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There's no place like OZ!..<오즈의 마법사>
폴사이먼
2003. 5. 19. 01:58
아주 우울할 때,그야말로 기분이 꿀꿀할 때,내겐 그 상황을 천천히 뒤집어버릴 수 있는 한 가지의 묘책이 있다.그것은 환상적인 동화 같은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았는지,지금은 기억 조차 할 수 없지만 지루하고 쫀쫀한 나의 일상으로부터,가끔씩은 숨이 막힐 듯한 내 일의 스트레스로부터,완전히 그러나 잠깐이나마 벗어나버리는 데에는,<오즈의
마법사> 같은 묘약이 없다.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
1939년에 MGM 영화사가 만든 뮤지컬 영화의 걸작,<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빅터 플레밍이 감독하고,<오즈>이후 뮤지컬 세계를 석권하게 되는 주디 갈란드가 주연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었거나,텔레비젼의 '세계명작만화'로 보았거나,우리는 <오즈>의 얘기를 알고 있다.조금 거칠게 요약하자면 캔자스 (부시의 고향 텍사스가 아니라 다행이다.) 의 시골 소녀 도로시가,자신의 강아지 토토와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서 머나먼 마법의 세계에 떨어지게 되고,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일종의 로드무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영화 속 곳곳에 도로시의 환상적인 여정을 더욱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디테일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갖가지 유니크한 캐릭터들,도로시가 만나게 되어 여행을 함께 떠나는 친구들과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바로 그들이다.
영리하고 머리도 좋지만 자신에게 두뇌(brain)가 없다고 한탄하는 허수아비 (scarecrow)와,너무나 감성적이어서 곧잘 눈물을 흘리고 말아 온 몸에 녹이 스는데도 심장 (heart) 이 없다고 생각하는 양철 나무꾼 (ti
n woodman),백수의 왕으로서의 외양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용기(encourage) 가 없다고 걱정하는
겁쟁이 사자 (cowardly lion) 등이 도로시의 여행에 동반자로 합류하고,오즈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먼치킨 랜드의 난쟁이 족속들이 즐거운 춤과 노래로 영화의 뮤지컬 분위기를 확 북돋운다.
착한 마녀 글린다와 언제나 도로시를 위협하는 서쪽 나라 마녀가 도로시의 양 옆에 배치되고,도로시의 여행은 언제나 노란 벽돌길 (yellow brick road,엘튼 존의 노래가 생각난다) 을 따라간다.
도로시가 신고 있는 루비 구두 (ruby slipper)는 언제나 신비하게 반짝거리고 그녀가 잠든 양귀비 밭은 화사한 붉은 색이다.또한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살고 있는 에메랄드 시는,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항상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일종의 꿈의 장소이다.
이 모든 것들이 꿈처럼 어울려서,상상 속의 한 장소를 스크린 위에 만들어낸다.언제 어느 때이든,나는 그
꿈 속에 들어가서 따뜻한 바다 속에 누워있는 듯 안온한 행복감을 즐기곤 한다.실제의 영화에서 주디 갈란드가 신었던 루비 구두가 어느 미국인에게 16만 5천 달러에 경매 끝에 낙찰되었다고 하는데,그 구두의 주인은 루비 구두를 볼 때마다 자신만의 행복한 몽상에 빠질 것임이 확실하다.그 행복한 시간에 투자한 16만 5천 달러,꼭 아깝기만 한 것일까?
이렇게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영화의 어떤 것이 이토록 내게 매력적인 것일까? 아니,매력이라는 단어를 쓰니 좀 이상하다.이렇게 말을 바꿔보자.
'오즈'는 나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오즈'는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방아쇠를 살며시 잡아당기고,그러면 나는 탄환처럼 빠른 속도로
어딘가로 날아간다.어디로? 바로 오즈의 나라이다.
그 곳은 내가 속해 있는 이 곳과 너무도 다르다.완벽하게 컬러풀하다.아주 밝은 원색의 세계.착한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게다가 나는 이미 결말 까지 알고 있다.도로시는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현실세계와 오즈의 세계는 완전하게 대비된다.자기네 정원을 짓밟는다며 도로시의 강아지 토토를 없애려 하는 미스 걸쉬의 캔자스 세계는 우중충한 흑백으로 처리된다.그러나 오즈의 세계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아주 환하다.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지만,눈 뒷 쪽까지 따뜻하게 한다.
이 매력적인 세계로의 우아한 비상에 아름다운 전주곡이 없을 리 없다.주디 갈란드가 부르는 <오버 더 레인보우>..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머나먼 하늘 저 편을 바라보며,무지개 저 편 어딘가를 염원하는 이 노래를 부를 때,나는 내가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나 역시,갑자기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와 무지개 너머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그
'가고 싶다는 부드러운 열망'이 현재의 내 찌든 삶,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해결해야 할 걱정꺼리,고민해보아야 할 근심꺼리들을 저만치로 날려보내고 압도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오즈의 세상이다.
