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영화에는 바다가 있다3.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죽음의 품격.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죽음의 품위.
우리나라의 바다를 떠나면 일본의 시네아스트 가와세 나오미가 그려낸 통합과 대립,두려움과 친근함의 양가적 바다인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속 일본의 어느 섬 바다가 있다.
죽음의 순간,죽음의 품위,죽음의 질 (quality),죽음과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다루는 이 영화는,삶과 죽음 역시 자연현상의 일부이며 거대한 우주 순환 중의 한 시기라는 가와세 나오미 종래의 태도가,화장끼라곤 전혀 없는 순수한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에 의하여 가벼운 추진력을 얻으며,사람 삶의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드라마다.하고 싶은 이야기가 거의 주입식 교육처럼 지나치게 반복되어 관객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측면이 있지만,사람이 사람을 떠나보내는 감동적인 의식을 묘사하는 몇몇 장면에 의하여 충분히 상쇄되어지고도 남음이 있는 좋은 영화였다.
그리고 이 영화에도 바다가 있었다.아예 첫 장면부터 섬의 해안가를 향하여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내뿜으며 내달려오는 파도를 묘사하며 영화가 시작된다.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엔 죽음이 있다.섬 축제에 쓰일 염소를 도살하는 장면인데 배우가 실제로 칼을 들고 나무에 매달린 염소의 경동맥을 끊고 껍질을 벗기는 장면을 실연하여 관객을 일단 깜짝 놀라게 한다.죽음이란 이리도 가까이 있다는 뜻이며 인간의 죽음만 죽음은 아니란 뜻일 거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녀와 소년인데 이들이야말로 죽음에 얽힌 상황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소녀의 경우,어머니가 병으로 죽음 선고를 받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소년은 이혼한 어머니의 정부가 파도 속으로 스스로 실종되었으며 그 시신을 맨 먼저 발견한 -소년은 시신의 등에 있는 문신이 어머니의 남자의 문신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이 부분의 영화적 내러티브는 약간 명확하지 않은 편이지만 그 사건의 앞뒤관계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소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근원적인 이별에 대한 공포를 설명하는 데에 쓰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소년의 바다 공포증의 이유일 수도 있고..)
이어 영화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극명한 대조점 하나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다에 대한 태도다.어머니가 무속인,아버지는 서퍼(surfer)인 소녀는 교복을 그대로 입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 유유히 잠수한 후 다시 물 바깥으로 나올 정도로 바다-자연에 친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도시에서 이주해 온 소년은 바다가 '끈적끈적'하다는 이유로 바다에 두려움을 가지며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이 영화는 이렇게 자연에의 친화와 두려움,도시와 섬,소유와 무소유,죽음과 삶,사이의 지속적인 대조 포인트들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소녀는 서핑(바다) 은 섹스와도 같다고 얘기하며 소년에게 키스하지만 소년은 다소 복잡한 이유-그러니까 매우 도시적인 -로 소녀에게 키스를 되돌려주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는 죽음의 의미를 향하여 산문적으로 전진한다.소녀 쿄코의 무속인 신엄마의 대사가 배경으로 깔리며 풀들과 꽃들과 갈아엎어지는 땅들 같은 자연의 순환을 눈 앞에 보여주는 장면에서,영화는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소녀에게 '사람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떠나는 엄마의 온기가 네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물론 소녀의 대답은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이다.소녀의 대꾸에 공감하려는 찰나,영화는 죽어가는 엄마의 입을 통하여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이 영화는 의외로 '대사'의 영화이며 중첩과 대조를 노래하듯 이어간다)
엄마는 말한다.
-엄마는 무속인으로서 신과 인간의 입구에 있었으며 죽는 건 두렵지 않다.생명이 네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가 죽음을 통해 엄마를 떠나 보낸 소녀에게 힘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역시 죽음에 대한 한 태도다.그러나 영화는 아직 소녀가 이런 해답에 대해 공감했는지의 여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소년의 이야기로 카메라를 돌린다.
소년이 겪는 죽음에 대한 사건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소녀와 헤어진 그날밤 소년은 꿈을 꾼다.(구름에 가려진 달과 잠든 엄마가 보여진 다음에 나오는 장면이다) 소년 카이토는 엄마와 낯선 남자의 섹스를 목격한다.화면은 남자의 등에 새겨진 문신으로 가득 차고 다시 바다로 이동한다.남자는 거대한 파도 속으로 자꾸만 짓쳐 들어가며 죽음을 자처하고 벌거벗은 어머니가 해변에서 비명을 지르며 운다.소년 역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이 장면이 과연 카이토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된 억측이자 상상인지,아니면 실제로 카이토가 목격했던 진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다만 소년에게 있어서 바다는 죽음의 바다이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곳이며 따라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진다.
