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기행3.-<축구는 영원하다.코르넬리우 포름보이우>
전주 영화제 첫날 오후의 영화는 루마니아의 코르넬리우 포름보이우 감독의 <축구는 영원하다>였다.
희한한 제목처럼 영화는 실제로 축구에 대한 얘기를 다루는데,코르넬리우 포름보이우 감독 자신이 출연하여 친구의 형인 듯 보이는 남자와 시종일관 축구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영화이다.(다큐멘터리라고도 볼 수 있는데,사실 포름보이우 자신의 전작 중에도 이와 비슷한 영화가 있다.<세컨드 게임>이란 이름의 영화로,축구 심판 출신인 감독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앉아서 아버지가 주심을 보았던 옛 축구 시합의 녹화 화면을 다시 보면서 그 때의 시합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영화였다.갑자기 루마니아의 축구 황제,발칸의 마라도나라고 불렸던 게오르게 하지가 생각났다..)
이 남자는 축구 규칙을 바꾸고 싶어하는데,그것은 그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다.그는 소년 시절 축구 시합에서 다쳐 아래다리 뼈 (비골 fibula이었던 것 같다) 골절을 당했고 그 골절의 휴유증 때문에 축구 선수의 꿈을 포기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하지만 영화는 그의 축구 실력 자체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는다) 그는 축구 규칙의 폭력성이 자신의 다리뼈와 꿈을 부쉈다고 생각하고 축구 규칙 자체를 바꾸고 싶어한다.
이것은 꽤 인상적인 태도다.즉 그는 자신을 다치게 한 축구를 폭력적인 스포츠라고 외면해 버리거나 폄하하는 게 아니라,축구 자체에 개입해 규칙을 바꿈으로써 축구라는 세계 자체를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그는 자신이 제안한 새 축구 규칙을 지속적으로 FIFA에 제안하고 있다) 여기에 루마니아의 열악한 보건 환경이 추가된다.그의 부러진 다리뼈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몇일간 방치되었고,최초로 들른 병원에서도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해 발목관절이 영원한 불안정성의 수준에 머무르고 말게 된 것이었다.(즉 루마니아란 나라 자체가 그의 축구 인생에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가.
그의 규칙의 기본은 경기장을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해 -이것은 사실 축구 전략의 고전적인 접근이다.공격과 수비와 중간 (미드필드)으로 선수들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나누는 것 말이다- 놓고,3등분된 인원이 자신에게 허용된 구역 이외에 다른 구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아서 ,볼을 놓고 경합하는 축구 선수들의숫자를 제한해 부상의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낮추겠다는 것이다.또한 부상의 방지를 위해 직사각형인 기존의 축구 피치를 팔각형으로 -사각형의 네 모서리에 부드러운 굴곡을 집어넣어- 만들겠다는 또다른 규칙의 개정까지 생각해 놓고 있다.
마치 블랙 코미디의 일부로 느껴지기 까지 하는 이 얘기를 코르네이유 포름보이우와 그의 지인은 진지하고 깊이 있게 토론한다.물론 이런 아이디어는 기존의 축구가 가지는 장점- 맨몸의 부딪침이 가져오는 박진감,원초적인 속도감을 분사시키는 스피디한 질주,공간의 폭넓은 활용- 마저 없애버리는 황당한 결과를 낳을 것임이 틀림없다.영화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담자인 감독이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하고 있고,심지어 실제로 축구 코치로 활동하는 사람이 등장해 논의에 쐐기를 박기 까지 한다.코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버리는 것이다.
(문제의 축구 코치다.루마니아 축구팀 특유의 노란 색이 들어간 옷을 입고 있다.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이 영화의 감독이다)
그러나 우리의 축구 개혁자는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별로 개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보디 체크가 없는 밋밋한 아이스하키처럼 보이는 그의 축구 규칙의 난점을 또 한 번 개혁하고 개선해서 또다른 계획을 다시 제시한다.그 자신 역시 자신만의 축구 규칙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보완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점점 이 이색적인 축구광이 제시하는 축구 규칙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후반부로 갈수록 이 영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축구 이상주의자를 영화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영화는 점점 축구 규칙 보다는 이 축구광의 개인사로 그 초점을 이동시킨다.물론 그의 개인사 역시도 그가 얘기하는 축구 규칙과 연결점이 있긴 있지만,영화 내에서 그가 자신의 개인사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관객은 관객 자신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루마니아의 현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진다.
