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위적으로 추출한 2006년의 영화들
작년 12월 30일에도 이와 똑같은 제목의 글을 썼었다.그때는 상당히 심란해있을 때였고,많은 불행한
일들과 재앙 같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던 시기였었다.그런데도 영화는 어느 정도 보았던 것 같다.
대개 힘들고 어려울 때,극장 안으로 직행하는 경향이 있는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지금,작년에 비해서 난 영화를 많이 못 보았다.많이 바빠졌기 때문이기도 하고,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쪽으로 인생을 바꿔가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러나 '가정적인 아빠'로 살아가는 데에 따르는 피로와 긴장 역시 무시하기 힘들다.'부모된다는 것',,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무작위적으로,2006년에 보았던 영화들을 뽑아보았다.단,나중에 꼭 리뷰를 써 보고 싶은 영화들을 제외시켰다.가령 <가족의 탄생>,<굿 나잇 앤 굿 럭>,<시리아나>,<커피와 담배>,<해변의 여인>,<호텔 르완다>같은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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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는 <캐리비안의 해적 ; 망자의 함>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이 영화는 쟈니 뎁의 연기로 기억에 남는다.어떤 땐 비열하고 어떤 땐 정신병자 같고 또 어떤 때는 용감무쌍하게 변하는 다중인격적인 해적두목 캐릭터를,쟈니 뎁은 매력을 잃지 않으며(이것이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어떤 배우들은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매력을 완전히 희생하지만,쟈니는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연기해나간다.
그의 최후의 장면을 보면서 4편 ,5편이 나와도 보러 가리라,그랬다.(사실 이 시리즈를 극장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무작위적으로 영화를 추출했다는 것은,어쩌면 그 영화에 크게 몰입하지 않았거나 그냥 지나가버린 영화일 수도 있다.따라서 이런 '추출'에는,앞서 쟈니 뎁의 경우처럼 주연배우의 아우라가 많이 작용한다.따라서 <싸움의 기술>,백윤식의 아우라가 영화의 절반을 휘감고 있는 이 영화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영화가 어쩌니 저쩌니 해도,백선생을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즐거운 영화다.
그가 유지하는 이상하게 느물느물하고,정체를 알 수 없이 코믹하며,어떤 땐 너무나 샤프해서 깜짝 놀라게 하며,결국은 그 어떤 이상심리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는,아마 한국 영화계에서 영원히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가 될 것이다.그가 이제야 영화판에 나타난 것은,어쩌면 재앙이자 축복이며,문소리의 남편이 가진 혜안의 결과이다..
갑자기 생각난 배우가 갑작스런 영화 하나를 호출한다.2006년에 만들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2006년에 보았던 영화 <게이샤의 추억>.저 너무도 상큼하게 귀여운 아역배우는,그 영화에서 쟝쯔이의 아역을 담당했던 배우이다.여러 말 할 것도 없이 너무 귀엽다.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배우는 이 아이도 아니고 쟝쯔이도 아니고 바로 영원한 누나,'공리'다.공리는 카리스마 만빵으로 충전되어서 쟝쯔이를 가볍게 제압한다.그러나..영화는 불편했다.드라마 <황진이>가 훨 낫다..
또 기억나는 배우로는 리즈 위더스푼이 있다.헐리우드판 최진실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무인 곽원갑>의 이연걸 역시 잊을 수 없다.언젠가 그의 세계를 꼭 한 번 다뤄보고 싶은데,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곽원갑>에서의 이연걸은,이제는 삶을 알아버린,말하자면 앞서 말한 리즈 위더스푼처럼 관록이 쌓인 무예가,바로 그것이었다.
반면 <원초적 본능2>의 샤론 스톤은 아쉬움을 넘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들었다.여배우의 섹시함이란
미끈한 다리나 뇌쇄적인 눈동자만 가지고선 어렵다는 사실을 샤론은 모르고 있었거나,아님 알면서도 밀어붙였던 것 같다.최고의 졸작 중 하나이다.원초적 본능..
꼭 졸작이라고만 부를 순 없지만,그래도 별로였던 영화가 있다.
<흡혈형사 나도열>..배우들의 개인기로 영화 전체를 메워나가는 과감함이란 단 한 가지의 미덕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던 배짱만빵의 베짱이 같은 영화였다.불만있냐구? 없다.그저 타임킬링용으로 보았던 영화였기 때문이다.그런데.진짜로 타임이 킬링됐다.
반면 역시 좀 안타까웠던 영화도 있다.
