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영화들-Scene of the year
2014년의 장면들 중 가장 내 눈 뒷쪽에 남아있는 씬들로 올해 마지막 글들을 구성할까 한다.왜 하필 이 장면들인지에 대해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다.짧은 점심시간에 떠올랐던 장면들이다..
12.<액트 오브 킬링>의 액트 오브 킬링
인간 야차,살아있는 괴물들을 보는 것 같았던 장면.그는 50여년 전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을 매우 자연스럽게 재연한다.확실한 확신범이다.우리나라로 치면 서북청년단의 일원이었던 노인이 그때의 학살에 여전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장면이다.<액트 오브 킬링>은 진실과 그 진실의 기록을 어떤 형태로 접근해야 하느냐는 데에 대한 혼란스럽고 난해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어쨌든 인간의 야수성과 문명의 잔혹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그리고 그 역시도 자신의 손자에 대해서는 인자하고도 인자한 할아버지다..(그게 오히려 더 끔찍하다)
11.<바람이 분다>의 하늘
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시각과 한일간의 미묘한 정치적 스탠스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지만,어쨌든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장면들은 거의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팬심에 의해서 걍 넘어간다.관동대지진을 묘사한 어떤 장면들은 그 어떤 실사영화나 헐리웃의 기술력으로도 넘어서기 힘든 스펙터클이었으며,무엇보다 다시는 그의 하늘,뭉게구름이 피어올라 있는 맑디 맑은 높은 하늘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약간 슬퍼지기까지 했다.아디오스 미야자키.
10.<비긴 어게인>의 마크 러팔로와 키이라 나이틀리의 밤 데이트 장면
진짜 데이트,진짜 좋은 시간 보내기,진짜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런 거다.그들은 밤새도록 같은 음악을 들으며 밤거리를 함께 쏘다닌다.이런 밤과 새벽엔 루틴한 시간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짧으면서도 긴 영원 같은 찰라다.언젠가의 옛 밤과 같은 장면.내게도 이런 밤이 있었던 것 같다.
9.<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의 죽음 장면.
어떤 죽음의 퀄리티는 이렇게 규정된다.죽음을 앞둔 상태에서의 노래와 춤.그것도 슬프거나 장중한 노래가 아닌 기묘한 열락에 사로잡힌 노래와 춤.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완전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태도다.쿄코의 엄마와 마을 사람들은 이 죽음이 완전한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점점 격렬해지는 노래와 춤에 죽는 자는 손을 들어 그 세레모니에 춤으로 화답한다..
8.경주(장률) 의 무덤 장면
알 수 없는 죽음들의 연쇄,우연적 만남이 가지고 온 무거울 것 없는 에피소드들,오작동 가능성이 있는 기억과 환청 이후,카메라는 오래된 무덤이 중심이 된 이상한 밤의 도시를 천천히 패닝한다.세 개의 성냥불이 차례로 밤을 켠다는 자끄 프레베르의 싯구가 생각나면서 이 도시의 진짜 주인은 저 죽음,저 고분이라는 이상한 정서적 울림을 경험하게 해 준다.
7.<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케이크 트럭으로의 추락 장면
적들의 추격을 당해 위기의 순간을 맞은 두 연인 시얼샤 로넌과 토니 레볼로리가 호텔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다음 장면이다.세상이 확 변한다.생명의 위기가 로맨스의 한 순간으로,칙칙하기 이를 데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꿈 속 동화의 세계로.이런 종류의 두 세계 사이를 줄곧 진자운동하면서 웨스 앤더슨의 세계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것은 우선은 시각적 쾌락,그 다음은 위로와 꿈이다.우리의 마음 속에도 저런 원색의 아름다운 미각적 세계가 있었고 우리의 세계 속에도 정말로 좋았던 어떤 때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넌지시 우리에게 알려준다.말이 아닌 이미지를 통해 말이다.
6.한공주의 엔딩 씬.
