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오래간만에 본 친구에게..<괴물>
폴사이먼
2006. 9. 12. 21:16
어어..정말 오래간만이었어,친구.
왜 갑자기 '오래간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나 자신도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쩐지 '오래간만'이라는 ,하필 그 단어를 쓰고 싶어졌어.그대가 그대의 생때 같은 두 아이를 이끌고,내가 일하는 도시를 찾아준 순간,난 느닷없이 '오래간만'이라는 말을 떠올렸고,내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 그 단어에 숨어있는, - '과거 아주 좋은 시절에 대한 기억','특히 아주 순수했던 때에 대한 회상' 같은 - 의미 때문이었을 거야.
그리고,
특히 그대가 내게 앞세웠던 그대의 두 아이 - 아들 녀석은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고,딸은 고집센 섬세함으로 가득한 - 때문이기도 했을 거야.난 녀석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쳐다보자 마자,20년 너머의 옛날로,그대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학교에서의 순간들로 곧장 날아올라 버렸는지도 모르겠어.
왠지 들뜨고,왠지 선량했던 그 날들로 말이야.어떤 이들은,아이를 낳는 이유를 자기 존재의 불완전성과 분명한 유한성에서 오는 존재의 복제시도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난 그와 비슷한 이유로 우리가 아이를 낳는 이유가 우리 내적인 존재의 복원과 회복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물론 꼭 내가 옳다고 주장하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 =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무슨 얘길 했었더라.단속적인 이야기들 와중에서도,우리가 '영화' 얘길 나눴던 기억은 분명해.그대는 <구타유발자들> 과 <김기덕>에 관해서 말했었지.그렇게 심각한 얘긴 아니었어.다만 삶을 좀 더 평이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필요하다는 그대의 말에 난 충분히 공감했었던 것 같아.
평이함 속에는 의외의 보석들이 참 많이 숨어 있지.요새처럼 엽기적이고 이례적인 것들이 각광받는 시절이라면 더 더욱 '평이하다'는 그 단순한 말 한 마디가 소중하게 느껴지네.( 내 인생을 이십여년이나 지켜본 그대로서는 아마 충분히 수긍이 갈 걸세)
= =
음,서론이 너무 길어졌네.그대도 알쟎은가,언제나 서론에 힘을 빼다가 정작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마는 내 성향을 말이야.(지구력 부족이야,지구력 부족)
나는 괴물을 보았네.
이렇게만 써놓고 보니 도대체 내가 무얼 보았는지 약간 혼란스럽게 느껴지네.마치 내가 어디선가 진짜 괴물을 목격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으니.또 우리 주변엔 괴물과 괴물스러운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 말이야.다시 수정해서 말하겠네.
나는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았네.그리고 그 영화에 대한 리뷰를 그대에게 보내는 포스터로 대체하려고 하네.읽다 보면 ,내가 왜 그렇게 하려 하는지 수긍이 가게 될 걸세.
왜 갑자기 '오래간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나 자신도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쩐지 '오래간만'이라는 ,하필 그 단어를 쓰고 싶어졌어.그대가 그대의 생때 같은 두 아이를 이끌고,내가 일하는 도시를 찾아준 순간,난 느닷없이 '오래간만'이라는 말을 떠올렸고,내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 그 단어에 숨어있는, - '과거 아주 좋은 시절에 대한 기억','특히 아주 순수했던 때에 대한 회상' 같은 - 의미 때문이었을 거야.
그리고,
특히 그대가 내게 앞세웠던 그대의 두 아이 - 아들 녀석은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고,딸은 고집센 섬세함으로 가득한 - 때문이기도 했을 거야.난 녀석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쳐다보자 마자,20년 너머의 옛날로,그대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학교에서의 순간들로 곧장 날아올라 버렸는지도 모르겠어.
