이 영화는 이런 식으로 우리의 두 눈을 즐겁게 해 준다.영화의 본질적이고 본래적인 기능,관객의 눈을 공략하는 전략을 이 영화는 충실하고 환상적으로 수행한다.

 

시각적인 쾌락만 있는 것이 아니다.이 영화의 내러티브 속엔 모든 영화 쟝르들이 한꺼번에 녹아들어가 있다.마담 D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릴러,레이프 파인즈와 토니 레볼로리를 쫓는 윌렘 데포의 추격전,인디애나 존스를 방불케하는 스피디한  눈밭에서의 레이스,수감된 구스타프와 그의 동료들이 벌이는 탈옥극,토니 레볼로리가 연기하는 로비 보이 제로와 시얼샤 로넌 사이의 로맨스,때로는 잔혹한 장면,때로는 슬랩스틱 개그까지,이 영화는 영화가 구사할 수 있는 무기들을 모두 동원한다.그리고 그 무기들은 적절하게 매칭되고 연합되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최고의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러닝 타임 내내 말이다.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있다.수십 명의 명배우들이 신 스틸러로 동원되어 거의 배우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이 영화에서 그냥 허투루 넘길 만한 인물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포스터를 보면 이 영화에 등장한 화려한 배우들의 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들은 모두 다 한가락씩 하며 자기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낸다.

 

 

 

물론 그 중 최고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구스타프를 연기하는 레이프 파인즈다.그는 최근의 영화에서 묘사된 캐릭터들 중 가장 이색적인 로맨티시즘과 낭만성으로 무장한  사람이다.적당히 속물적이면서도 또 적당히 로맨틱한 사람,싯구를 읊어대며 직원들을 향해 설교를 하다가도 금발 여성들을 보기만 하면 바로 작업에 들어가는 사람,자신의 부하 직원을 위하여 나치를 연상케 하는 파시스트 군인들에게도 겁 없이 덤벼드는 사람,탈옥의 와중에서도 자신이 애용하는 향수를 챙겨오지 않았다며 화를 내다가 결국 그 향수 냄새 때문에 추격을 허용하는 복잡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정의로우면서도 시적인 인물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속 인물들을 대표한다.한 마디로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문제의 그 향수다...)

 

구스타프가 대표하는 것은 어쩌면 유럽이 가장 살 만한 시절이었던 한 때,전쟁 전 예술과 시와 매너와 로맨스가 사회의 주역이었던 한 때,그림과 아름다운 건물들과 오염되지 않은 눈 덮인 산들이 사람들의 지근거리에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한 때이다.구스타프는 그 좋았던 옛날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지 않고 죽지만 영화는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그리고 그의 이른 죽음은 관객의 영화에 대한 좋았던 감정과 환상을 곱게 보존한다.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안타까움과 안심,노스탤지어와 뿌듯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이 영화와 이 영화에서 그려진 호텔에 더 이상 붙일 말은 없다.모든 영화가 인간 내면의 심부와 사회와 삶의 이면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어떤 영화는 감각적 쾌락에 복무한다.그래서 영화는 꿈의 공장으로서의 순기능을 갖는다.영화는 관객에게 기꺼이 환상을 부여하고 관객은 영화를 통해 환상 속에 미소를 선사받는 계약을 맺는다.<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2014년 영화들 중 그런 계약의 가장 좋았던 예를 보여주었다.그 계약이 체결되었던 장소는 화려하면서도 공허한 미적인 호텔 로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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