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토마스의 경우>

폴사이먼 2002. 9. 5. 01:05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프라하의 봄>.
원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난 이 영화를 사랑한다.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조금은
유치하게도 느껴지지만,난 그만큼이나 이 영화를 좋아한다.어느 정도냐하면,거처를 옮길 때마다 말하자면 이사를 갈 때마다 새로 이사간 동네의 비디오 가게에서 맨 먼저 빌려보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이다.이 영화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비디오 대여점을 나는 무조건적으로 불신한다.이유는 없다.합당한 이유를 둘러대보려고 해도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이상하지만 그렇다.


'프라하의 봄'을 맨 처음 본 때는 10년도 훨씬 저 너머의 어떤 때이다.아마 198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가하고 고즈넉한 평일의 가을날 오후였다.가을이 원래 그렇듯이 나는 당시 무언가 평화로운 기분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같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우리 학과의 몇 안 되는 여학생 두 명이었고,그들과 함께 영화를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왜 그들과
함께였는지,왜 하필 '프라하의 봄'을 보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특별히 그 영화에 끌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지금이야,난 그 영화의 주인공 배우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팬클럽 회원일 정도로 열렬한 그의 팬이지만,당시엔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오는 영화를
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으며,원작소설인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도 영화 '프라하의 봄'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또 지금이나 그때나 그 영화의 감독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적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편은 아니다.어쩌면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후 난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이 영화와 오랜 인연을 이어왔고,출연한 배우들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쥴리엣 비노쉬 그리고 레나 올린이 나오는 영화들이라면 무조건적인 선의를 품은 채 찾아보게 되었다.


왜냐고?
이 로맨틱하고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이며 사랑과 인생과 사회를 다루는 영화엔 분명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특히 주인공격인 토마스와 테레사의 극적인 삶은 인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자체를 웅변하는 것 같아 내게 오래도록 그들의 삶을 반추하게 만들었었다.아마 그들의 무언가가 나의 무언가와 그 주파수가 정확히 일치했던 모양이다.그리고 그런 종류의 영화가 오래 가는 법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상깊은 캐릭터들 중에서도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토마스의 인생이 오늘의 글이다.

그는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살아가는 젊고 실력있는 신경외과 의사이다.그런데 1968년은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기념비적인 해이다.자본주의와 식민제국주의를 반대하는,모든 종류의 체제적인 억압에 대항하는,영혼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에 눈 뜬 구미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 해 1968년에 한꺼번에 일어나 그들의 적들을 향하여 분노를 터뜨렸었다.그들을 우리는 '68세대'라 부르는데,그들이 자신들의 혁명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저항 자체로 그들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자유의 물결이 파도처럼 터뜨려지던 1968년 당시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살아가던 체코에도 새로운 정치적 변화의 바람이 움튼다.당시의 공산당 서기장인
두브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창한 것이다.그것은 체코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폐쇄적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듯 비쳐졌고,체코의 젊은이들은 서구의 문화에 열광하기 시작했다.그들은 미국식 청바지를 입고 비틀즈의 노래들을 불렀다.작가들은 자유를 노래했고 대중들은 그들의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전의 체코문화를 찾았다.그들의 자유가 도미노식으로 다른 나라로 퍼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고자,소련이 장갑차와 군인들을 동원해 프라하 시가지를 침공하고 두브체크 등 당시의 지도자들을 모스크바로 소환해갈 때까지 체코인들은 그들만의 짧은 자유를 즐겼다

이 영화의 주인공 토마스 역시 그러한 자유의 흐름 속에 서 있다.그러나 그의 '자유'는 희한한 방식으로
표출된다.그는 프라하 최고의,아니 체코에서 제일 가는 희대의 '플레이보이'인 것이다.그는 거의 닥치는대로 여성들을 유혹한다.일터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출장지에서도 그는 어디에서나,타고난 자신의 그윽한 눈빛과 벨벳 같은 목소리를 무기삼아 여인들을 낚는다.

그러나 주의하자.그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의
'바람둥이'라고 해서,그의 특출난 바람끼가 '정치적인
자유로움'을 대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도 도처에 널려 있는 '그저 그런 플레이보이'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스런 일이다.어떤 외부적인 상황잣대,예를 들어 '정치'라든가,'시대'에 의해서만 인간을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예를 들어 누군가가 '좌파 평론가'이기 때문에 혹은 누군가가 '극우논객'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생각인 것이다.사람에겐 자신만의 내밀한
지점이 있으며,그것을 파악했을 때만이 '아,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라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것이다.그런 점에서 볼 때는,정치적인 이슈에 의해서 그 행위가 왔다갔다하는 인간이란 무언가 꼭 필요한 알맹이가 빠져있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토마스란 플레이보이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그의 애정행각을 하나하나 뜯어보자.

우선 그에겐 '작업'이 없다.작업에 들어가네,어쩌네 하는 속 빤히 들여다보이는 예비과정 같은 것은 깡그리 생략한다.

그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그리고 섬세하고 길고
가는 손가락을 턱 밑에 괸 채 송두리째 빨아들일 것 같은 눈매로 상대를 응시하며 ㅡ남자들도 반해버릴 것
같은 눈빛과 웃음이다 ㅡ 단 한 마디를 내뱉는다.