왠지 들뜨고,왠지 선량했던 그 날들로 말이야.어떤 이들은,아이를 낳는 이유를 자기 존재의 불완전성과 분명한 유한성에서 오는 존재의 복제시도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난 그와 비슷한 이유로 우리가 아이를 낳는 이유가 우리 내적인 존재의 복원과 회복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물론 꼭 내가 옳다고 주장하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 =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무슨 얘길 했었더라.단속적인 이야기들 와중에서도,우리가 '영화' 얘길 나눴던 기억은 분명해.그대는 <구타유발자들> 과 <김기덕>에 관해서 말했었지.그렇게 심각한 얘긴 아니었어.다만 삶을 좀 더 평이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필요하다는 그대의 말에 난 충분히 공감했었던 것 같아.
평이함 속에는 의외의 보석들이 참 많이 숨어 있지.요새처럼 엽기적이고 이례적인 것들이 각광받는 시절이라면 더 더욱 '평이하다'는 그 단순한 말 한 마디가 소중하게 느껴지네.( 내 인생을 이십여년이나 지켜본 그대로서는 아마 충분히 수긍이 갈 걸세)
= =
음,서론이 너무 길어졌네.그대도 알쟎은가,언제나 서론에 힘을 빼다가 정작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마는 내 성향을 말이야.(지구력 부족이야,지구력 부족)
나는 괴물을 보았네.
이렇게만 써놓고 보니 도대체 내가 무얼 보았는지 약간 혼란스럽게 느껴지네.마치 내가 어디선가 진짜 괴물을 목격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으니.또 우리 주변엔 괴물과 괴물스러운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 말이야.다시 수정해서 말하겠네.
나는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았네.그리고 그 영화에 대한 리뷰를 그대에게 보내는 포스터로 대체하려고 하네.읽다 보면 ,내가 왜 그렇게 하려 하는지 수긍이 가게 될 걸세.

= =
우리가 지난번 만났을 때,이 영화는 이미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있었지.우리 국민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괴물>을 보았다는 얘기가 되네.이 가공할 동원력에 경악하면서,우린 그랬쟎은가,우린 그 네 사람 중 한 사람에조차 끼지 못했다고 말이야.( 사실 세 사람 쪽이 훨씬 대다수인데 말이야)
그런데 난 이제 이 영화를 보게 됨으로써 그대완 반대편에 서게 됐다네.^^~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이 영화를 이미 보아버린 탓에 내가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갔을 때에는 관객이 별로 없었다네.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았을 거야.그런데 이 서른 명이라는 관객의 숫자가 내게 미쳤던 영향은 참으로 지대했을 거라고 난 생각하네.그 얘길 한 번 해 보세.
우선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로 슬퍼했네.난 변희봉과 송강호가 이룬 그 가족의 비참한 사투에 전혀 박진감을 느낄 수 없었다네.스릴 따위는 느낄 틈새도 없었어.그들 가족은 가족의 가장 중요한 보물,손녀와 딸과 조카 역할을 하는 소녀를 잃었다네.바로 눈 앞에서,손 쓸 겨를도 없이,상대할 수도 또 이해할 수도 없는 상대에게 말이야.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가장 무료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공간에서,그것도 한낮에,아주 순식간에.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네.원래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설계되어있는 모든 장치들이 그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궁지로 몰아넣는다네.조금은 덜 떨어진 둣 보이는 그 가족은,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항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네.정작 싸워야 할 괴물은 고사하고 그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턱없이 높고,어처구니 없이 다양하다네.
난 처절한 기분에 빠졌어.변희봉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눈빛,송강호의 목마른 혀,박해일의 초조한 어깻짓,배두나의 굼뜬 활솜씨를 보면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넘어서 절망적인 심정에까지 사로잡히게 되었어.

사실,난 여러 번이나 울 뻔 했다네.그런데,영화 속에서는 가끔씩 내 눈물을 방해하는 포복절도할 대사와 장면들이 가끔씩 출몰하곤 했어.정말로 웃기고 정말로 어이없는 장면들이 잊을만 하면 등장한다네.그래서 난 울 뻔 하다가 갑자기 웃을 뻔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슬퍼지고 뭐 이러면서 영화를 보았어.