그 세상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세상'이다.모든 출연자들이 가볍게 노래하고 흥겹게 춤을 춘다.도로시를
위협하는 마녀마저도,이 세상을 구성하는 악세서리에 불과하다.그녀는 자칫하면 너무나 무미건조해질 수 있는 이 세상에 약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만 할 뿐,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마녀를 제외하면,모든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돕는다.이 곳에 성인 세상의 갈등이란 없다.요사이 나오는 아이들 영화,예를 들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같은 영화는 사실 아이들의 영화가 아니다.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그 아이들의 주변은 어른 세상의 갈등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오즈는 그렇지 않다.물론 아이들의 세계가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나도 잘 안다.그들에게도 암투가 있고 투쟁이 있다.음모와 거짓말이 있다.그러나 오즈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적인'요소들을 몽땅 제거해버린 세계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세상이다..
이 영화가 시작하기 전 영화의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뜬다.
- 동심을 가졌던 사람들과 동심을 가진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글쎄,어쩌면 '동심'이라는 단어가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어른들의 세계에서 분주하게 헤매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는 무언가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지나가버린 머나먼 시간에 대한 안타까운 갈구,그것이 동심을 찾아헤매는 어른들의 원초적인 심정이다.마냥 행복하기만 했던,또는 그렇게 '
알고 있을 수'있었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것은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무공해의 공간이다.참으로 소박한 공간이다.
지금 영화 같으면 컴퓨터 그래픽으로나 처리했을 듯한 그 '세상'은,모두 다 완벽하게 컬러풀한 세트이다.이것은 마치 어떤 특별한 장소들을 연상시킨다.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오즈의 놀이공원'에 가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놀이공원에 중독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런 놀이공원을 상상해보라.
반짝거리는 빨간 루비슬리퍼를 신고,노란 벽돌길을 따라 에메랄드 성을 향하며,만나는 사람들 모두 다가 친밀한 친구들이 될 수 있는 곳,허수아비와 사자와 양철나무꾼으로 변장한 인형들을 만날 수 있는 곳..나는
그 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돌아오게 된다.돌아온다는 것은 이미 운명처럼 예정되어 있다.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버리고 그 어느 세상을 향해 떠나더라도 또다른 삶이 그 형태만 바꾼 채 펼쳐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또 실제의 삶에서의 그러한 비상은,일종의 가공할 만한 모험이지만 반드시 행복과 성취를 보장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오즈'와 같이 완벽하게 순수한 세계를 구현해내는 영화들은,무해하게,관객에게 아무런 손상을 끼치지 않고 그의 손을 붙잡아 무지개 너머로 인도하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본원적인
기능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도로시는,캔자스에 다시 돌아온 이후,선언하듯 말한다.
There's no place like home..
집 만큼 좋은 곳은 없다..주디 갈런드는 아직도 신비로운 행복감에 젖은 두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녀의 말은 옳은가?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런 질문엔 물론 정답이 없다.백 명의 사람들에게 백 가지의 대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난 도로시와 생각을 달리 한다.나중에 그 어떤 후회를 하게 될지라도,난 어쩔 수 없이 오즈의 세계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언젠가 사우나 한복판에서 만났던 자칭 '역술인'도 그 비슷한 얘기를 내게 했던 것 같다.다만 내가 떠나게 될,그리고 만나게 될 세상들이 오즈의 그것처럼 순수하고 동화 같았으면 좋겠다는 어처구니 없고 안타까운 희망을 나는 여전히 품고 있는 것이다.내 이런 갈망이 점점 커져가는 것만큼 나는 늙어가는 것이다.
끝으로 사족 같은 이야기.
나는 술을 (그 이상한 음료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지만, 한 번 마시면 아주 늦게까지 끝장을 본다. (물론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
대부분의 마지막 술자리는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재즈바와 같은 장소가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언제나 내가 마지막으로 듣고 싶어하는 노래가 바로 주디 갈런드의 < OVER THE RAINBOW> 이다.그것도 꼭 '오즈의 마법사'의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으로,주디 갈런드의 아직도 앳된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그래야 그 날의 술 행사가 마감된다. 지직거리는 LP 판의 잡음에 섞여 들려오는 도로시의 레인보우는 그 어떤 강한 알콜보다 더 나를 취하게 한다.
