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영화 5.<더 헌트>-사냥에 관한 윤리적 질문들
오인당한 사나이,감정의 법정
토마스 빈터버그의 영화 <더 헌트>는 시종일관 관객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마지막 그 순간까지,그리고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그렇게 만드는 영화다.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마지막 장면에 다시 한 번 더 최후의 총성을 날려 관객을 무거움과 고민 속으로 빠뜨리는 것이다.유아성추행범으로 오인당한 주인공을 제시해 놓고 그의 무죄함을 확실히 믿는 관객들에게 그가 당해야만 하는 참혹하고도 억울한 테러 수준의 에피소드들을 다양하고 점층적으로 보여주면서 거의 호러 영화 수준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그래서 관객은 화가 나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이성 자체를 도저히 믿지 못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마음을 몰아대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루카스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덴마크 마을 공동체의 '돌아온' 구성원이다.그는 이혼 후 마을로 돌아왔고 아들의 양육권 때문에 아내와 분쟁 중이다.마을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오랫동안 알아왔으며,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그들은 심지어 루카스의 강아지의 버릇까지 잘 알고 있다.영화 초반, 추운 시냇물에 알몸으로 다이빙하는 남자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정말 친한 남자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유희들로서 , 루카스는 바로 이 모임의 구성원이다.이 장면에서 시냇물에 허우적거리는 친구 하나를 루카스가 구하는데 바로 이 친구가 최후의 총탄을 그에게 날리게 된다)
그러나 루카스에 대한 시각은 어느 순간 완전히 뒤바뀌어 그를 지옥의 나락으로 빠뜨린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인 소녀가 문제가 된다.소녀는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조숙하다.아이는 유치원 선생님인 루카스에게 연정 비슷한 심정을 품게 되는데 (말도 안되는 설정이라고 ?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아이들을 너무 모르는거다),자신의 애틋한 선물과 키스가 루카스에게 거부된 날,루카스에 대한 완벽한 거짓말을 지어내 그를 곤경 속에 밀어넣는다.
하필이면 아이의 오빠들이 아이패드를 통해 남성의 성기가 노출된 음란한 사진을 보여준 날,소녀는 유치원 원장에게 루카스의 성기를 보았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게 됨으로써 그를 성추행범으로 몰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같은 유치원에 근무하는 나디아와 루카스의 섹스 씬을 보여주면서 그가 아동성애자는 결코 아닐 거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고 사람들과의 사회적인 관계 역시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어왔다는 사실 역시 암시한다.게다가 그는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말썽도 피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루카스가 그런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라는 증거들을 차곡차곡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루카스의 유죄를 향하여 망설임 없이 직진한다.소위 아동심리 전문가라는 사람은 아이에게 지속적인 유도심문을 던짐으로써,아이의 엄마는 '아저씨는 내게 아무 것도 안했다'는 딸의 진실 고백을 정신적 충격의 여파로 해독함으로써,마을의 친구들과 유치원의 원장은 루카스의 혐의 사실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그를 완벽한 나락으로 밀어넣으며 추방한다.심지어 그와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 나디아 마저 루카스를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일방적 해석이 사건의 진실을 철저히 왜곡하는 것이다.
루카스는 일하던 유치원에서 추방되고 마을의 공동체는 그에게 혹독한 폭력과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가한다.그는 글자 그대로의 외톨이가 되며 사법적 단죄와는 상관 없이 마녀 사냥의 희생자가 된다.심지어 돌아온 그의 아들과 그의 애견 마저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그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고 만다.
크리스마스 이브.한바탕 맞고 돌아온 그는 깨어진 안경을 벗고 - 그러니까 맨 눈이 되어-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향한다.그는 깨어지고 상처난 얼굴로 교회의 회중석에 앉아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마커스 - 바로 그 소녀의 아버지- 를 뚫어지게 쳐다 본다.그의 눈에는 고통스런 눈물이 어리고 그런 그를 마커스 역시 오래도록 응시한다.
자신의 눈을 보라는 말이다.이성과 합리가 통하지 않는 마을 커뮤니티 내에서 그가 호소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하나의 감성,감각,바로 자신의 눈 밖에 없었던 것이다.영화 초반 마커스는 루카스에게 '눈만 보아도 거짓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그런 그에게,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에게 그는 눈으로 호소하는 것이다.이 얼마나 취약한 호소인가.
그날밤 한바탕의 난리 끝에 소녀의 아버지 마커스는 딸의 잠꼬대를 듣게 된다.그리고 그는 루카스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는 루카스를 찾아가게 되고 일들은 거기서 원만하게 마무리되는 걸로 보인다.
