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누가 레오니다스가 될 것인가?
지난 토요일 심야,아내와 영화 ,<300>을 보았다.영화를 보기 며칠 전,나는 아내에게 그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의 몸이 '끝장'이라고 통보했고,아내는 미리 그 영화를 예매해 놓겠다고 다짐하며,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내 탄력없는 뱃살에 대해서 토론해 보자고 으름짱을 놓았다.
사실 최근 몇 달 간 아내는 내 뱃살에 대해서 끊임없이 타박을 늘어놓았으며,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체중을 감량하지 않는다는 것은,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애정전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고 강짜를 부렸다.이게 도무지 '애정'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내 항변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아내는 묘하게 논리가 통하지 않는 구석을 가지고 있었는데,어쩌다 그 무논리의 메카니즘이 작동되기 시작하면 아예 당해낼 수가 없었다.
- 나는 안 그렇쟎아!
자신은 남편에 대한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그리고는 그때부터,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변명을 그야말로 핑게로만 치부하기 시작했다.대화는 연결되지 않고 패배는 그래서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가만 있는 게 상책이다.계속되는 잔소리도 자꾸 들으면 자장가처럼 들리고 부드럽게 넘겨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그래도 가만 있는 게 상책이다.(이렇게 말하고 있자니 내가 무슨 비만 직전의 인간이거나 엎드리면 사지가 지면 위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거북이형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문제는 아내가 생각하는 좋은 몸매의 기준인데,아내의 이상형은 장동건에서부터 이준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너무 넓었다.물론 그 다양함에 나 같은 범인이 접근하기란 태생적으로 불가능하고 말이다.)
언젠가 매일 운동을 해서 체중을 줄여가기 시작한 적이 있었는데,어느 밤 운동하고 돌아온 나를 벗겨놓고 한참이나 째려보더니,갑자기 그러는 것이었다.
- 그래 그래,고생했다.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이제 그냥 쪄라.사실 오동통한 뱃살도 괜챦았었다.그것도 자주 보니까 정들었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추어야 하느냐고 볼멘 소리를 했더니,그래도 '섹시한 몸매가 낫지' 또 이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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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의 배경이 되는 스파르타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스파르타식'이라 이름 붙여지는 모든 체제엔 혐오감부터 들었다.'스파르타'란 단어는 무언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냄새를 풍겼으며,구성원의 자발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폭력적인 강제의 분위기가 느껴져서 더욱 질색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보내야했던 청소년기와 연관이 있을 터였고,쉽게 말해서 유신시대 말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인 트라우마일런지도 모른다.
언제나 내가 다닌 학교들은 축소된 병영이었고,실적(성적)이 최우선시되고 아이들의 개성 따위에는 전혀 관심없어 하는 감옥이었다.선생님들의 손아귀엔 언제나 사랑의 매가 들려져 있었으며,정해진 구역에서 이탈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시 되었었다.실제로 고등학생들이 군사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시대였으며,애국조회니 무슨무슨 검열이니 하는 행사는 병영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한 듯한 제도였다.하긴 실제로 학교에 군복을 입은 교련교사가 배치되었었다.
승리와 1등의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주입되었고 ( 반 별 평균성적이나 그 반에서 서울대학교를 몇 명 간다는 것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것은,하급의 삶을 의미한다는 얘기가 태연자약하게 반복되었다.어떠한 방법을 쓰고 있든,성적을 올릴 수 있는 교사와 학교가 각광받았고,그 반대편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삶은 관심 밖으로 밀려 났다.좀 과장된 얘기일 수도 있겠으나,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 생활들의 기초가 이런 원리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 만은 진실일 것이다.
'스파르타'란 단어는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그래서 싫었다.