어쩌면 내가 들이키는 술 자체도 '오즈'와 닮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내가 주다 갈런드의 노래를 통해 무지개 저 편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술 역시 잠깐이나마 마약 같은 효과를 통해 세상 바깥으로 마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오즈의 마법사'는 알코올 보다 훨씬 강력하다.오즈는 술 보다 나를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았는지,지금은 기억 조차 할 수 없지만 지루하고 쫀쫀한 나의 일상으로부터,가끔씩은 숨이 막힐 듯한 내 일의 스트레스로부터,완전히 그러나 잠깐이나마 벗어나버리는 데에는,<오즈의
마법사> 같은 묘약이 없다.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
1939년에 MGM 영화사가 만든 뮤지컬 영화의 걸작,<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빅터 플레밍이 감독하고,<오즈>이후 뮤지컬 세계를 석권하게 되는 주디 갈란드가 주연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었거나,텔레비젼의 '세계명작만화'로 보았거나,우리는 <오즈>의 얘기를 알고 있다.조금 거칠게 요약하자면 캔자스 (부시의 고향 텍사스가 아니라 다행이다.) 의 시골 소녀 도로시가,자신의 강아지 토토와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서 머나먼 마법의 세계에 떨어지게 되고,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일종의 로드무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영화 속 곳곳에 도로시의 환상적인 여정을 더욱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디테일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갖가지 유니크한 캐릭터들,도로시가 만나게 되어 여행을 함께 떠나는 친구들과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바로 그들이다.
영리하고 머리도 좋지만 자신에게 두뇌(brain)가 없다고 한탄하는 허수아비 (scarecrow)와,너무나 감성적이어서 곧잘 눈물을 흘리고 말아 온 몸에 녹이 스는데도 심장 (heart) 이 없다고 생각하는 양철 나무꾼 (ti
n woodman),백수의 왕으로서의 외양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용기(encourage) 가 없다고 걱정하는
겁쟁이 사자 (cowardly lion) 등이 도로시의 여행에 동반자로 합류하고,오즈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먼치킨 랜드의 난쟁이 족속들이 즐거운 춤과 노래로 영화의 뮤지컬 분위기를 확 북돋운다.
착한 마녀 글린다와 언제나 도로시를 위협하는 서쪽 나라 마녀가 도로시의 양 옆에 배치되고,도로시의 여행은 언제나 노란 벽돌길 (yellow brick road,엘튼 존의 노래가 생각난다) 을 따라간다.
도로시가 신고 있는 루비 구두 (ruby slipper)는 언제나 신비하게 반짝거리고 그녀가 잠든 양귀비 밭은 화사한 붉은 색이다.또한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살고 있는 에메랄드 시는,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항상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일종의 꿈의 장소이다.
이 모든 것들이 꿈처럼 어울려서,상상 속의 한 장소를 스크린 위에 만들어낸다.언제 어느 때이든,나는 그
꿈 속에 들어가서 따뜻한 바다 속에 누워있는 듯 안온한 행복감을 즐기곤 한다.실제의 영화에서 주디 갈란드가 신었던 루비 구두가 어느 미국인에게 16만 5천 달러에 경매 끝에 낙찰되었다고 하는데,그 구두의 주인은 루비 구두를 볼 때마다 자신만의 행복한 몽상에 빠질 것임이 확실하다.그 행복한 시간에 투자한 16만 5천 달러,꼭 아깝기만 한 것일까?
이렇게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영화의 어떤 것이 이토록 내게 매력적인 것일까? 아니,매력이라는 단어를 쓰니 좀 이상하다.이렇게 말을 바꿔보자.
'오즈'는 나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오즈'는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방아쇠를 살며시 잡아당기고,그러면 나는 탄환처럼 빠른 속도로
어딘가로 날아간다.어디로? 바로 오즈의 나라이다.
그 곳은 내가 속해 있는 이 곳과 너무도 다르다.완벽하게 컬러풀하다.아주 밝은 원색의 세계.착한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게다가 나는 이미 결말 까지 알고 있다.도로시는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현실세계와 오즈의 세계는 완전하게 대비된다.자기네 정원을 짓밟는다며 도로시의 강아지 토토를 없애려 하는 미스 걸쉬의 캔자스 세계는 우중충한 흑백으로 처리된다.그러나 오즈의 세계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아주 환하다.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지만,눈 뒷 쪽까지 따뜻하게 한다.
이 매력적인 세계로의 우아한 비상에 아름다운 전주곡이 없을 리 없다.주디 갈란드가 부르는 <오버 더 레인보우>..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머나먼 하늘 저 편을 바라보며,무지개 저 편 어딘가를 염원하는 이 노래를 부를 때,나는 내가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나 역시,갑자기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와 무지개 너머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그
'가고 싶다는 부드러운 열망'이 현재의 내 찌든 삶,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해결해야 할 걱정꺼리,고민해보아야 할 근심꺼리들을 저만치로 날려보내고 압도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오즈의 세상이다.