이 장면이 대표적이라네.장례식 장면이야.그런데 그러다 난 갑자기 깨달았다네.내 주위에 드문드문 앉아있는 다른 관객들 역시 결코 소리내어 웃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런데,
만약 서른 명이 아니라 삼백 명의 관객들이 앉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상황이 좀 달라지진 않았을까? 글쎄,모르긴 몰라도 아마 웃음이 없지는 않았을 걸세.적어도 삼백 명 중 삼십 명은 폭소를 터뜨렸을 걸세.아닐까? 아니야,그랬을 거야.웃었을 거야.웃음엔 묘한 전염력이 있다네.눈물이 그렇듯 말이야.
그래서,
이 영화는 ,적어도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란 측면에서 볼 때에는 '어쩔 수 없는 블록버스터'가 틀림없었네.봉준호는 관객의 감정흐름을 면밀히 계산하고,적절한 시기에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도록 스토리와 대사 그리고 화면을 배치했다네.영화의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그러나 그 '경제' 때문에,봉준호는 많은 관객,그리고 많은 스크린 수를 전제로 일을 진행시켜야 했어.그는 오백만 명,그리고 구백만 명의 관객들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네.관객으로 꽉 들어찬 극장을 상상하면서 그는 자신의 '괴물'을 제작했어.
그래서,그러므로,그의 영화는 서른 명의 관객들 앞에선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지.적어도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란 측면에서는 말이야.서른 명의 관객들은 웃을 생각이 나지 않았어.적어도 우린 웃음을 삼켜야 했어.슬픔이 웃음을 압도했고 웃음은 전혀 그 특유의 전염효과를 일으킬 수 없었지.어쩌면 이것이 일본에서의 <괴물>의 실패를 설명해주는 단서인지도 모를 일이야.또 영화보기에 있어서 '타인의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실례라고도 할 수 있겠네.
어쨌든 내가 <괴물>을 보러 간 그날 밤,관객을 30명이었고,나는 크나큰 슬픔을 느꼈어.그리고 내가 슬픔을 느낀 이유 역시 곧 깨달을 수 있었네.그것은 내가 '아빠'이기 때문이야.잃거나 빼앗긴다고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싫은 자식을 가진 아빠이기 때문이었어.
물론 난 아직도 자격이 온전치 않아.변희봉이 잠 든 송강호를 바라보면서 '자식 잃은 부모의 속에선 썩은 내가 난다'고 말할 때까지도, 난 완전히 송강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으니까. (아마 그대라면 달랐을 테지만 말이야.)
그러난 송강호는 최고의 배우답게,얼마 지나지 않아 내 둔감함을 박살내버렸네.다행이야.이종원이나 윤다훈이 아빠 역을 맡지 않아서.
친구,이 영화는 내게 참으로 슬픈 영화였다네.그리고 송강호는 정말 괴물이라네.
= =
다른 이야기를 하겠네.이 영화는 분명한 '반미'영화라네.이 영화보다 더 반미의 코드를 가진,그리고 그러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국내 영화를 찾아볼 수 있겠나? 뭐,에둘러서 돌려 말하지도 않는다네.사건의 원인도 미국이고,사건을 다루는 배후도 미국이고 송강호의 머리에 구멍을 뚫도록 지시하는 것도 미국이며,사건의 사후처리 방식을 공표하는 것도 미국이라네

언제나 우리의 공권력을 냉소해왔던 봉준호는 이번엔 한 술이 아니라 다섯 술 쯤 더 뜬다네.<살인의 추억> 의 공권력은 무능해서 가련하기라도 했지만,<괴물>의 우리나라 공권력은 노골적으로 병신같다네.<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로 나온 김뢰하는 <괴물>에서도 공무원으로 나오는데,이번엔 무슨 <개콘>에 나왔던 '우비남매' 같은 옷을 입고서 어처구니 없는 개그를 보여준다네.