겨우 겨우 그 시절을 통과했더니 이번엔 전두환의 군사독재가 기다리고 있었다.물론 30년을 이어온 병영국가체제는 결국 끝장났지만,정신에는 외상을 남겼다.강압적인 ,비합리적인,그리고 비자발성을 강요하는 듯한 상황에 무조건적인 혐오감을 갖는 증상을 보이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는 스포츠에서 조차 그런 느낌을 가졌다.'스파르타식 조련' 끝에 승리를 거두는 스타일의 지도자들을 나는 싫어했다.청소년 축구팀을 세계 4강으로 이끈 박종환이 그래서 참 싫었다.또,민족사관고등학교도 싫었고 대입기숙학원들은 어이가 없었으며 병원의 상명하복적인 체제엔 구토감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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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300>은 바로 그 스파르타가 무대인 영화이며,스파르타의 영웅들이 주인공이라는 영화였다.영화를 보기 전부터 난, 이 영화가 '나와 맞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며,게다가 가급적이면 읽지 않았으면 좋았을 영화 리뷰를 몇 개 읽어버리고 말았다.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도 옳지 않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이 경우 내가 취할 방법은 단 하나,이 영화를 그냥 '오락영화'로 치부해버리는 것이었다.그냥 액션만 보고 나오면 되지 싶었다.스파르타도 잊자,병영국가도 잊자,폭력교사도 잊고 다 잊자.평소에는 몸짱을 감상할 수 없었던 아내에게,좋은 눈요기 기회를 갖게 하자..이렇게 다짐하면서 극장엘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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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는 것이다.일 주일 내내 둘 다 너무 과로에 시달렸으므로,눈꺼풀은 한없이 무거워졌고 마음 조차 납덩이처럼 무거웠다.아내는 '괜히 보러 왔다','쉬고 싶다'를 연발하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런 때 내가 '당신이 복근 보고 싶다고 했쟎아'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었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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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자,아내는 영화의 내용과 시대적 배경을 물어보았다.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아내의 귓속에 소근거렸다.영화가 시작되고,10분 후 아내가 내게 말했다.전혀 소근거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 이거,만화네..
- 만화가 원작이거든.
-그래도 영화쟎아..
아내의 말투에서 허탈함과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좀 짜증나지?
실제로 우리의 영화는 이 시점에서 끝이 났다.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이건 그냥 만화였다.만화라고만 생각하면 끝나느냐..물론 그건 아니다.욕 먹을 건 먹어야 한다.그러나 욕도 할 만한 대상이 따로 있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든다.사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 조차 전혀 페르시아인 같지 않았다.
오히려 스트리트 파이터에 나오는 인도인 캐릭터 같았다.그 왜 팔 다리가 늘어나며 공중부양 자세에서 공격하는 사람 말이다.
영화 속 크세르크세스는 또 이렇게 생겼다.
에이,그만 하자..
영화 속 주인공 레오니다스로 나오는 배우 (제라드 버틀러)를 어디서 본 것 같았다.영화는 젖혀 두고 한참을 기억 속에서 헤매이다 찾아냈는데,2년 전 부산영화제 야외상영장에서 본 '베오울프와 그렌델'에 나왔던 배우였다.(나중에 확인해 보았는데 맞았다..) 그 땐 참 야성적이었다..만화 같지 않고 말이다.
우리는 무심코,그리고 약간은 영화의 상황들을 비웃으며 시간을 견뎠다.간혹 가다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었다.그럴 땐 약간 정신을 차렸었다..
- 정말로 300명이 백만명을 이긴 거야?
아내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 아마 그랬다지..
- 정말로?
- 뭐,내가 봤냐? 왜 이순신 장군도 배 열 척 가지고 일본 애들 백 척 이기고,수나라 당나라 애들도 고구려 애들한테 몰살당했쟎아..
-아아,그랬었지..
우리는 이렇게 점점 심드렁해져갔다.영화는 재미없지도 않았고 재미있지도 않았다.그러나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아내 조차 하품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미없니?
-아니,그냥 볼 만 해.
영화가 별로일때,아내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단 챠이밍량의 경우는 예외로 해야겠다.아내는 챠이밍량의 대만영화를 함께 본 후,앞으로 이런 영화는 절대로 혼자서만 보라고 말했다.나는 아내가 너무 솔직하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한다.
결국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는 죽었다.우리는 간단하게 그의 죽음을 수긍했다.
극장을 걸어나오면서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복근은 어땠어?
- 복근?
아내는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듯 대답했다.
-몸짱들 말야..
아아,아내는 잠시 스파르타 전사들의 몸을 떠올리는 듯 싶더니 간단하게 내뱉었다.
-별로였어.
- 엥?
난 솔직히 놀랐다.폭포수 같은 잔소리가 쏟아질 걸로 예상하고 있었다.뱃살 뿐만 아니라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만들어내라고 주문할 줄 알았던 것이다.
- 난 그렇게 지나치게 억지로 만든 것 같은 근육은 싫어..
-엥?
역시나 까다로운 캐릭터다.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근육은 그런 근육이 아냐.최소한의 성의지.영화에 나온 그거,어디 징그러워 갖고 만지기나 하겠냐?
나는 잠자코 걸어가기만 했다.
-내가 생각하는 예쁜 근육은 그렇게 울퉁불퉁한 게 아냐.적당히 말랑말랑하고 적당히 굳센 그런 거지.
도대체 이 사람은 까다로운 걸까,소박한 걸까..