Take off your clothes!

이것이 그가 행하는 소위 작업의 전 과정이다.상대방의 심리를 간파하려는 치졸한 노력이나,밀고 당기는 심리전,선물공세나 자신을 과대포장하려는 화려한 말재주,그럴듯한 장소에서 분위기 잡기등의 평범한 공식
따위를 그는 전혀 무시해버리거나 아예 알지도 못한다

게다가 그는 특별히 상대를 가리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그 어떤 여성이든 토마스에겐 유혹의 대상이 된다.아니,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그에게는 모두 똑같게 보이거나 아니면 그들 모두에게서 각각의 특별함을 얻어내는지도 모른다.토마스의 오랜 친구 (물론 bed mat
e이다) 사비나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 토마스는 여자들을 이해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혹시 이 말이 토마스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토마스에겐 여타의 평범하고 조잡스런 '바람둥이'들이 가지지 못한 그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소리이다.그것은 토마스가
'변강쇠적인'성적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무엇보다 토마스는 상대방의 가장 개성적인 면,상대방의 가장 '상대방적인 면'을 알아채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존재와 존재를 가장 근접하게 소통 (co
mmunication) 시키는 능력,그것이 토마스의 최대의 무기이자 미덕이다.

그러나 우리는 토마스의 편에 서서,그 자신의 이야기도 경청해보아야 한다.

- 내겐 세상 여자가 모두 다 신대륙 같아.그리고 난
그들의 비밀을 찾는 거야.상상할 수 없는 섬세함,
그들만의 독특함을 찾는 거야.

그는 마치 가장 순도 높은 보석을 찾아헤매는 감정사처럼,가장 황홀한 미각적 체험을 찾아다니는 미식가처럼,곳곳에 서 있는 여인들의 개별적 주파수를 갈구하고 다닌다.그런 그에게 상대방의 외모나 지성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그에게 중요한 것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그녀만의 특별함'인 것이다.따라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콜렉터'인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쩌면 자신의 콜렉터로서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한 자구책일지도 모르는 하나의 기벽이 있다.

그는 절대로 파트너의 거처에서 자고 가는 법이 없는
것이다.상대방의 존재적 내음을 완전히 인식하게 되면
그는 또다시 그 곳을 훌쩍 떠나,자신만의 공간으로 되돌아오고 만다.그의 오랜 연인 사비나가 그런 그를 막아보려고 그의 양말을 감추는 등 온갖 소동을 피우지만 그의 내면까지 붙잡을 수는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자,독자 여러분은 거의 미학자를 방불케하는 이 체코
출신 플레이보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는 불행한
사나이인가,아니면 이기적인 사나이인가..
무엇보다 이 아웃사이더적인 플레이보이는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내 생각엔,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존재'
이기 때문이다.토마스는 평범한 우리가 당연히 수행해야 할 것처럼 느끼는 모든 인간관계,예를 들어 연인이나 부부 가족관계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그가 그런 관계를 능동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그는 그런 종류의 상황과 의무감을 애초부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며,모든일에 아무런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그에게 현실은 공기처럼 가벼운 그 무엇이며,물처럼 미끄러운 어떤 것이다.그는 그 사이사이를 천천히 유영하며 수초와 꽃들의 향기에 탐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그 관계에서 당연스레 파생되는 무거움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벼움
을 택하게 되고 상대방은 그런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것이다.그런 상대방에게 그는 마치 최소한의 매너인양,'부드러움'과 '직관'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이런 종류의 인간인 토마스에게 우리가 엄하고 매서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 필요는 없을 것 같다.이토록 현실과 유리된 인간에겐,이토록 현실과 어긋난 인간에겐,현실 그 자체가 부메랑 같은 복수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평범한 우리 대신 말이다.
그리고 그 복수는 느리고도 가혹하다.

현실의 복수를 위해 영화는 다른 종류의 얘기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는 출장지에서 그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사랑스런 여성 테레사를 만나게 되고,자신의 모든 금기를 깬 채 그녀와 동거를 시작한다.토마스가 테레사를 사랑했는 지는 분명치 않다.다만 그가 그의 '플레이'를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테레사는 그의 바람끼에 격렬하게 저항한다.그녀는 처절하게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으로 그에게 반응하고,어느 새벽 그의 집을 나간다.황급히 그녀를 쫓아나간 토마스의 눈 앞으로 들이닥치는 것은,바로 프라하로 밀려들어오는 소련군의 탱크였다.그날이 프라하의 마지막 봄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달라진다.현실감을 더하듯 영화의 색조는 흑백으로 변하며,1968년 당시의 실제장면들이 다큐멘터리처럼 편집되어 삽입된다.저항하는 프라하의 시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소련군의 만행을 테레사는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아 해외로 유출시킨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테레사를 반소련분자로 낙인찍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토마스 역시 '프라하의 봄'시절 발표했던 반공적인 글 덕택에 일하는 병원에서 쫓겨나게 된다.그들은 곧 스위스의 제네바로 탈출한다.그러나 제네바의 그들은 프라하의 그들이 아니다.그들은 모든 현실적 어려움을 겪게된다.그러나 제네바에서도 토마스의 여성편력은 멈추지 않는다.테레사는 그런 그에게 절망하여 프라하로 돌아가버린다.

