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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s & Bones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3.

신의 영화들

by 폴사이먼 2010. 7. 2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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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Hearts

 

예수의 정신과 내면 역시 지속적인 '과정'을 겪는다.그의 종교적인 내면과 정치적인 입장은 그의 삶의 변화가 고비들을 지나칠 때마다 변하고 또 변해 십자가 위로 달려간다.

 

#1.예수가 육체적 고통-두통과 발작-을 겪으며,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일 -십자가 형틀 만들기-을 계속하는 것은,그 내면에 이유가 있다.그는 그의 신에게 복수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아직 자신이 메시아라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자신이 겪는 고통이 신과 메시아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메시아를 처단하는 처형도구를 제작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복수를 대신한다.그러나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

 

#2.구도의 길을 위해 출가하면서도 그의 혼란은 여전하다.특히 그는 막달라 마리아를 향한 욕망과 애증 그리고 죄의식이라는 복잡한 심경 속에 휘둘리고 있는데,죄의식 보다는 욕망 쪽이 더 강한 무게감을 갖고 있다.그의 내면은 이렇게 끝없는 다면성으로 얼룩져있는데,하나의 유혹에서 승리하면 이어오는 또 하나의 유혹으로 좌절하는 그의 여정 패턴은,신 보다는 인간의 그것과 더 닮아있다.그리고 그 모든 유혹들의 씨앗은 최후의 유혹으로 향해 있다.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의 유곽에서 그가 겪는 일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그저 무승부 (no desicion game)이다.

 

;스콜세지는 시대 고증에도 엄청 신경을 썼는데 꼭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모로코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공간 자체의 싸움에서는 승리했을지도 모르지만,개개의 배우들을 2000년 전으로 돌이키는 것에는 실패했다.고작해야 귀걸이와 문신으로 캐릭터들의 외양을 처리했다.

 

#3.이 욕망의 근본적으로 엉킨 양상은 당연히 예수의 자기인식에도 영향을 준다.그는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갖지 않는다.사막의 수도원에서 만난 수도사에게 예수는,자신이 죄인이자 위선자이며 -물론 십자가를 만들었던 그의 과거행적과 연관이 있는 말이긴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분명치 않다고 말한다.자신은 오직 두려움 때문에 타락하지 않았으며 -그의 육체는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를 원하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읽혀진다- 자신의 속엔 하나님 뿐만 아니라 사탄까지 숨쉬고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와 대화하는 동료 수도사 쪽이 훨씬 침착하고 정결하게 대화를 이어 간다.그는 갈등과 번민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예수를 차분하게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준다.그는 거의 고등학교의 카운셀러 선생님이다.

 

;이렇게 예수는 이 시점에서 일반적인 종교적 고뇌자들과 동등하다.수도원의 어느 밤,그는 또다시 막달라 마리아의 음성으로 얘기하는 뱀과 마주친다.이때 뱀은 예수에게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한다.그래서 예수는 인생의 한 쪽 고민을 일단락시키는 듯 보인다.

 

#4.첫 사역을 시작했을 때에도,예수는 완전한 자기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다.그는 낮에 설교하고 밤에 고민한다.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는지 아니면 그른 일을 했는지 조차 확실하게 판단하지 못한다.그는 여전히 고민중이다.

 

#5.그의 이런 자기불신은 자신의 설교가 완전히 왜곡되어지는 것 -그의 얘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언제나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진다- 을 막아내지 못한다.그가 아무리 사랑과 동정을 얘기해도 사람들은 '로마 놈들을 죽이자'는 구호로 화답한다.따라서 그는 언제나 당황하며,영화 속에서 그의 동반자적 위치로 격상된 유다와의 견해차도 극복해내지 못한다.

 

#6.예수가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라는 근본적인 이유도 있지만,또한 자신이 고수해왔던 정치적 입장 -무조건적인 사랑이 최고라는- 에 대한 의문과 검증이라는 목적도 있다.

 

;한편 예수의 이런 인간적 여정들을 묘사하는 와중에서도,스콜세지는 가끔 예수의 초자연적인 기적 장면들을 연출해내곤 한다.예수를 평범한 인간,고뇌하는 인간으로 한껏 폄하하는 듯 하다가도 ,갑작스럽게 예수의 초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에,관객은 일정 부분의 혼란과 영화 자체의 일관성이 교란되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그러나 이 일관성 부재마저도 일종의 전략일 수 있다.