그런데,
천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이렇듯 노골적인 반미영화를 보았는데도, 이 영화 덕택에 반미의식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가 없었다네. ( 식상한 비유,미안하네.) <웰컴 투 동막골> 때는 젊은 세대들의 '반미의식'을 걱정해야 했던 한나라당의 이계진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고,조갑제는 이제 영화 따위엔 관심도 없어졌는지 송영선과 일본에서 놀고 왔다네.
어떻게 된 걸까? 반미의 전략은 이제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아님 이제 우리국민들은 미국에 대해 체념이라도 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아님 그들은 이제 우리의 당연한 현실인가? 그것도 아님 한강변에서 괴물과 맞서던 송강호를 유일하게 도와주던 미군 하사 때문일까?
이 영화는 '반미'를 당연스럽게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끝나버렸네.누가 그 이유를 좀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어.미국은 이제 우리네의 삶의 한 조건이 되어버리고 만 것인가,뭔가?
= =
나는 이 편지를 쓰기 전에 ,그리고 괴물을 직접 보기 전에 수많은 리뷰를 읽어보았네.별의별 해석이 다 있더군.기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네티즌들의 리뷰는 ,적어도 몇몇 영화담당신문기자들의 기사들 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았네.그러나 난 과도한 해석 만큼은 경계하고 싶네.어떤 대사 ,어떤 한 장면을 엮어서 환상적인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네.봉준호의 괴물은 그렇게 복잡한 영화가 아니니까 말이야.
다만 이 영화의 영어제목 HOST 만큼은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자구.

host는 자네도 알다시피 '숙주'라는 뜻이야.숙주는 숙주에게 붙어서 기생하는 어떤 것들을 전제로 하네.어떤 이는 말했네.이 영화의 숙주는 바로 우리 자신,대한민국 국민들이라고.그래서 숙주인 우리를 빨아먹고 기생하는 미국과 우리 정부가 우리의 기생충이라고.반면 어떤 사람들은 미국을 숙주라고 상정했네.그러면 나머지는 모두가 미국에 얹혀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말이야.
해석은 이렇게 논자에 따라 서로 다르게 진행되었네.또 어떤 이는 이것 자체가 봉준호의 의도라고 말했네.그는 봉준호를 천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그러나 내가 보기에 봉준호는 천재까진 아니야.천재는 어떤 고유의 비젼을 갖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분명히 수재나 영재는 확실하네 )
아,호스트엔 숙주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네.주인이라는 뜻도 있어.host 를 주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그리고 도대체 그 주인을 누구로 상정하느냐에 따라서 이 영화 제목 host 의 의미는 또다시 달라지네.
입장들은 다른 의미를 낳게 되는 것이고,그것은 또다시 수없는 가지를 치네.가지는 가지를 낳고 의미는 의미를 낳고,봉준호와 그의 팀이 던져 놓은 한 영화는 그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커져만 가지.
아마 봉준호의 의도는 아마 여러가지 의미들 중 한 가지 였을 거야.그러나 이런 의미의 다양한 변용 속에서,그의 의도는 수많은 의미 중 하나로 격하되어 버렸네.사람들은 기자와 인터뷰하는
그의 입을 유심히 바라보겠지만,그의 진술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을 거야.자기 생각을 훨씬
신뢰하니까 말이야.웹은,인터넷은 이렇게 모든 것을 바꿔버렸어.
나는 어떻냐고?
나는 주인과 하인,숙주와 기생충이라는 이렇게 대립적인 구도를 상정하는 것이 우선 싫다네.난 차라리 많은 의미들이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쪽을 선택하고 싶어.그러자면 이런 양립구도로는 좀 어렵지 않겠나? 제 3의 그리고 제 4의 의제들이 존재할 걸세.