자 여기서 토마스는 기로에 선다.긴 코트자락을 흩날리며 제네바 거리에 선 채,지나가는 여인들에게 유혹의 눈빛을 보내며 그는 고민한다.테레사의 '무거움'을
허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국 그는 소련군 치하의 체코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가벼움'의 일부를 테레사에게 허용한 것이다.다른
말로 테레사의 '무거움'의 그의 가벼움에 더해진 것이다.

그러나 고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소련군 당국의 탄압이다.시골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그에게 소련군 당국자가 찾아온다.그는 - 폴란드의 유명한 배우 다니엘 올브뤼스키가 단역으로 출연한다 - 토마스에게 전향서를 내민다.예전에 그가 썼던 글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당국은 요구한다.토마스가 다시 한 번 변하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다.

그동안 현실과는 유리되어 살아왔던 토마스가 결연하게 '전향'을 거부하는 것이다.그것은 자신의 '바깥인생'이 어떻게 망가지든 간에 자신의 '내면인생'만큼은
절대로 지켜내겠다는 각오이다.그는 그를 압박해오는 현실세계에 더 이상 '무감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의지'를 보여준다.토마스는 여전히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천천히 전향서를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린다.

결국 그는 의사직에서 쫓겨나서 유리창 청소부가 된다.그가 현실의 무게를 느꼈을 때,다른 종류의 '존재의 무거움'을 느꼈을 때,그리고 그것의 '참을 수 없음;에 저항했을 때,그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고 만 것이다.그러나 토마스의 낙천성과 미소는 여전하다
그는 그렇게 유연하다.능숙한 솜씨로 그는 프라하의 고성들이 비춰보이는 유리창들을 닦는다.그리고 유리창 안에서 그를 지켜보는 여인들에 대한 그의 대사 역시 여전하다.

Take off your clothes!

그의 끝없는 가벼움에 테레사는 발작한다.그녀의 고통스런 일탈 이후에 토마스는 그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깨닫는다.그리고 테레사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인다.드디어 그들은 같은 차원에서 사랑하게 된 것이다.토마스는 프라하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테레사와 함께
체코의 전원으로 향한다.그곳에서 농부로 변신하면서,그는 드디어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깨닫는다.이 화해 역시 특별한 논리나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오로지 주연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눈빛과 미소만으로 표현된다.

이제 그의 눈빛과 표정은 완연하게 맑아진다.테레사를 바라보는 토마스의 눈 속엔 다정한 감성과 말랑말랑한 애정으로 가득한다.

어느 날 밤 그들은 시골마을의 댄스파티에 합류한다.그곳은 비틀즈의 생음악이 연주되는 프라하의 나이트클럽이 아니다.레오쉬 야나첵이 편곡한 체코의 전통음악에 맞춰 생동감 있게 춤을 추는 농부들이 가득한 환상적인 밝음이 있는 통나무 집이다.

다음 날 아침,집으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 테레사가 토마스에게 묻는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토마스의 눌린 듯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진다.

- 난 참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다.신록이 찬연하게 빛나는 전원의 도로 위에서,그날 그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나는 이 결말이 내가 본 영화의 엔딩 장면 중,가장 가슴아프고도 아름다운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토마스는 행복을 찾았을까...



_ _

오랜 세월에 걸쳐서 여러 번 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나의 이 영화에 대한 인상 역시 매우 다양하다.어떤 때는 토마스의 '플레이보이로서의 진가'를 생각해보았던 것도 같고 어떤 때는 세상에 대한 현실감각을 따져보았던 적도 있다.또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감각적 연기에 감탄을 연발한 적도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주인공 토마스가 유지했던 세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머릿속에 남는다.

나는 '행복'과 '불행'을 얘기하기에 앞서,'현실감'과
'비현실감'을 생각해보아야한다고 믿는다.자기가 속한
세상에 '현실감'을 느끼는 인간이란,그 세상과의 전투
속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또는 행복감을 가지든 불행함을 느끼든,그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에 뛰어드느냐,뛰어들지 않느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토마스는 게임을 외면했었다.세상의 사소함과 쓸 데 없는 의무관계에 '하챦음'을 느낀 그는,그 곳에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자신만의 미학적인 세계 속을 걸어다녔다.이것 자체는 죄악이 아니다.그러나 인생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때,그는 결연하게 자신의 '소신'과 '사랑'쪽을 선택했다.아주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그리고 한 치의 후회감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그것은 '비현실감'과 '현실감'을 함께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냉정함이다.
그 냉정함이 나는 부럽다.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용기있는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_ _

다음 글은 테레사의 입장에서 써보려고 한다.가장 가벼운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 말이다.

끝으로 이 영화가 개봉된 직후,원작자 밀란 쿤데라는
노발대발했다고 한다.자신의 소설을 포르노그라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는데,나는 그에게 이 세상 모든 사건들이 죄다 포르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