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기행-Routine.ticket to the another world

폴사이먼 2018. 5. 12. 10:15

1.어린이날.


오랜만에 전주국제영화제를 다녀 왔다.지척에 위치한 도시인데도 그동안 가지 못했던 것은 전주국제영화제 (이하 JIFF)가 열리는 기간,바로 그 시점 때문이었다.JIFF는 대개 5월 첫째주에 시작해서 그 다음 주까지 진행되는데,-이 오월의 봄볕이야말로 JIFF의 주된 무기 중 하나이다- 이 기간엔 바로 우리 집의 주된 명절 중 하나인 어린이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한 이 기념일의 존재 때문에 지난 6년 동안 나는 전주에 갈 엄두 조차 내지 못했다.어린이날엔 딸을 챙기는 게 당연한 듯 우선시 되었기 때문이다.(꼭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실 분도 있겠지만,각 가정엔 그 가정의 룰이 있는 거다.아버지도 어린이날엔 언제나 나를 챙기셨다)


그러나 이제 내 딸 은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나름 사춘기에 접어들어 점점 독립적인 존재임을 부각하는 은별이에게 아내와 나는  말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너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다.따라서 어린이날은 너의 날이 아니야.이제 우린 어린이날에 우리 나름대로의 자유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은별이가 유유히 대답했다.

-응,괜챦아.그런데 나도 어린이날엔 내 자유시간을 가져도 되는 거지?

약간 허를 찔린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속으로만 대꾸했다.

-그래 욘석아,하지만 어버이날은 또 하나의 명절로 영원히 진행된다..


어쨌든 자유를 얻게 된 어린이날,나는 JIFF를 향하여,아내는 친구들과 여행을,그리고 은별이는 혼자만의 자유 시간으로,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2.ROUTINE


언제나 그렇듯 영화제는 예매 전쟁으로 시작된다.나는 어찌어찌 하다가 보고 싶은 영화를 다 놓치고- 이것도 언제나 그렇듯의 범주에 포함된다- 차선의 영화들을 예매하는 데에만 성공했다.그러나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워낙 여러 번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또한 영화제에서 보고 싶은 영화란 대개 우리가 우리를 거미줄처럼 둘러싼 멀티 플렉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영화들이다.그런 영화들을 고르면 되는 것이다.따라서 그 시간대에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놓쳤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다음으로 보고 싶은 영화들을 클릭하면 된다.그렇게 보면 된다.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체득했던 교훈이며 현실을 조용히 인정하는 또 하나의 첩경이다.그렇게 그렇게 영화제의 나날은 영화제에 가기 2주 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 영화제는 새벽의 알람으로부터 시작한다.언제나 아침 첫 영화를 예약하기 때문에 그 영화 시간에 맞추고 또 영화제의 티켓 오피스에서 미리 예매해 놓았던 티켓들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새벽 알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이번 역시 마찬가지다.알람 소리 이후,조용히 잠든 아내와 딸을 깨울라 가볍게 조바심 치며 고요히 움직여서 채비를 차리고 주차장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카페인이 필요하다.언제부턴가 레귤러 커피로는 밀려오는 졸음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결국 동아제약의 신비 음료 박카스가 필요해지고 진하디 진해 위장에 쓰디쓴 감각을 안겨 주는 에스프레소가 요구되고 만다.박카스는 영화관 안에서 보다는 고속도로 위에서 더 필요하다.영화관에서의 깜빡 졸기 보다는 고속도로 위에서의 졸음 운전히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속도로 위에 올라서면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다.보게 될 영화와 만나게 될 거리에 대한 기대가 묘하게 가슴의 부피를 늘려 놓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그 부피가 내 감정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감정의 변화가 단지 영화와 영화제에 대한 반응 만은 아니라는 것이 결국에 얻게 된 깨달음이다.사실 고속도로 위에서의 들뜸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관계가 있는 것이고,그것은 나라는 사람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감정이 그런 종류의 벗어남으로부터 얻어지는 에너지에 크게 의존한다는 결과론적인 앎을 이제는 얻게 되었다.


영화제 마다 루틴한 과정은 또 다르다.그 루틴 중 하나는 주차장이다.나는 언제나 전주엘 가면 전주초등학교 운동장에 자동차를 주차시킨다.아침 일찍 도착하기 때문에 약간은 휑뎅그레해진 운동장 한 구석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는 매우 느릿느릿 학교를 빠져 나오는 것이다.부산영화제에 갈 때 마다 차를 놓아두는 곳은 또 따로 있다.(이것은 부산영화제의 내 루틴이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아직은 쓰일 리 없는 '만차' 표시 푯말이 우두커니 한 쪽에 서 있다.놀란 건 jiff가 벌써 19번째라는 사실이다.마치 '애들은 오지 말라'는 19라는 숫자 표시가 오른쪽 모서리에서 반짝거리며 곧 성년이 될 영화제의 나이를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지나친다.나와서 걷는다.이것도 루틴이다.


티켓 오피스.예매해 둔 영화 티켓을 찾는다.티켓들은 곧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교통편의 왕복행 티켓으로 변할 것이다.

의외로 남은 20분의 시간.

강박관념처럼 돋아난 에스프레소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극장 언저리를 돌아 에스프레소를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다.하얀 종이컵 밑바닥에 가라앉아 마법 같은 냄새를 풍기는 검은 석유 같은 커피가 마음을 안정시킨다.그러니까 에스프레소는 각성제이자 안정제이다.


나는 주르륵 시네월드를 향해 떠나는 내 여행을 보증하는 비자(visa)들을 펼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