예를 들어 그는 미국으로의 이주 계획을 세우지만 911테러 때문에 실패한다.911이라는 사태는 그에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거대한 우연성이다.이 우연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축구 규칙이 축구 특유의 우연성 - 선수들의 예기치 못한 실수나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와 같은-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론과 함께 제시된다.또 그의 직업은 관공서의 민원 담당자인 것처럼 보이는데,영화는 90세가 넘은 어느 할머니가 그에게 찾아와 오래 전에 할머니가 소유했던,그러나 소유권을 정식으로 등록시킬 수 없었던 작은 토지에 대해 상담하는 장면을 꽤 오랫동안 삽입시킨다.
그러나 할머니의 민원을 그는 속시원히 해결시켜주지 못하게 되는데,그것은 루마니아 관료 체제의 폐쇄성과 비효율성 -아마도 사회주의 체제 때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왔던-,그리고 부서간의 속절없는 미루기 때문인 것으로 묘사된다.축구라는 체제 하나를 변형시키기 위한 그의 지속적이고 빛나는 아이디어 제안과는 정반대로,그의 일상적인 직업 업무는 매우 답답하고 쉽게 뚫리지 않는 닫힌 체제인 것이다. 그가 축구 체계의 개혁에 몰두하는 일면적인 이유 역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루마니아 체제의 비합리성과 폐쇄성에 대한 반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 어떤 가정으로 이동한다.아마도 주인공의 아버지 집-그러니까 감독에겐 친구네 집이 되겠다-을 방문한 두 사람은 집안의 가장인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할아버지가 얘기하는 것은 주로 과거다.그는 옛시절의 액자와 사진첩을 들고 와 과거를 아련하게 회상하는가 하면,옛 시대의 축구를 가볍게 찬양한다.그때가 독재자 차우세스쿠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다음 세대의 구성원들인 코르넬리우 포름보이우 감독과 우리의 주인공은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이다.그러나 이 할아버지를 영화가,마치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는 우리나라의 노년 세대의 일부 사람들처럼 그리지는 않는다.(루마니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장면은 그저 축구와 좋았던 어떤 시절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는 가벼운 스케치처럼 묘사된다.그러다 영화는 사라지듯 끝난다.
<축구는 영원하다>의 '축구'는 루마니아일까? 아니면 우리가 상시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각종 크고 작은 체제들일까? 영화가 얘기하는 축구가 꼭 루마니아의 은유인 것일까? 쉽게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그러나 루마니아가 되었든 '체제'가 되었든 영원한 축구에 대한 개혁은 어렵고도 어렵다는 사실을,거기엔 수많은 개인사와 수많은 계층간의 문제들,또 세월에 대한 좋고 싫은 기억들이 함유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무심코,또 어쨌든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변화되어야 할 축구-체제,폭력적이지 않고서도 스포츠 특유의 아기자기함과 박진감을 잃지 않아야 할 축구-체제를 만드는 데에는 생각 보다 더 심각한 노력과 아이디어가 필요할 거라는 사실 역시 영화는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중요한 건 이상주의자의 존재다.어렵고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상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그들은 '영원한 축구'를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또 제기한다.그래서 그들은 축구의 이상을 위해 거의 필요불가결한 사람들이다.그들 없이 축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축구 자본의 놀이판이 될 것이다.그들의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가 언젠가 그 결실을 맺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상주의자 뿐만 아니라 '덕후'역시 우리는 필요로 한다.덕후는 체제의 하부와 모서리에서 자료와 디테일을 축적해 씨앗과 거름이 될 수 있다.단 그 '덕후'들이 이권과 돈에 개입해 주변에 상처를 내려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에서만 말이다.(과거의 '정치 덕후'였던 드루킹은 틈새 시장을 노리고 인터넷 한 구석에서 작은 사이비 종교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이런 종류의 덕후들을 모조리 백안시하거나 박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드루킹의 과거 행적과 그의 현재를 보면서,인터넷 논객이라는 어떤 세대 덕후들의 영화와 자멸을 본다.욕망을 쫓는 덕후들은 자신의 이상을 잃는다)
윽,월드컵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