다리 밑 무시무시한 강물에 포말이 일어나며 소녀의 투신을 알려주던 화면은 갑자기 물 밑에서 어떤 그림자가 떠올라 강을 헤치고 헤엄쳐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그 그림자가 한공주의 그림자인지,그래서 소녀가 다시 살아났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조용한 희망이라고 얘기할 수 조차 없다.그런 종류의 희망이 관객의 죄의식을 치유해주진 못하니까 말이다.우리는 강 밖에 살며 저 소녀를 향해 구조의 손길 하나 내밀지 못한 죄인들이다..
5.지미스 홀(켄 로치) 의 달빛 아래 댄스 씬
마지막 춤은 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감연한 부드러움과 비장한 슬픔이 존재하지만 관객은 어쩔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켄 로치 대인의 '좌파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스케치.
4.변호인,주먹을 치켜 들다.
영화 <변호인>을 아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저 장면 노무현의 화양연화 장면,밀려오는 전경들 앞에 홀로 앉아서 한 팔을 치켜들고 있는 저 장면 만큼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이젠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젠 거리의 동력과 에너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기에 그럴런지도 모른다.
저 장면의 실제 모습이다.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수인 노무현의 모습과 함께.
3.천주정-무협,무력해지다.
원래 중국 대륙은 피의 대륙이었다.칼날과 창이 무협이라는 이름으로 부딪치는.
그러나 지아 장커는,이제 중국에서의 무협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게 무력하게 저항하는 짓밟힌 자들의 최후 몸부림 정도로 격하되었다고 말한다.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현대 중국의 칼과 피.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
2.<메콩 호텔>의 기계
-이 기계는 영혼이 육신 밖으로 여행하도록 도와줘요.
권투선수의 헤드 기어 같은 '기계'를 머리에 쓰고 메콩 강변을 향하여 등 돌려 앉아있는 남자의 장면에 덧붙여,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페르소나인 '통'은 이렇게 말한다.
기계의 정체?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영화이다.사실 맞는 말 아닌가.영화는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분리시켜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게 한다.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게도 하고,가 본 적 없는 미래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기도 한다.저 '기계'는 우리의 영혼에 수많은 쟝르의 영화를 동시에 주입시켜 온갖 강변을 다 여행할 수 있게 하고,온갖 캐릭터들의 면면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맞다,그것이 영화다.그리고 이것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관이자 영화학 개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순 없다.또 한 가지의 생각도 가능하다.저 기계-영화에 의해서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유랑하는 영혼,즉 느낌과 꿈이 오히려 '진실'일 수도 있다.배터리가 다 한 그 순간,혹은 꿈과 느낌을 완벽히 이룬 순간 우리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데,그곳은 오히려 그냥 우리 존재의 여분과 같은 곳일 수도 있다.꿈 쪽이 맞는 진실이라면 현실은 또한 나의 진실이 아니다.영혼이 꾸는 꿈을 상상 -현재엔 실존하지 않는- 이라고 본다면 저 기계~영화는 순수한 꿈을 추출하는 grinding machine이 된다.
1.그레이트 뷰티-젭 감바르델라의 발코니.
살아 있는 화석 같은 존재이자 시간의 결정체 같은 외양을 가진 늙은 수녀는 젭의 발코니에 날아가는 새들을 불러 모은다.그리고 그 새들의 세례명을 안다고 말한다.
즉 진실과 현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딘가에,젭 감바르델라의 연기로 연출될 수 없는 어딘가에,스스로의 상상과 꿈 가운데와 그 살짝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수녀는 젭에게 왜 책을 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그러자 젭은 그레이트 뷰티를 찾았지만 못 찾았다라고 대답한다.그때 수녀가 말한다.뿌리가 중요하다고...
그리고 수녀는 신비하게 입김을 불고 새들은 하늘 위로 떠올라 날아간다. 그레이트 뷰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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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영화에 대한 글들을 여기서 끝낼까 한다.그리고 2014년도 간다.언제나 그렇듯 다사다난,여러가지 의미에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버티고 또 버티며 지냈다.
괜챦다.내일 또 따스한 태양이 떠오를 테고 밤엔 까만 하늘에 별들이 보일 것이다.여러분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