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식물성 소녀가 인류를 구원한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폴사이먼 2004. 6. 15. 03:54

이젠 아무도 인류의 구원 따위를,세계의 구원 따위를 심각하게 얘기하지 않는다.고작해야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만이 열정적인 율동을 섞어가며 그런 문제를 돈 달라는 앙탈과 더불어 뇌까려댄다.구원이라는 테마는 이제 인기가 없다.

 

 최근의 영화 역시 진정한 구원 문제를 다루는 일은 거의 없다.고작해야 스펙터클하게,그리고 흥행을 생각해가며,근육질의 영웅을 설정하여 그야말로 말하는 척 할 뿐이다.운석이 떨어지거나 지구가 얼어붙어서 생기는 최후의 멸망은 멸망이 아니다.그건 우연한 사고에 불과하다.그런 영화들이 내게 갖게 하는 감정들은 우리가 사는 별 지구 역시 언젠가는 별의 운명처럼 없어지고 말 한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구원이라는 항목은 지금의 사람들에게 이미 별 매력을 갖게 하지 못하는 항목으로 전락했다.아마 최근 들어 우리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고,우리의 생각이 타인이나 우리를 둘러싼 세계보다는 바로 우리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즐거운 생활 만을 위하여 집중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최근 우리 사회의 웰빙 (well being)  열풍은 이러한 경향을 씁쓸하게 대변한다.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어쩌면 우린 우리가 구원해야 할 대상을 처음으로 잃어버린 세대에 속하는 지도 모르니까...

 

얘기가 좀 딱딱해지기 시작한다.목각인형 주제에 인류의 구원이라니..정말 가당챦군,하고 혀를 차시는 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사실 난 영화에 관심 있지 인류의 구원 따위에 관심 있는 건 아니다.구원할 사람 쌔고 쌨는데,나까지 나서면 좀 혼잡스러울 것이다.

 

내가 관심있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영화이고,그 영화에서 구원을 얘기하고 있기에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그리고 이 말을 덧붙이자.구원이란,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의 혀 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몸동작과 행동에서 온다는 것을...

 

자ㅡ 수다 그만 떨고 구원에 관해 말했다는 영화로 돌아가자.

오늘의 메시야,세상을 구원했다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나우시카, 미야자키

 

 1984 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소녀,내가 언제나 그녀를 일컬을 때 '식물성 소녀'라고 중얼거리는 소왕국 바람계곡의 공주 '나우시카'이다.물과 바람과 풀들 사이에 서 있는 자연친화적인 소녀,.바로 '나우시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그의 이름은 이젠 낯익은 이름이 되었다.생각나는 대로 그의 필모그래피를 주절거려보자.

 

<미래소년 코난> .

 

30 대 이상의 관객들에겐 몹시도 낯익은 이름이다. 아마 KBS 방송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방영했던 것 같다.코난과 라나,그리고 퍼비,그들의 하이 하버.. '푸른바다 저멀리 새 희망이 넘실거리네'로 시작하던 주제가..

 

 

난,일요일 아침마다 방영되던  이 만화영화를 보느라고 일요일 자율학습을 빼먹기 일쑤였었다.그러나 난 그 시절 입시공부 몇 시간 보다는 코난의 지극한 라나에 대한 사랑과,그들이 뛰어다니던 푸른 바다와 산들에게서 훨씬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물론 정서적 도움이지만 말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이건 그로부터도 더 옛 시절,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수요일인가 목요일인가의 저녁 6시쯤 MBC 에서 방영했던 만화영화이다.숨을 헐떡거리며 산들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그 조그만 소녀 하이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리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아서 그런 하이디를 잔잔한 미소로 쳐다보던 클라라의 모습까지도..

 

또 <빨간머리 앤>은 어떤가..이미 엄청난 매니어를 확보하고 있는 그 주근깨 소녀.내 여동생,퀼트에 빠져서 온통 집안을 자신의 퀼트 작품으로 메꾸고 있는 내 여동생의 또다른 컬렉션은 바로 <빨간머리 앤>의 비디오 테이프이다.나 역시 노래방에서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을 불러제낀다.그녀에 대한 오빠로서의 예의로 말이다..

 

그리고 하야오의 수많은 걸작 극장용 애니메이션들.

 <천공의 성 라퓨타>,<원령공주>,<이웃집 토토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and 아,<붉은 돼지>

 

'이 쓰레기 같은 것들' 하고 멋있게 한 마디 뇌까리며,하늘을 비행하는 전투조종사 붉은 돼지..난 그에게서 아웃사이더의 기본 개념을 배웠다.<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거트를 연상시키는 그 히어로 돼지는,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새로운 감각을 체험한 후, 사람에서 돼지로 변화하며 아웃사이더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그는 단순한 에피소드나 드라마를 다루지 않는다.그는 우리가 속해 있을 것 같기도 하고,또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기도 한 세계를 마치 조물주가 천지창조 하듯 만들어내고, 거기서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들을 다룬다.따라서 우리는 그가 창조한 새로운 세계에 편입되며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에 함께 참여한다.그의 세계가 위기에 빠지면 우리도 조마조마해지고,그 세계가 위험에서 탈출하면 우리 역시 평온함과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그것이야말로 영화의 본질이 아닌가?