그러나,
결국 우린 그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할 '자유'를 누리게 될 테지만 말이야.기억해 두자구.우린 그 '자유'를 선택하는 거야.
이것이 '회색코드'라는 반론에는 대답하고 싶지가 않네.대답할 가치가 없으니까.미안하지만
우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단 몇 개의 색깔만을 선택할 수 있네.그 선택엔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모든 교양과 의지가 죄다 녹아 있어.
그러나 머릿속은 그렇지 않네.우리가 괴물의 영어 제목 host 를 가지고 여러가지의 의미 변용을 일으키듯,우리의 두뇌엔 수많은 색깔의 질료들이 용광로처럼 끓고 있네.그 용광로 속 액체들의 색깔이 불분명하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두뇌 속은 분명히 회색이라네.그러나 우리의 두뇌 속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어.보여주는 것도 불가능하고,또 선언할 필요도 없고.
사실 그 선언 조차도 선택이야.선언은 일종의 언명이네.분명한 색깔의 선택이야.현실적으로는 확실히 자신의 색깔을 선택하고 행동하면서,머릿속의 혼합된 물감들이 어느 날 모두 정제되어 본원적인 자신의 컬러가 나오길 기다려 보는 게 어떻겠나?
비겁한가? 타협적인가?
결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그리고 이것 역시 과도한 해석일 수 있겠지.
= =
자,이번엔 <가족> 으로 들어가세.
글 서두에 난 이 영화를 슬픈 영화라고 했고,불행한 가족들이 그들을 둘러싼 모든 조건들과 서글픈 전투를 벌이는 영화라고 말했었어.그러나,그렇다고 해서 <괴물>을 가족에 관한 영화라고만 얘기할 수 있을까? 그대라면 뭐라고 대답하겠나?
이 영화는 분명히 가족의 전투를 소재로 사용하고 있지만,가족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영화라로고는 생각되지 않아.사실 가족을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하는 영화는 위험한 면을 가지고 있지
가족이기주의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네.가족은 근본적으로 울타리가 있다는 말을 꺼내려 하는 거라구.
가족은 배타적이네.다른 가족과 우리 가족 사이에서 우리 가족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다분하네.여기서 가족을 국가나 인종 또는 지역이나 혈연이라는 말로 대치해 보게나.뭔가 껄쩍지근해지고 끔찍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
<괴물>의 가족은 그런 개념과는 애초부터 상관이 없네.송강호 가족 자체가 원래부터 모성이 결핍된 불완전한 가정이네.그 모두를 잇고 있었던 것이 현서의 존재이고 말이야.현서가 괴물에게 납치되었을 때,가족들이 광분하는 것은 현서의 상실로 인해 온전한 가족의 구성이라는 그들의 본능적인 소망이 영영 그 가능성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가족구성의 근원인
사랑 때문이기도 하네.

현서가 납치당한 와중에 ,가족들은 환상을 꿈꾸네.'식구'라는 가족의 다른 말도 있듯이 그들은 함께 모여 컵라면과 김밥을 먹어.그 절망적인 식사 한가운데에서 홀연히 현서가 솟아오르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현서는 가족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네.가장 눈물겨운 장면들 중 하나야.그들이 왜 세상과 전투를 벌이는 지를 설명하는 대목이기도 하고.
가족은 분명히 가족이라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족'만이 이 영화의 주된 테마는 아니야.
내가 참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왜 현서네 가족만이 싸움판에 나서는가,하는 거였어.딸을 잃은 사람,조카를 잃은 사람,손녀를 잃은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도 괴물에게 복수를 하려고 나서지 않고 정부와 미국의 한강통제선을 뚫어보려 하지 않는다네.왜 그럴까?
물론 단순한 대답도 가능하네.현서는 살아있기 때문이야.현서가 살아서 휴대폰을 통해서 아빠에게 구조요청을 보냈기 때문이지.경찰도 군인도 아닌 아빠에게 말이야.
