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200.이색지대(west world 1973) - 마이클 크라이튼

폴사이먼 2014. 7. 10. 09:41

자,이제 랭킹 놀이를 시작한다.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장면" 200 개를 다 얘기해보려는 것이다.따라서 200위부터 1위까지의 영화 씬들이 다 이어지게 될 것이다.물론 어리석은 짓이다.그 어떤 예술 작품에도 순위를 매길 수는 없다.예술 쟝르를 영화로 한정지어 생각해도 순위 놀이를 하는 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짓이다.그래서 이 글들을 시작하기 전에 꼭 얘기해야 할 것은 지금부터 말할 200개의 장면과 200개의 순위는 작품간의 영화적 우위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이들은 그냥 내 머릿속에 담겨 있던 그 오랜 영화 장면일 뿐이다.여기에 순위라는 이름의 일련번호를 부여한 것은 그 기억의 강도 차이일 뿐이다.

 

사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는 있을 수 있지만,'더 좋은' 영화와 '더 나쁜' 영화는 있을 수 없다.그래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랭킹 놀이에 눈살을 찌푸리지는 말아주시길 부탁드린다..이것은 내 기억의 순간적인 퍼레이드 (지금 현재 내 나이에서라는 의미에서의 순간..)이며 내 쌓인 존재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다시 말해 이 씬들은 내 존재의 오래된 잔디밭의,샛노랗게 센 부분과 파릇파릇한 부분, 또는 옛날의 금잔디와 폭풍의 언덕이 한데 얽힌,그런 '바닥'들의 나열이라는 것이다.

 

200.이색지대 (마이클 크라이튼 1973)

 

우리나라에선 <이색지대>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지만 원제는 <west world>다.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이 메가폰을 잡은 SF영화이고,최초의 digitally imaging process가 적용된 영화이자.픽셀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촬영된 최초의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안드로이드 역할로 출연하는 배우는 전설의 율 브린너다.맞다 그 사람,<대장 부리바>와 <7인의 총잡이>에 출연했던 바로 그 배우.러시아계 혈통이 섞인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그 사람.<왕과 나>의 왕,<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큰 아들 역할을 했던 사람.아무리 영화계 주류 내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어쩐지 비주류의 인상을 풍겼던 그 배우.

 

그는 이 영화에서 총에 맞고 (또는 무고해 보이는 사람들을 쏘아죽이고) 바보처럼 굴고 (그러다가도 엄청나게 영리하게 사람들을 추적하고) 나중엔 황산을 뒤집어 쓰기까지 한다.한 마디로 고생한다.어쩐지 그의 주인공으로서의 영화 이력이 다한 상태에서 찍은 영화인 듯 보이기도 하다..

 

내가 이 영화를 언제 보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아마 초등학교 시절,아니면 그 이전일 것이다.영화관에서가 아니라 TV로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줄거리를 정확히 기억하는 편도 아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몇몇 장면이 분명하게 뇌리 속에 박혀 있다.그 장면들은 오래된 TV 브라운관에서 풍겨나오는 희미한 빛과 그림자에 섞여서 지금도 내 두뇌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                                     -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일종의 성인용 놀이공원(amusement park)이다.고액의 돈을 내면 현실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진입할 권리를 주는 공원이다.안드로이드들이 시중을 드는 로마 시대로,또 미국의 옛 서부시대로,공원은 손님들을 안내한다.손님들은 그곳에서 섹슈얼한 환상과 (이런 뉘앙스의 장면들이 즐비한 이 영화를 내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너무 하셨어요.어머니 ,아버지..) 스펙터클을 즐길 수 있다.창녀로 변한 매춘부들,그리고 주인공들의 총질에 당연히 죽어나가는 안드로이드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녀석들이 바로 그 '손님'들이다.이들은 미국의 옛 서부로 가서 자신들의 섹슈얼한,그리고 폭력적인 판타지를 실현시키려 한다.그들은 살롱-바에서 여자 안드로이드를 사고,절대로 사람들을 쏘지 못하는 안드로이드와 결투해서 그들을 쓰러뜨리는 환상을 품고 있다.(내 기억에 안드로이드 건맨은 냉혈 (cold blood)에만 반응한다.다시 말해 따뜻한 피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공격성을 가지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드로이드 건맨 중 대표격이 바로 율 브린너다.

 

 

 

 

물론 영화는 그들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이 놀이 공원을 유지하는 체계에 무언가 이상이 발생하고 (아마 안드로이드들 사이에 어떤 병이 나돌았다..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안드로이드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여기서부터는 당연히 쫓고 쫓기는 cat & mouse game이 벌어진다.사람들은 죽고 다치고 추격전의 에피소드들이 끼어 든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남은 몇몇 장면..

 

안드로이드 율 브린너에게 쫓긴 주인공이 역습을 가해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인데,그는 율 브린너에게 염산(아님 황산)을 끼얹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위기에서 벗어난 주인공이 서부 세계를 지나 로마 시대를 재현한 장소에서 하염없이 시신들과 부서진 안드로이드 들을 바라보는 장면...그 하염없는 무익한 평화.

 

                                                -                                      -

 

<쥬라기 공원> 에 <터미네이터 시리즈> 그리고 <토탈 리콜>의 이야기들이 전부 버무려져,예시되어 있는 - 그들 모두의 조상이라는 뜻에서 -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이 영화에 대한 내 마지막 인상은,점점 안드로이드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가는 나 자신에 관련되어 있다.어린 나는 쫓겨다니는 사람들 보다 총에 맞고 화상을 입은 채 죽어가는 로봇들이 더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안드로이드 율 브린너가 인간인 주인공을 죽여 없애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 결국 나 역시 종 (species)으로서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안드로이드를 그렇게 처참하게 파괴하는 것에 심한 반감을 느꼈던 것이다.선과 악의 경계지대에서의 불안감,그리고 불만..이것이 내 영화 이력의 시작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