 

하야오를 말하기 시작하면 그렇지 않아도 수다끼가 다분한 이 글이 끝이 없을 것 같다.그냥 나우시카에게로 돌아가자..

 

이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1984년에 만든 극장용 에니매에션으로서 ,그에게는 그의 대중적 입지를 굳히는 데뷔작에 다름 아닌 작품이다.이 영화는 미국이나 여타 나라의 다른 만화영화와는 달리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 자체를 다루고 있으며 그 거대한 스케일 자체에 관객은 압도당하고 만다.

 

영화는 지구 문명의 종말 이후를 다룬다.문명은 '불의 7일간'이라는 최후의 전투 이후에 멸망해버렸고,이제 지구는 거대한 독소를 뿜어대는 강과 바다,부해라 불리는 균류들의 숲으로 변해버렸다.사람들은 여전히 부해를 태워버리는 방식으로 그에 대항하고,오무라 불리는 강력한 동물들은 그런 사람들을 공격하는데,오무의 시체로부터도 또다른 포자들이 생겨서 지구를 더욱 오염시키고 있다.

 

그러나 sl사람들은 여전히 전쟁에 집착하고,페지테와 트로메키아 (이름이 정확한지 어떤지 자신이 없다 ) 라는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한 전쟁과 부해와 오무에 대한 정복욕에 집착하고 있다.그들의 전쟁이 이 영화의 기본 얼개인데,거기에 바람계곡이라는 소왕국이 등장한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천혜의 바람 때문에 유독 가스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이 조그만 공동체는,페지테와 트로메키아 사이의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고 마는데,나의 소녀 '나우시카'는 바로 이 왕국의 공주이다.나

 

 

어깨에 여우고양이를 태우고,바람의 흐름에 맞추어 비행정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이 소녀는,전쟁의 와중에서 인류를 구원하게 된다.인질로 잡히고 총에 맞고 다치고 깨지고 끝내 오무와 인간 사이의 대전투를 막으려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 소녀는 마치 메시아처럼 그려지며 결국 부활하게 된다.

 

그녀의 무기는 사실 아무 것도 없다.물론 검술과 비행의 천재이지만,그녀는 격렬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 처절하게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 누구에게도 없는 무기가 있다.그 첫번째는 끝없는 선의이다.그녀는 정말 끝없이 착하다.그리고 순수하다.나우시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그것은 근원적인 그녀의 캐릭터를 나타낸다.

 

 - 미워하지마..

 - 미안해.

 - 난 네 적이 아니야..

 - 난 괜챦아..

 - 그들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전쟁의 시기에 나올 수 있는 말들은 분명 아니다.그러나 나우시카는 이런 말들과 과감한 희생으로 인류를 구원한다.오무와 인간의 최후의 대결장에 이 소녀는 아낌없이 자신을 내던진다.그리고 죽어서 산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식물성이기 때문이다.매우 모호한 이야기이며도대체 왜 그녀를 식물성이라 지칭하는지 나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논증할 수 없지만,난 그녀가 동물보다는 식물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껴진다.땅과 자연에 뿌리박은 착한 심성,공격하기 보다는 자신을 주어버리는 기본적인 성격,자연에 대한 본능적인 친화력이 내가 그녀를 그렇게 부르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환상적인 푸른 창공과 물바다에서 동력도 뒤떨어지는 비행정을 타고서 다른 사람들의 강력한 전투기와 활공하며 전투를 펼치는 그녀의 이미지가 ,맹수를 앞에 두고  미소와 하늘거림으로 대항하는 꽃과 풀의 느낌을 연상시켜서 그러했을까?

 

그녀의 또다른 무기는,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영화 내내 욕망에 사로잡힌 동물적 인간들은 그녀를 배척하고 서로를 공격한다.인간들은 자연을 파괴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 한다.특히 트로메키아의 크샤나는 완전히 나우시카와 대척점에 선 캐릭터이다.그녀는 그녀의 문명이 가진 기술로써,부해를 태워버리려 한다.그녀의 무기는 파괴 그리고 파탄이다.

 

그런 크샤나에 비하여,나우시카는 자연과 대화하려 한다.sl동물이 되었든 식물이 되었든,나우시카는 선의와 친절을 가지고 접근하려 한다.상대편이 그녀를 공격하든 어쩌든 나우시카는 상대방을 보호하려 하고 이해하려 한다.영화의 시작 즈음,언제나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지게 될 여우고양이와의 첫 해후 장면부터가 그렇다.

 

공격과 방어에만 익숙해져 있는 여우고양이는 차분하게 손을 내미는 나우시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오히려 나우시카의 손을 깨물고 이빨을 드러낸다.그러나 그

어떤 공격에도 미소와 선의로 대항하는 그녀를 상처입은 여우고양이는 재빨리 이해한다.그들은 통한 것이다!