'가족'이란 이유를 제외한다면,'살아남은 자에 대한 예의'때문에 그들은 전투에 나서는 거라네.이 영화가 가족영화였다면,마지막에 현서는 살아남아서 송강호의 품으로 돌아갔을 거네.이 영화가 헐리웃 메이드 가족영화였다면,딸이나 아들을 잃은 각 가족들의 대표선수들이 선발되어 구조대를 형성했을 거네.박해일이나 배두나는 각자의 딸이나 조카가 따로 있을 거라는 말이지.
그리고 현서 보다는 차라리 송강호가 죽었을 거네.아주 장렬하게 말이지.딸을 살리는 대신 말이야.( 예전에 브루스 윌리스가 딸의 연인을 대신하여 장렬하게 우주에서 산화하는 영화가 있었는제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아 )
그러나 현서는 죽었네.나도 처음엔 현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헷갈렸다네.현서가 살길 바라는 내 강력한 소망 때문에 그리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진짜 원인은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영화들의 문법과 이 영화의 그것이 너무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네.
음,다른 문법으로 글을 쓰는 재능,이것이 봉준호의 재능이라네.깐느가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던 것은 이 문법의 특이함 때문이었어.
결국 가족은 최종적으로 와해되네.영화 마지막엔 ,그토록이나 영웅적으로 분투했던 박해일이나 배두나는 자취 조차 찾을 수 없어지네.가족의 기둥이었던 변희봉은 영화전반부에 이미 죽었고,가족의 보석이었던 현서는 영화 말미에 사라졌어.


그런데 오히려 송강호는 현서가 구해낸 노숙자 소년과 가족을 이루게 된다네.새로운 가족인 것일까? 아닐 수도 있네.이것은 어쩌면 살아남은 자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어.
가족은 없어졌네.도움 받지 못한 자들,희생당하고 만 자들의 연대만 남는 거네.그리고 봉준호는 그 뒤에서 속삭이고 있네.사물의 겉껍질만을 보지 말고 진정한 이면을 보라고.우리를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그리고 도와줄 의도를 가진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느냐고.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라고...
여기서 이 영화는 눈물과 슬픔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네.
그러나 ,
그래도 현서가 없어져서 참 쓸쓸했네.
= =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별로'였다고 얘기했던 사람들도 상당수였네.그건 아마 아까 말한 '문법의
차이' 때문이었을 거야.우리가 보길 원했던 익숙하고 희망적인 결말과는 거리가 먼,낯설고 조금은 지성적인 최종점으로 영화는 관객을 인도했으니까.소망과는 거리가 다소 떨어진 '낯선 결말'에 대해서 관객들이 '별로'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이 영화의 결말과 닮아 있네.판타스틱한 승리는 스크린 위에서나 존재하며,현실에서는 빼앗기고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
그리고 상실의 고통과,투쟁에 대한 의지가 남네.영화 마지막에 송강호는 고립된 한강변의 매점에서 ,그에게 마지막 남은 소년 동료와 '밥'을 먹으며 한강변을 노려보고 있어.그는 더 이상 쉽게 잠들지 못할 거야.

= =
아주 잠깐만,이 영화의 1200만을 얘기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네.그냥 결론부터 얘기하세.600개가 넘는 상영관에서 얻은 역대 관객 동원 1위는 무가치한 것이네.우선 600이니 1위니 1200만이니 하는 숫자놀음은 내게 혐오스럽게 느껴지네.나는 박스오피스의 순위 자체도 싫어하는 편이야.그것은 내가 영화를 '예술'이라고 치부하기 때문일 거야.그래서 나는 '예술'들이 상품화하는 것을,그래서 수퍼마켓의 채소들처럼 가격표가 달려 진열되는 것을 싫어하는 거겠지.
그것은 그러나 내 관점일 뿐이네.옳다,그르다 얘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작품이 '상품'일 수 있다는 생각도 우린 받아들여야해.그러나 상품은 공정하게 거래되어야 하지 않을까?