진실의 무게와 혼란을 견디지 못한 소년은 생부를 만나러 토쿄로 향한다.그러나 카이토의 아버지 역시 영화의 다른 캐릭터들과 비슷한 말을 소년에게 건넨다.자신이 토쿄에 있는 이유 역시 토쿄 특유의 온기와 에너지 때문이라는 것이다.즉 가까이 하고 싶은 '기'가 있다는 것이며 소년은 이로써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염소를 도살하는 장면을 다시 보여준다.물론 영화 처음에 나왔던 염소와는 또다른 염소다.또다른 죽음인 것이다.그리고 영화는 갑자기 하늘로 떠올라 섬을 둘러싼 거대한 자연을 보여주기 시작한다.광대한 숲과 너른 바다가 그 보다 훨씬 윗쪽의 시점에서, 염소의 죽음을 보고 난 후의 관객들에게 죽음 마저도 자연의 일부라는 듯 위로와 압도의 화면을 건넨다.그리고 노인에게 돌아온 카메라는 노인이 해변을 걷는 소녀 쿄코를 쿄코의 증조 할머니 토쿠코와 착각하는 장면으로 연결한다.증조할머니로부터 소녀에게 전달된 '온기'와 '에너지'가 자연 속의 사람들로 하여금 또다른 차원의 기억을 일깨우는 것이다.즉 이 섬의 죽음과 자연 그리고 기억은 온기와 에너지로 연결된 채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고, 관객에게는 이런 종류의 생각이 죽음 이후의 남는 자들에게 또다른 위안을 건네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죽음의 의식(ceremony)를 향하여 전진한다.소녀의 어머니가 죽는 것이다.일찌감치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거대한 보리수가 보이는 곳에 침상을 설치하고 누운 소녀 쿄코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한다.그 의식은 두 차례 진행된다.누워 있는 엄마를 향하여 소녀가 일본 전통 현악기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지켜보던 아빠가 엉거주춤 춤을 추는 장면이 그 첫번째고 (딸이 부르는 노래 제목은 '나팔꽃의 노래'다) 두번째 의식은 소녀의 엄마를 알았던 이웃들이 모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식으로 진행된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의 노래와 춤.그것도 슬프거나 장중한 노래가 아닌 기묘한 열락에 사로잡힌 노래와 춤.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완전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태도다.쿄코의 엄마와 마을 사람들은 이 죽음이 완전한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다시 얼굴을 마주 대할 수는 없겠지만 죽음은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며 죽는 자의 일부가 여전히 세상에 남아 산 자와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이큔 나카나 (망자의 노래)를 부르고 8월의 춤을 춘다.
당신은 정말 가시려 합니까
나를 두고 가시려 합니까..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슬프지만 청승맞지 않다.두고 가는 사람이 누구이고 떠나려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매우 불분명하게 만드는 노래다.노래가 진행될수록 화면의 밀도가 더해가지만 그 밀도는 압박감이나 공포로 연결되지 않는다.오히려 슬픔은 점점 가벼워진다.소녀의 아빠는 아내의 죽음에도 웃으며 울고 사람들의 춤은 점점 격렬해진다.죽어가는 엄마 역시 어느 순간 힘없는 두 손을 들어 이웃들의 춤에 화답하기 시작한다.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몸짓이 음악에 맞춘 춤동작인 것이다.
그동안의 모든 설교조의 대사들은 이 한 장면으로 만회된다.현대의 죽음,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온 몸에 선을 연결한 채 약물을 투여받다가 제대로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기계가 제시하는 지표에 의해 결정되는 죽음과 비교하면 거의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보여준다.그것은 또한 선택의 차이이다.이 영화에서의 죽음은 세계를 하나의 꿈처럼 생각하며 또다른 현실 내지 꿈으로 들어간다.죽음은 잠이 아니라 오히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남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관계이며,그 관계에서 비롯된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남긴 채 살며시 떠나는 것이다.
죽는 자의 자연스런 발걸음에 남는 자들은 과도한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그들은 오히려 그의 발걸음을 작고 조용하게 축하해 준다.그들은 결코 가는 자를 붙잡지 않는다.과도한 슬픔을 내비치지도 않는다.가는 자의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자연의 일부로 편입될 것이라는,그래서 우리 근처 어딘가에 무언가 온건하고 건강한 것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는 은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이들은 어떤 재벌가의 상황처럼 집 안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온갖 첨단 의료기기를 동원해 생명을 연명시키려 하지 않는다.그들은 이런 종류의 연명을 의미없는 것으로 본다.생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그 공허한 마음 속에 오히려 삶의 의미와 행복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그래서 이 장면은 내가 생각하는 올해의 장면 중 하나이다..