이 정도 배우를 가지고,이 정도 소재를 가지고..좀 더 잘 할 순 없었을까? 더 이상은 노코멘트인데,한석규 횽아가 변신에의 몸부림을 시작하는 것이 마구 느껴진 영화이다.횽아..그런데 조금 늦었다.앞으론 <구타유발자> 같은 영화에 계속 출연하는 것이 낫다.당신은 이제 흥행배우가 아니다.환상을 깨라..
가장 사랑스러웠던 영화의 가장 사랑스런 장면이다.<메죵 드 히미코>.묵직하면서도 가볍고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하게 환상적이다.여배우는 추상미를 너무 닮았다.추상미가 저렇게 귀여운 모드로 나가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런데..자꾸만 저 영화에 나오는 집을 보면서 제주도의 펜션들을 떠올렸다..상상력은 아무 곳으로나 뛰는 법이다..
올해 내가 보았던 가장 빛나는 영화 중의 하나는 바로 <짝패>다.느릿느릿한 충청도 말투가 ,잔인함과 액션에 맞물려서 한 치도 빗나감이 없는 긴장감을 생산한다.이 영화의 B-boy 액션 같은 것은 참으로 현란했다.영화를 흐르는 정서 자체가 완전히 구식이면서 표현 방법 자체는 신식과 구식을 왔다 갔다 하는 영원한 씨네 키드의 세계를 ,감독 류승완은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이 영화가 <킬 빌>과 비교되는 것에 대해 억울함을 표시했었는데,그리 억울해 할 일만은 아니다.어느 면은 아주 비슷하고 어느 면은 근본적으로 다르니까..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이범수의 연기가 올해의 '남우주연상'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영화시상식의 무슨 무슨 주연상이라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난 그런 종류의 연기 대상 역시 어떤 작품 자체에 대해 수상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가령,이런 식이다.올해의 최고 커플 연기상,<사생결단>의 '황정민'과 '류승범',괜챦지 않은가? 그리고 황정민 진짜 괜챦다.평소에는 카리스마 하나 없이 잔잔한 연기를 하다가,어떤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폭발시킨다...나는 이 친구를 설경구 보다 더 좋아한다..
졸면서 졸면서 본 영화도 있다.<남자들이 모르는 은밀한 것들>,매우 에로틱한 장면이 지나감에도 졸림을 참을 수 없었다.다시 함 봐야 한다..
그 밖에 <비열한 거리>,어쩐지 십 년 전의 히트송을 다시 듣는 것 같았다.이제 충무로는 하나의 공장이다.유니크함이 사라져간다.조인성이 쟈니 뎁이 될 수 있다면,이란 공허한 상상을 해 본다.
타임킬링용 영화도 꽤 있었다.<미션임파서블3>는 즐거운 타임킬링..(생각없이 즐거워하는),<포세이돈>은 뭐하자는 건지 잘 모르겠는 타임킬링..
그리고 <구타유발자>.이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를 참고했으면..어떤 상황에서도 마지막엔 폭발을 시키려는 폭파전문가.마틴 스콜세지..
나왔다.마틴 스콜세지..그리고 <디파티드>
이 영화를 본 분들은 자꾸만 원작인 유위강과 맥문휘의 <무간도>를 얘기하신다.그리고 <무간도>의 결정적으로 빛나는 광휘 때문에 <디파티드>를 자꾸만 폄하하신다.그러나 <무간도 >와 아무 상관없이 이 영화를 본 분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폄하될 만한 영화는 아니다.오히려 재미있었다는 말을 나는 많이 들었다.결국 뭔가를 읽고 느낀다는 것은 읽는 자의 현재의 두뇌와 감성이 좌우하는 것이다.
또 어떤 분들은 <무간도>의 치밀한 각본에 빗대어 이 영화에 허술한 내러티브 구조와 디테일들을 공격하신다.그러나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무간도>역시 트집잡으려면 잡을 수 있는 디테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그러나 스콜세지는 이제 시나리오 작가 윌리엄 모나한의 존재를 다시 고려해봐야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처음에 <무간도>와 <디파티드>를 완전히 다른 영화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사실 무간도가 다루는 '존재 자체'의 문제들을 디파티드에서 찾기는 조금 어려웠다.간단하게 말해서 ,무간도의 배경이 밝은 대낮ㅡ 구름 깔린 하늘- 이었다면 디파티드의 배경은 어두운 밤거리- 그리고 악마적인 악당 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난 스콜세지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동양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그가 기용할 수 있는 배우들은 동양적인 섬세한 정서를 생래적으로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오리지널을 '재창조'하려 했다면,진정한 재창조가 필요했을 것이다.그러나 스콜세지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오리지널을 너무 따라간다.변화를 주려 했던 부분은 기껏해야 변명 정도로 작용했을 뿐이다.더구나 유위강과 맥문휘가 다루려 했던 '구원'의 문제가 스콜세지에 이르르면 그저 한 판의 폭력과 인간 본성의 차원으로 변해버린다.그렇다고 스콜세지가 무간도의 감독들 보다 아랫길이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그것은 문화의 차이,관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스콜세지가 홍콩영화들을 카피하려 했다는 것,그의 창조력 고갈이 그 같은 일종의 도적질을 불렀다는 소리는 사실 하나마나한 말이다.스콜세지는 그 정도의 인물이 아니다.비록 이젠 노쇠해져 있지만,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이다.오히려 옛 시절,많은 홍콩영화감독들이 그를 차용하고 베끼고 오마쥬했다..거장은 함량이 떨어지는 영화를 만들어도 거장인 것이다..