600개의 스크린을 점령한다는 것은 일종의 독과점행위이네.공정하지 않다고.상인들이 상품의
우량성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변명은 그저 변명일 뿐일세.'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말,어디서 듣던 말 아닐까?
우리가 스크린쿼터의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독점'을 혐오하기 때문일 것이네.독점은 약자를 살해하고 다양성을 짓밟네.품목이 '문화'의 범주에 들어가면 더욱 더 그렇네.
미국과 자본주의,그리고 독점을 모조리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괴물의 600개에서 자꾸만 미국이 어른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네.독점하는 것은 한국이 되었든 미국이 되었든 다 반대할 수 밖에 없네.그래도 같은 나라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말은 매우 한가하게 들리네.헐리웃이 돈을 챙겨가든,충무로의 일부가 부자가 되든,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늘 똑같으니까
말이야.
반미영화가 가져온 결과치고는 참으로 씁쓸하지 않은가? 남을 밟아야만 올라설 수 있다는것,그것도 다른 가치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이것이 우리사회의 근간처럼 자릴 잡았네.두려운 일이야.
난 1200만 관객이 드는 영화 두 개보다는 300만 관객이 드는 영화 다섯 개와 오십만도 안 되는 관객이 보는 조그만 영화들이 많은 쪽이 훨씬 건강할 거라고 생각하네.( 김기덕의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니 논외로 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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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스러운 편지를 끝마치기 전에,몇 가지 소품스러운 얘기들을 해 보세.그냥 재미로 말이야.한강다리의 교각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총 한 방에도 비틀거리는 그 괴물 말이야.그 '괴물'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면 어떨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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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얘는 그냥 본능에 충실했던 것이 아닐까? 어쩜 얜 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할 거야.얘를 어떻게 사로잡아서,길들인 다음에,자신을 이렇게 괴물로 만든 대상을 향해 복수하게끔 만드는 만화영화라면 어떨까? 그 경우 무대는 용산이어야 하나,아님 맨허튼이어야 하나.또 그 경우 현서는 킹콩의 여자친구처럼 변해야 하나,아님 마징가제트의 쇠돌이가 되어야 하나..
아무래도 그만 두는 것이 낫겠지?
남극일기의 감독인 임필성은 '뚱게바라'라는 이름의 386대기업 직원으로 등장한다네.박해일의 선배인데 후배를 배신하지.뭐,386은 이제 수명을 다한 정치적 마케팅 용어이므로 그냥 지나친다 쳐도,임필성이라는 배우 자체를 보고 난 무척 감탄했다네.
그는 명배우,아니 명조연배우 내지 명까메오 전문배우가 될 소양이 다분했어.연기를 잘 해서가 아니라 외모가 완벽했네.그는 느끼한 외모에 느끼한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었어.어차피 그가 이 편지를 볼 것이 아니기 때문에,더욱 자신있게 말할 수 있네만,난 그가 계속 '뚱게바라'같은 위선적인 역할을 많이 맡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어.주변에 꼭 그렇게 생긴 녀석이 하나 있는 것 같아서 ,얼른 머리를 굴려보았는데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 밖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그만 했음 하네.이젠 좀 지쳤거든.만나서 얘기하도록 하지.
저번에 내게 봉준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던가?
난 그가 아주 영리한 친구라고 ( 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주게나 )생각하네.장진도 영리하지만,그는 소품에 매몰되었고 큰 스케일은 힘겨워하지.거기에 비해 봉준호는 큰 스케일도 감내하는 친구야.그에게선 여러 연령대가 감지되네.
잘 있게.아이들과 그대의 아내가 건강하길,그리고 그대의 가정이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겠네.그리고 이 영화를 여태 보지 않았다면 미안하네.너무나 많은 얘길 미리 해 버렸으니.
이상한 얘기네만 우리가 알아온 20여년의 세월 동안 같이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네.
정말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