 

#7.세례 요한과의 논쟁은 피와 사랑간의 대립이며,날선 도끼와 부드러운 평정간의 대립이다.예수가 사랑만이 하나님의 길이라고 주장할 때,광야의 선지자는 사랑은 '공정하지 않은 일'이라고 주장하며,신의 뜻은 오히려 분노에 가깝다고 강변한다.물론 예수는 분노 역시 답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하나 자신의 의견을 완전하게 정립하지는 못한다.그래서 그는 또 하나의 과정을 위해 사막 같은 광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벽에 부딪칠 때마다,그는 언제나 곧장 광야로 떠난다.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은 갖가지 유혹과 환상이라는 훼방꾼들을 만나게 되기는 하지만,이런 행동이야말로 현대 기독교가 잃어버린 내면의 결정적인 모험인지도 모른다.

 

;또 예수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만,완전히 탈정치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검과 칼과 도끼는 평생 동안 그의 배경처럼 붙어다녔으며,예수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닥친 정치적인 입장과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신과 인간이라는 레벨의 차이를 떠나서,정치적 입장은 격동적인 사회 -특히 식민지라는-를 살아가는 청년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삶의 조건처럼 작동한다.

 

#8.광야에서의 세 가지 유혹 역시 근본적으로는 내면적이다.스콜세지는 어두운 한밤중과 불의 이미지 ,황막하고 넓은 공간 보다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공간을 사용하여 예수 내면의 결투를 묘사한다.

 

(광야의 예수는 이렇게 원을 그린다.그는 이 폐쇄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너무나 전형적인 수법이지만 예수의 유혹자들은 이 원 안으로 진입해 들어와야 승리를 얻는다)

 

맨 첫 유혹자는 예수의 영혼 (spirit)을 자처하는 뱀인데,이 뱀이 예수에게 강조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뱀은 예수의 외로움과 고적함 자체를 겨냥하는 것이다.무엇하러 이런 고독함을 감내하고 있느냐며 뱀은,아담이 그의 갈비뼈로 여자를 취하듯 아내와 가족을 만들라고 부드럽게 속삭인다.뱀의 유혹은 예수의 종교적 정신을 향해서도 매우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데,세상을 구하려고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원죄 자체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양심적인 일 아니냐고 예수를 설득하려 한다.

 

예수가 맞닥뜨리는 첫번째 유혹은 바로 개인적 층위의 행복인 것이다.예수는 힘겹게 이 유혹을 물리치지만 소리지르고 울음을 터뜨린다.권력과 지배를 상징하는 사자가 나타났을 때에도 그는 당장 혀를 뽑아버리겠노라고 일갈하지만 거의 울 듯 하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정치적 혁명의 프론트로 자신의 포지션을 이동시킨다.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 보다는 스콜세지의 영화에서 그런 성향은 더 강하다.예수는 이 광야의 사자를 망각해버리고 만 것일까? 아니다.예수의 기억력이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아마 그는 입장을 달리 했을 것이다.이렇게 이 영화 속 예수는 정확하게 일관된 노선을 걷지 않는다.그리고 스콜세지는 바로 이런 비일관성이 예수의 또다른 인간적 특질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마지막 시험에선 사탄이 불의 형태로 등장하여 예수에게 자신과 연합할 것을 권유한 후 사과나무로 변해버리고 ,예수는 바로 그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는데,그 사과에선 핏빛 과즙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다분히 구약성서의 아담과 이브 그리고 금단의 과일을 생각한 설정이지만 약간은 유치한 연결이다.이어 예수는 환각 중에 나타난 세례 요한에게 받은 도끼를 들어 그 사과나무를 베어버리는데,이후 그는 묘하게도 극단적인 정치적 순결주의로 향하게 된다.예수가 설정한 길은 그만큼 협소했던 것이다.

 

#9.세례 요한의 죽음을 접한 그는 맹렬한 행동주의자로 변신해서 권력에 대립각을 세우지만,스콜세지는 예수가 아직도 무언가 불분명한,아직도 무언가 불충분한 스스로 미심쩍어하는 구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정치적 전향이 자기 정체성의 확립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다.어쨌든 자신의 가슴에서 심장을 꺼내 제자들에게 보여준 예수는 더 이상 사랑을 설교하지 않는다.그는 사랑 대신 도끼를 치켜들고 세상의 모든 악,성전의 권력,가난,질병 그리고 가진 자들과 싸우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예수는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감으로 충만해진다.강력한 눈빛과 내지르는 말투를 선보인다.황무지의 구덩이에서 발레하듯 슬로 모션으로 기어나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자들을 유능한 외과의사처럼 차례차례 치유해낸다.그는 능력자로 변신한다.