소년 역시 자기 자신과 엄마로부터 비롯된 갈등에서 해방된다.여기에도 자연이 개입한다.폭풍으로 인한 연락 두절의 상황에서 소년 카이토는 엄마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스스로와 화해한다.이 화해는 소녀 쿄코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그들은 오래된 원시림 한복판에서 섹스하며 하나가 된다.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것이다.소년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난다.소년과 소녀는 이제 옷을 훌훌 벗고 바닷속으로 들어간다.오래된 인류의 원형으로, 자연적인 사람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바닷속을 유영하며 꿈을 꾼다.그리고 그 꿈은 깊고 혼란스런 잠으로부터의 깨어남이며 진짜 삶을 사는 한 모습이다..
물론 이것은 다소 비약된 결론이자 봉합이다.이런 세계야말로 유토피아이며 이런 전개야말로 이상주의적이다.다른 종류의 죽음 역시 얼마든지 존재한다.사고사나 전쟁으로 인한 학살,억울한 죽음과 같이 이어가려는 삶을 억지로 중단시키는 죽음들에 대하여 가와세 나오미 식의 이야기를 대입시키기는 참으로 어렵다.아니,논리로는 가능해도 인간 내부의 감정이 그런 연결을 용인하지 않는다.게다가 죽음에 관한 이런 이상향적인 논리들은 이상스럽고 혐오스런 보수주의에 복무하기도 쉽다.죽음으로부터 뛰쳐나와야 할 저항과 항의를 잠재우기 때문에라도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와 가와세 나오미가 얘기하는 자연사는 '자연스럽다'는 개념에서 비롯된다.이 영화의 죽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을 고민하며 다루었고 거기에 소년과 소녀의 러브 스토리를 끼워넣으며 관객들의 마음을 중화시켰다.결국 어떤 영화도 그 모든 문제에 답을 주거나 커버하지는 못한다.죽음처럼 심각하면서도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결국 영화적 태도가 문제가 된다.어떤 태도로 주제를 다루었는가 하는 문제,이것이 핵심이다. 이 영화의 경우,주제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영화적 진지함이 두드러졌다. 중첩되는 인상적인 대사들,익스트림 클로즈업을 견뎌내는 배우들의 연기,그리고 변화하는 바다와 숲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넓고 깊은 카메라 워크 때문에,영화 자체가 일종의 범신론적인 세계를 형성하며 관객의 마음을 향해 예쁘고 적절하게 녹아들지만 작가가 원래 설정한 방향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이런 태도가 필요하다.흥행을 위해서 눈물과 웃음을 적당히 버무려 이제는 식상해진 짬뽕 레시피에 의존하거나,감성과 격정과 눈물의 배우들을 기용하여 관객의 마음에 거의 강제로 망치질을 하려는 시도 따위는 가와세 나오미의 사전엔 없다.그래서 가와세는 여전히 유효하고 나는 가와세 나오미를 여전히 지지한다.그녀의 다음 영화 역시 또 보러 갈 것이다.
또 하나의 잘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해석하기 매우 어렵다.쿄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소년 카이토가 엄마와 화해한 이후의 한 씬이다.
약간 악마적으로 보이는 포크레인의 팔이 나무를 무너뜨리고 있다.거의 숲을 다 먹어치울 기세다.인간과 우주를 이어야 할 메신저 하나가 잔인하게 파괴되고 있는 중이다.왜 이 영화는 이 장면을 영화의 해결 직전에 끼워 넣었을까.어떤 경고의 의미일까? 이런 식으로 숲을 다 없애다가는 인간의 영혼들이 모조리 산산이 공중에 흩어진 혼백으로 변하여 우주의 순환 구조 자체가 깨어진게 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만약 저 나무가 소녀의 어머니의 어떤 자연적 흐름을 상징하는 나무였다면 저 나무의 없어짐이야말로 소녀 어머니의 죽음을 영화적으로 정리하는 뜻인 걸까.아직,그리고 잘 모르겠다.(이게 내 한계다)
다만 이 영화의 감독 가와세 나오미가 평창 동계올림픽 때문에 잘려나가는 숲들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런지 궁금하다.수백 개의 괴물들이 수십만 그루의 나무들을 몽땅 없애고 있는 중인 것이다.
평창의 어떤 산은 스키 슬로프를 만들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숲은 인류의 호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