-내가 그 정도까지는 원하지 않지만,그래도 당신,성의는 보여야 해.도대체 몸이 그게 뭐냐?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몸도 사랑할 수 없는 거야...
아내 특유의 반박을 허용치 않는 논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지난 토요일 아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쓰고 있는데,아내는 알면 알수록 현실적이고 건전하며 고집이 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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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의 시간이 지난 지금,난 <300>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이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었다.아내는 지금은 바쁘니까 용건만 빨리 말하라고 성화를 해댔다.
- 누가 그러는데,여자들이 남자들의 발달된 복근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아내는 차탈레 부인을 로렌스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 당연하지..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당신 바보 아냐? 여자들은 수영장에서 눈 안 돌아가는 줄 아니? 끊어!
아내가 너무 바쁠 때 전화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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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300>에 대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했었다.영화를 집중해서 보지도 않았었고,아까도 말했듯이
그냥 '만화'라고 판단한 영화에 ( 그렇다고 절대로 만화가 영화의 하위쟝르라는 것은 아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싶었다.아내와 나누었던 '인공적인 몸매'에 대한 이야기 역시 그냥 사적인 대화이지 영화에 대한 리뷰는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주절주절 <300>이야기를 꺼내든 것은,레오니다스의 '어떤' 모습과 그리고 바로 FTA때문이다.
나는 FTA에 대해서 잘 모른다.FTA가 무슨 단어들의 약자인지 조차 모른다.
아마 Fucking Terrible Assassination 이나 Forced Terrific Agreement이거나 ,영화 <300>에서 힌트를 얻자면,Falsely Trained Abdominal muscle (가짜로 훈련된 복근) 정도이겠거니,생각한다..
단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지금 미국과의 협상이 자신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느끼는 그 어떤 사람도,그것에 의해 앞으로의 생활이 막대한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 정도이다.상대적으로 고소득자라고 해서 FTA의 무풍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 명 중 두 명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의사들 역시,미국과의 FTA를 통해 근본적인 위상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의료보험 재정과 약가만 생각하면 금방 알 일이다.한 걸음만 넘어서 생각해보면,의사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양극화가 진행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꼬이면 안 된다.의료계의 다른 축인 약사들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우리끼리' 밥그릇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너희는 살아남을 것 아니냐'는 냉소는 스크린쿼터 투쟁 당시,일류급 배우들에게 보였던 대중들의 반응과 별반 다를 게 없다.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또한 내게 FTA의 이미지는 그리스 세계를 향해 진군해 오던 페르시아의 백만 대군의 그것과 비슷하다.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에게 요구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며,현대의 페르시아 군이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레오니다스를 떠올렸다.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300>에서 레오니다스가 외치는 구호, '자유를 위하여!'와 '우리의 가족을 위하여!"를 비웃는다.그러나 그 레오니다스가 지금 이 시기의 우리 중 누군가의 모습이라면 쉽사리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오히려 우리에겐 무모한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무뢰한들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나는 <300>을 '만화'로 바라보며 레오니다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 레오니다스가 있을까? 갑자기 밥을 굶기 시작한 일부 정치인들이 레오니다스일까? 그런데 영화 속 레오니다스는 결코 밥을 굶지 않았던 것 같다.그는 오히려 300명의 부하들에게,'아침을 든든히 먹어두어라.저녁은 지옥에서 먹게 될 테니까'라고 외쳤는데 말이다.
레오니다스는 커녕,300명이 지키는 협곡으로 향하는 샛길을 알려줘서,그 300명을 몰살에 이르게 한 '에피알테스'만 우리에게 득실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에피알테스 역시 확신에 차 있었다.그렇게 하는 것이 고국 스파르타를 지키는 길이라고 그는 믿었었다.에피알테스가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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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노무현 대통령은 FTA에 대한 최종적인 대국민담화를 발표하신단다.황사로 부옇게 변한 그 아침에 그가 무슨 얘기를 하게 될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어쩌면 만우절의 농담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런지도 모른다.또 그가 그 날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지속될 것이며,새로운 상황들과 싸워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얘기를 듣기 전에,그가 레오니다스 역할을 하게 될 지,아니면 에피알테스 역할을 하게 될 지,잠시 생각해본다.
결국,그가 아무리 미국영화를 싫어한다고 해도,( 아니,혹시 대통령이 영화 자체를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 이 영화 <300>을 그저 '만화'로만 바라보며 한 번 쯤 청와대에서 봤음 한다.아직 DVD 가 안 나왔으니 불법으로 다운로드 받아서라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