 

자신들을 해하려는 인간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공격성으로 대하는 오무들 역시 마찬가지다.처음엔 나우시카의 선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그들은 적의로 뭉칠 때마다 드러내는 붉은 빛깔로 나우시카를 배척하려 든다.그러나 나우시카는 그녀가 항상 내비치는 선의로서 오무를 설득한다.그러자 오무의 빛깔은 동물의 붉은 빛에서 식물의 녹색으로 변화한다.식물성 소녀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녀의 마지막 무기는 자기희생이다.노도처럼 인간들을 향하여 진군해오는 오무의 무리들 앞에 그녀는 자기 자신을 내던진다.그녀가 희생되고 나서야 오무들은 원래의 식물성 녹색 빛을 회복하며,세계엔 안온함과 평화가 깃드는 것이다.그리고 그제서야 인간의 동물적 공격성을 상징하는 트로메키아의 크샤나는 나우시카의 식물적 사랑에 감응하여 그녀의 군대를 회군하는 것이다....

 

식물성 소녀가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성 인간이 마냥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현실세계에서의 그들은 대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인다.더구나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은 대부분 실패한다.생각해보라.다른 사람에게 그저 퍼주기만 하고,미안하다,괜챦다는 말을 입에 담고 살며 생존경쟁에 조차 익숙하지 않은 그들이 현실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가?

 

아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20년이 지난 2004년에 개봉되었더라면,흥행에 크게 실패했을 것이다.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고 남들과의 살벌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미덕이 된 지금 사회에서 나우시카는 무언가 부적절하고 부적격이며 부적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도,그녀는 역시 실패했을 것이다.그러나 승리하는 것이 전면적인 가치는 아니다.현재의 생활가치에 식물성 소녀 나우시카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그녀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그리고 나우시카와 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아름답고 살 만한 사회인 것이다.영화 속의 바람계곡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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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영화를 영화로 먼저 보지 못했다.내게 약간 어려웠던 어떤 시절에 난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파트타임 응급실의사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그 시절은 내게 정말 암울했고 피로했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시기였다.그 당시 시간이 날 때 마다 찾았던 곳은 비디오방과 사우나,그리고 지방소도시의 도서관이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 시절,책 대여방에서 빌려보았던 열 권 짜리 문고판 만화였다.글씨는 조그맣고 줄거리의 앞 뒤 연결을 알려면 몇 십 페이지 앞을 보아야 할 정도로 번역이 엉망이었었다.그러나 밤마다 밀어닥치던 갖가지 환자들의 홍수 속에서,난 나우시카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나우시카의 입가에 언제나 떠올라있던 동그랗고 해맑은 미소가 만화 열 권을 읽고 있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다.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캐릭터들의 출연과,전체 문명마저 겨누는 듯한 무거운 메세지 속에서도 그녀 나우시카의 식물성 캐릭터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 세월이 이토록 흐른 지금 그녀를 떠올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 번 씩이나 책 대여방에서 나우시카를 '대여'했었는데,이 열 권 짜리 나우시카는 당시 내가 일하던 병원을 돌고 돌고 또 돌아서 책 대여방에 책을 회수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 무척이나 나를 당황시키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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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나우시카와 같은 식물성 소녀는 내게 이상향의 여인이 되었었다.꽃과 풀을 좋아하는 여인들에겐 무조건적인 호감을 품는 버릇이 한시적이나마 생기게 되었고,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꼭 정기적으로 꽃을 선물하는 돈 드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그렇지 않은가,,어떻게 나우시카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보호되어야 마땅한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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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어서 여러분은 내게 묻고 싶을 것이다.

 

 - 야,피노키오,너의 그녀는 나우시카 같은 식물성이냐,아니냐,솔직히 말해봐라..

 

물론,나의 그녀는 식물성이 아니다.나의 강력한 채근에 의해서 요즈음 들어서야 야채 먹는 것에 맛을 들이게 된 나의 그녀는 과거 육류가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가는 사람이었다.심지어 광우병 파동 때 소고기를,조류독감 때 닭고기를 아무 부담없이 먹던 사람이다.또한 나우시카와는 근본적인 캐릭터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그녀에게 불만 있느냐고?

 

없다.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상대가 나우시카가 아니라면 내가 식물성으로 변하면 된다고..

 

여러분은 말할 것이다.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고...또한 그런 일이 도무지 가능하기나 하겠느냐고..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세상 일이 되었든지,인간관계가 되었든지 누군가는 식물성 캐릭터를 수행해야 한다.그것이 그 관계의 근본적인 구원이 된다.물론 나는 수양이 덜 되었다.내가 완벽한 식물성 캐릭터라면 이렇게 구구절절 엉뚱한 소릴 늘어놓진 않겠지 않느냐 말이다.ㅎㅎ.

 

그러나 여전히 내 근본적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먼저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삶의 근원적인 압박에 대하여 초연하게 괜챦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을 향해 기초적인 몸짓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대강 그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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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길다.마음에 들지 않도록 길다.사실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들께 미안할 정도로 길다.그러나 어쩔 수 없다.나는 조금 오랫동안 이 '식물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왔다.물론 식물성인 양 가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그런 허깨비를 만날 때마다 정말 당황하고 괴로웠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그러나 난 그런 상황을 언제나 인생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함정이라고 생각한다.그런 함정 마저 즐기게 될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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