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의 밤-미야자와 겐지.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은별이와 교대로 읽다가,옛시절 읽던 동화책들을 떠올렸다.왜 그 시절엔 그렇게 전집류 동화책이나 위인전들이 그리도 유행했는지,우리 집엔 소년소녀 세계명작동화 내지 세계 위인전,또 한국 위인전 같은 타이틀을 단 어린이용 책들이 몇십 권 씩 책꽂이를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도심 한복판에 살아서 골목길 친구가 없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또 매우 분주한 부모님을 만나서 언제나 혼자만 있는 오후를 감당해야 했던 내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손쉽고 유일한 일은 바로 이 전집류 책들을 훑어 읽어내려가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책들,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은 아마 50권 짜리 책이었을 것이다.그리스 신화부터 시작해서 이솝 이야기,안데르센 동화집,소공녀와 소공자,쿠오레 -아마 '사랑의 학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것 같다- 15소년 표류기 알프스 소녀 하이디 톰 소여의 모험 플랜더스의 개 - 이 책엔 아마 다른 중편 소설도 실려 있었는데 제목이 아마 '뉘른베르크의 난로' 였을 것이다.난로 이름이 아마도 히르시포겔이었던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아닌 것 같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아라비안 나이트,피노키오 등등의 동화에,서유기 삼국지 수호지 같은 중국 고전의 어린이 버젼 그리고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동시나 동요 선집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책들이,오후 6시면 시작하던 TV용 애니매이션들과 함께 어린 시절 내 정서의 3분의 1이상을 형성했을 것이다.50권이나 만들려니 힘겨웠던지,출판사 쪽에선 세계 각지의 구전 설화나 동화들을 편집해서 미국 동화집 남유럽 동화집 북유럽 동화집 중국 동화집 일본 동화집 등의 이름으로 한 권의 동화책들을 시리즈로 50권 사이에 우겨넣곤 했는데,이 동화에 등장하는 각 대륙과 나라의 캐릭터들은 그 지역에 대한 내 첫인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가령 북유럽 동화집에 등장하는 청어 요리나 늙고 교활한 요정과 어딘지 어수룩한 거인들이 북유럽에 대한 내 첫인상을 결정지었던 거다.인도 동화집에 등장하는 어떤 영웅적 원숭이는 자신의 몸 전체를 희생해서 자신이 속한 원숭이 집단 전체를 살려냈는데,그의 희생을 묘사하는 '염통'의 끊어짐에서 그 '염통'이란 단어에 대한 궁금함 땜에 저녁 밥을 먹다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아빠,염통이 뭐에요.
그러나 은별이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오히려 낯설어 했다.은하철도를 타고 우주를 유영해 나가는 신비한 여정에 대해서도 은별이는 그렇게까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어쩌면 이 정도의 여행은 은별이에게 너무나 소소하게 느껴지는 지도 몰랐다) 더구나 미야자와 겐지의 우주에 대한 묘사는 은별이가 감당해 내기엔 너무나 먼 단어로 구성되어 있었다.작가는 각종 보석들의 이름과 그 보석들의 영롱한 후광들을 동원해서 은하철도에서 바라본 우주를 묘사해내고 있었는데,그 묘사는 21세기의 틴 에이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은별이가 황옥과 홍옥이란 단어를 알 리 만무하지 않은가)
오히려 옛 기억을 떠올리고 또다른 의미로 어리둥절해진 쪽은 나였다.나는 <은하철도의 밤>을 읽고 옛 시절의 계몽사판 일본동화집을 떠올렸는데,갑작스런 일본 동화작가들의 이름 -하마다 히로스케-이 어두운 기억 속에서 솟아올랐고,또 <은하철도의 밤>을 쓴 미야자와 겐지가 쓴 또다른 이야기가 그 동화집 안에 수록되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냈다.
<주문이 많은 음식점> 그 이야기의 제목이다.
기묘한 제목을 가진 희한한 이야기.그리고 그 희한함은 공포에서 비롯되었었다.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은 두 사냥꾼이 어떤 레스토랑- 산 속의 음식점이 레스토랑일리 없겠지만 분명히 이 이야기 속에서는 그 음식점을 서양식 식당인 레스토랑처럼 묘사하고 있었다-을 발견하고 들어가게 되는데,사실 그 레스토랑은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식당이 아니라,손님들을 요리해서 산 채로 음식으로 만들어버리는 두려운 공간이었다는 그런 얘기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미야자와 겐지가 가지는 서양 문화에 경도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시 일본 문화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사냥꾼들은 귀족들이었고 내 기억에 그들은 레스토랑을 발견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잘 난 척 하며 일본의 시골을 비웃고 있었다.그리고 그들은 결국 식당-서양 문화에 산 채로 먹혀버리고 마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일본 '동화'집 속에 포함되어 있었고 미야자와 겐지 역시 동화 작가로 알려진 사람이었다.이런 얘기가 동화라니 이 낯선 충격은 이렇게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의 내게도 여전한 충격을 재생시키고 있는 거였다.그러고 보니 <은하철도의 밤>도 마찬가지였다.은하철도를 달리는 기차에 탄 두 어린이-지오반니와 캄파넬라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미야자키 하야오로까지 건너 뛰는 그들의 유럽 취향은 이렇게 아이들의 이름에까지 반영된다- 중 한 아이는 철도의 꿈이 끝난 다음 익사한다.그러나 친구의 익사를 들은 다른 아이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그 아이는 아주 잠깐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충격을 받고 슬퍼하는 듯 보이더니,멀리 떠나간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또다른 새 소식에 가슴이 들떠 그 소식을 알리려 자신의 어머니에게로 곧바로 발걸음을 돌린다.상실에 대한 슬픔과 충격은 거의 완벽히 소멸되어 버린 듯 말이다.
일본과 일본의 정서는 그야말로 기묘하다.이상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지배된다.
우리의 동화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