 

 

#10.그러나 정치적 문제가 아닌 종교적 문제,생명에 대한 문제를 마주할 때면 그는 여전한 번민에 사로잡힌다.죽은 나자로를 살려내면서도 ,예수는 자신의 능력을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한다.자신이 해 낸 기적적인 일에도 완전한 자신감이 없다.예수의 눈빛과 손길은 이때 여전히 떨린다.

 

#11.나자로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에게 결정적인 전기를 제공한다.그는 죽음과 부활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숙고하며,그 자신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고대인답게,그는 이러한 계시를 과거 유대의 선지자 이사야가 등장하는 꿈을 통해 얻었다고 그의 동반자인 유다에게 고백한다.

 

;반면 이러한 변화는 지나치게 자의적인 것으로 그려진다.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런 갑작스런 노선 변경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정치적인 행동과 종교적인 각성 사이에서,외면적인 입장과 내면적인 갈등 사이에서,자신의 Hearts와 Bones사이에서,예수는 끊임없이 방황한다.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을 살해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그의 육체와 정신은 이것으로 잠정적인 합의를 이룬다.

 

;끊임없이 예수를 뒤따라다니는 발자국 소리 역시 끊임없이 그 의미가 변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정신의 레벨에서 볼 때,그 발자국 소리들은 예수가 그의 일생 내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갈등 요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그리고 그 소리들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때,그는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해결했다고 얘기할 수 있으며,그 '무언가'의 포커스를 어디에다 맞추느냐에 따라 예수 삶의 차원은 대단히 다양한 차원에서 결정되어진다.이것이 기독교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12.따라서 정치적 혁명의 분위기에 휩싸여 벌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마지막 시위는 매우 무의미한 시도이며,어떤 의미에서는 동료들에 대한 배신에 가까운 일이다.도끼와 칼을 들어야 할 긴박한 대치 상황에서 예수는 두리번거리고 머뭇거리며 심지어 유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한다.그의 양손바닥으로부터 붉은 선혈이 흘러나오는 가운데,예수는 민중들에게 마저 배척당하기 시작한다.이런 예수의 모순적 행동들은 훗날 미화되고 경전화되는 사랑과 비폭력의 논리로도 설명되기 어렵다.결정적인 순간까지 떠밀린 끝에,예수는 죽음을 결심하는 것이다.

 

; 이 영화에서의 예수 내면의 움직임은 언제나 외면의 행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그러나 궤도를 어울려서 달려나가야 할 예수라는 열차의 두 바퀴는 항상 엇나가고 항상 비틀거린다.스콜세지는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내면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라고 말하지만,이 함정적인 움직임을 우리가 어원적으로 알고 있는 신의 이미지와 대조해서 살펴보면 또 하나의 엇박자가 발생하게 된다.

 

 어쩌면 스콜세지는 바로 이 거대한 모순을 신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했을런지도 모르지만,영화의 외양이 묘사하는 예수 움직임의 강도와 진동수는 오히려 인간의 움직임에 더 가깝다.이로써 이 영화의 관객들은 그들 자신이 갖고 있는 신성에 대한 통념을 재검토하거나 교체해야 할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13.예수는 그의 마지막 이승에서의 밤.그의 아버지인 신을 향한 가장 격렬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는 끊임없이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하고,'자신이 꼭 죽어야만 하겠느냐'고 신에게 묻는다.그는 아직도 자신의 운명을 완전하게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유다의 배신이 없었더라면 그의 일들이 어떻게 흘러가게 되었을지 ,이 텍스트 하나만 가지고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14.그러나 결국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다.그러나 그의 번뇌는 십자가 위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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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음과 내면은 이렇게 지속적으로 변화했다.정치적 입장 역시 거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럽다.물론 예수의 삶이 150분이라는 한정된 영화의 러닝 타임 속에 한계지워져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그렇다고 해도 그의 변화는 거의 롤러 코스터 수준이다.스콜세지가 이렇게 만든 데에는 물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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