그 세상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세상'이다.모든 출연자들이 가볍게 노래하고 흥겹게 춤을 춘다.도로시를
위협하는 마녀마저도,이 세상을 구성하는 악세서리에 불과하다.그녀는 자칫하면 너무나 무미건조해질 수 있는 이 세상에 약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만 할 뿐,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마녀를 제외하면,모든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돕는다.이 곳에 성인 세상의 갈등이란 없다.요사이 나오는 아이들 영화,예를 들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같은 영화는 사실 아이들의 영화가 아니다.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그 아이들의 주변은 어른 세상의 갈등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오즈는 그렇지 않다.물론 아이들의 세계가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나도 잘 안다.그들에게도 암투가 있고 투쟁이 있다.음모와 거짓말이 있다.그러나 오즈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적인'요소들을 몽땅 제거해버린 세계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세상이다..
이 영화가 시작하기 전 영화의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뜬다.
- 동심을 가졌던 사람들과 동심을 가진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글쎄,어쩌면 '동심'이라는 단어가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어른들의 세계에서 분주하게 헤매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는 무언가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지나가버린 머나먼 시간에 대한 안타까운 갈구,그것이 동심을 찾아헤매는 어른들의 원초적인 심정이다.마냥 행복하기만 했던,또는 그렇게 '
알고 있을 수'있었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것은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무공해의 공간이다.참으로 소박한 공간이다.
지금 영화 같으면 컴퓨터 그래픽으로나 처리했을 듯한 그 '세상'은,모두 다 완벽하게 컬러풀한 세트이다.이것은 마치 어떤 특별한 장소들을 연상시킨다.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오즈의 놀이공원'에 가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놀이공원에 중독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런 놀이공원을 상상해보라.
반짝거리는 빨간 루비슬리퍼를 신고,노란 벽돌길을 따라 에메랄드 성을 향하며,만나는 사람들 모두 다가 친밀한 친구들이 될 수 있는 곳,허수아비와 사자와 양철나무꾼으로 변장한 인형들을 만날 수 있는 곳..나는
그 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돌아오게 된다.돌아온다는 것은 이미 운명처럼 예정되어 있다.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버리고 그 어느 세상을 향해 떠나더라도 또다른 삶이 그 형태만 바꾼 채 펼쳐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또 실제의 삶에서의 그러한 비상은,일종의 가공할 만한 모험이지만 반드시 행복과 성취를 보장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오즈'와 같이 완벽하게 순수한 세계를 구현해내는 영화들은,무해하게,관객에게 아무런 손상을 끼치지 않고 그의 손을 붙잡아 무지개 너머로 인도하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본원적인
기능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도로시는,캔자스에 다시 돌아온 이후,선언하듯 말한다.
There's no place like home..
집 만큼 좋은 곳은 없다..주디 갈런드는 아직도 신비로운 행복감에 젖은 두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녀의 말은 옳은가?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런 질문엔 물론 정답이 없다.백 명의 사람들에게 백 가지의 대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난 도로시와 생각을 달리 한다.나중에 그 어떤 후회를 하게 될지라도,난 어쩔 수 없이 오즈의 세계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언젠가 사우나 한복판에서 만났던 자칭 '역술인'도 그 비슷한 얘기를 내게 했던 것 같다.다만 내가 떠나게 될,그리고 만나게 될 세상들이 오즈의 그것처럼 순수하고 동화 같았으면 좋겠다는 어처구니 없고 안타까운 희망을 나는 여전히 품고 있는 것이다.내 이런 갈망이 점점 커져가는 것만큼 나는 늙어가는 것이다.
끝으로 사족 같은 이야기.
나는 술을 (그 이상한 음료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지만, 한 번 마시면 아주 늦게까지 끝장을 본다. (물론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
대부분의 마지막 술자리는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재즈바와 같은 장소가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언제나 내가 마지막으로 듣고 싶어하는 노래가 바로 주디 갈런드의 < OVER THE RAINBOW> 이다.그것도 꼭 '오즈의 마법사'의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으로,주디 갈런드의 아직도 앳된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그래야 그 날의 술 행사가 마감된다. 지직거리는 LP 판의 잡음에 섞여 들려오는 도로시의 레인보우는 그 어떤 강한 알콜보다 더 나를 취하게 한다.
어쩌면 내가 들이키는 술 자체도 '오즈'와 닮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내가 주다 갈런드의 노래를 통해 무지개 저 편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술 역시 잠깐이나마 마약 같은 효과를 통해 세상 바깥으로 마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오즈의 마법사'는 알코올 보다 훨씬 강력하다.오즈는 술 보다 나를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