그래도 이 영화는 헛점이 너무 많긴 하다.나는 정신분석의로 나오는 두 남자의 연인 매들린이 진짜 정신분석의인지 의심이 갔다.그는 남을 분석하기 보다는 환자들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적고 있는 법정의 서기처럼 보였다.('조폭마누라'의 서기 말고) <무간도>의 아름다웠던,그리고 진정으로 상황을 고민했던 여성캐릭터들이 보스턴에서 길을 잃고 한 사람의 여성-어머니-연인 으로 변해버렸다.안타깝다.그리고 유감이다.
난데없는 중국 무기 타령이야말로,헐리웃의 창작력 고갈을 그대로 드러낸다.바보들이 아닌가,그런 생각을 했다.뭐,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겠다.난 그런 생각까지 했다.20세기 말의 홍콩 배우들,구체적으로 유덕화와 양조위가 얼마나 뛰어나 배우였는지 새삼 알겠다고 말이다.<디파티드>속 맷 데이먼이 그저 전전긍긍해하는 비열한 엘리트인 반면에,유덕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는 오델로로 보였다.리어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불안감에 시달리는 거친 신경증 환자라면 그래서 더욱 더 분노하고 괴로워하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면,양조위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피로에 지쳐 이젠 혼란에 빠진 실존적 햄릿을 연기한다.양조위의 슬픔엔 진정한 슬픔,세계 전체에 대한 슬픔이 있다.만약 이 영화를 디카프리오가 그의 반짝반짝하던 지난 날 - <바스켓볼 다이어리>를 찍던 그 시절 - 에 찍었더라면 또 달랐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확실히 <무간도>엔 정적인 예민함이 있었다.설명은 부분부분 생략되지만 관객들의 긴장을 늦추지도 않고 관객들이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관객에게 어떤 정서를 강요하지도 않으며 그러면서도 영화적 재미는 뒤로 갈수록 배가되었었다.황추생과 증지위 같은 카멜레온적인 존재들 ( 그들은 그들 나라의 영화에서 언제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다) 은 영화를 굳건히 받쳐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그들 나름대로의 인생을 연기한다.반면 잭 니컬슨과 마틴 쉰을 위시한 그 화려한 조연진들은 자신들이 유지해 온 그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온다..난 이것은 낭비라고 생각한다.니콜슨의 악마에 저항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확실히 <디파티드>는 미국의 영화이다.미국의 관객들은 양조위의 표정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유덕화가 왜 아주 비열해 보이지 않는지 의아해할 것이다.맷 데이먼은 당연히 그렇게 치사해야 하는 것이다...보스와 그가 심어놓은 스파이가 만나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디파티드>에서는 포르노그라피였었다.내 기억에 <무간도>에선 아니었던 것 같은데..난 자꾸만 미국 아이들의 섹스에 대한 강박증이 떠올랐다...으음..그만 하자..<무간도>는 걸작이다.그리고 <디파티드>역시 잘 만든 영화이다...졸작이 아니다...
2006년이 이렇게 지나간다.서른 살 이후엔 세월에 날개가 달렸는지 정말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간다.난 이제 마흔 살이다.스무 살 땐,A.E.하우스먼의 '내 나이 하나하고 스물이었을 때'라는 시가,서른 살 땐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가 화두였는데,마흔 살엔 아무런 화두가 없다.이래서 40세를 '불혹'이라 하는 것일까..변명은 참...쯧쯧..
이 글을 읽는 분들 ,새해엔 꼭 행복해지시라..행복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이젠 행복에 대한 실마리는 좀 안다고 생각한다.긴긴 길을 돌아온 다음에 말이다.행복은,,아주 가까이에 있다..너무 평범한가?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내 딸이 이렇게 인사드린다... 오늘의 배우이다..2006년의 인물이다.내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