루카스를 고발했던 유치원 아이들의 증언 역시 일관성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판단 하에 법정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그래서 일들은 그렇게 봉합되는 걸로 보인다.마을 사람들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몇 달 후,어느 사슴 사냥의 날,모두에게 용서받았다고 느꼈던 루카스의 등 뒤로부터 총탄 하나가 날아온다.놀라 돌아본 루카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다.아직도 마을 커뮤니티의 일부는 여전히 그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고,여전히 그를 유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인간의 비이성은 여전히 이성을 압도하고 비합리는 합리 이전의 법칙으로서 사람들의 감정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된 당사자들 - 루카스와 소녀- 사이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와 감정의 법정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힘차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매즈 미켈슨의 빛나는 연기와 더불어,영화는 이렇게 끝끝내 질식할 것만 같은 답답함을 선사하며 막을 내린다.결국 이 영화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관객은 이 결론에 당연히 감정이입하게 되며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윤리적 질문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 <더 헌트>가 주인공 루카스가 확실한 무죄라는 전제를 달고서 시작하기 때문이다.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분명히 영유아에 대한 성추행이 가지는 비열한 범죄성이 아니다.영화는 한 사람에 대한 비극적 사냥 (the hunt), 바로 마녀 사냥을 다룬다.이 작은 세계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 따위는 법조문의 한 구석에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그래서 영화는 사건 자체의 진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을 냉정하게 응시한다.무고한 남자에 대한 영원한 낙인과,사건이 미치는 커뮤니티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이 영화의 주된 관심사인 것이다.
감정은 이성 보다 선행하고 합리는 비합리를 압도한다.영화는 인간 사회에 널리 퍼져 그 모두를 감염시키는 이런 심리의 실존을 다루는 것이다.즉 이 영화는 영화 속의 세계를 미리 규정한 것이다.마녀 사냥의 틀을 미리 짜놓고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깐 스크린을 벗어나 보자.그리고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을 다른 각도에서 쳐다보자.그러면 수많은 다른 가정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가령 이런 것들.
1) 만약 내 아이 (영화 속의 그 조숙한 아이) 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면? 잠깐,질문이 적절하지 않다.바꿔 보자.아이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이 사실은 거짓이라면?
2) 만약 이 남자 루카스가 완전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면? 그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간교한 방법을 통해 다시 마을 커뮤니티로 복귀한 것이라면? 그리고 이런 종류의 증거 불충분으로 인한 무죄 선고가 점점 늘어나 ( 그러니까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요건을 까다롭게 책정한다면) 이런 범죄에 대한 법규가 범죄의 증가율을 억지할 수 없다면?
3) 한 사람의 억울한 희생자를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권의 대원칙 때문과,범죄에 희생 당한 한 어린 영혼의 영원한 상처 자국 사이에 상충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있긴 있을까?
질문들..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솟아나올 수 있다.물론 이런 종류의 윤리적 질문들이 연달아 터져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루카스의 무고함 - 영화는 그의 무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합리적 증거들을 쌓아놓았다 - 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들을 영화적으로 무효화 시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그가 유죄라는 쪽으로 영화를 몰고 가자는 것이 아니다.토마스 빈터베르크가 영화를 기획하면서,루카스의 유무죄 여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영화를 진행시켰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하는 문제다.루카스가 유죄일 수도 있다는 심증적 증거 역시 하나 둘 제시하면서,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소녀의 정신적 황폐함 (아이는 계속되는 심문과 주변의 동정적 눈초리만으로도 충분히 상처받을 수 있다) 과 그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묘사하는 것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면,관객은 어느 쪽으로 감정을 동일시하게 될까?
단순하고 직관적인 추측에 불과하겠지만,원래의 <더 헌트>를 보면서 루카스를 괴롭혔던 마을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꼈던 관객들의 거의 절반 이상이,그 분노의 대상을 루카스 쪽으로 바꾸거나 분노 자체를 유보할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그리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금 말한 이 상황과 더 가까울 것이다.
적어도 유아 성범죄와 같은 특수 범죄에 있어서 '무죄 추정의 대원칙'이라는 인권의 기본적 사항은 거의 지켜지기 어려울 정도로 그 토대가 흔들릴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윤리적 질문들은 여전히 계속될 수 밖에 없다.사실 '아이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아이가 아닌 부모가 가지는 미신이자 신화다.이 신화는 '남의 아이는 거짓말할 수도 있다'라는 명제로 얼마든지 변화할 수도 있다.더구나 만약 우리가 아는 사람이 가해자로 몰렸다면 더욱 더 그런 의심 -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 을 짙게 하고 사시가 될 것이다.인간의 인간을 향한 단죄라는 걸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런 가정을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더 헌트>가 남자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감정적 방법 - 이 영화는 루카스에 대한 주민들의 학대와 사냥이 단순한 증오의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은 고작 루카스의 눈물과 진실 어린 눈망울이다.이 눈빛에 친구인 마커스가 감응할 때 오해의 일단이 풀려가기 시작하는 것이다.그러나 범죄와 단죄의 영향력이 미치는 자기장을 좀 더 넓혀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겠는가.진실을 얘기하는 눈빛과 눈빛이 일대일로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지역이라면,누구나 익명성 아래 숨어 돌팔매질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게다가 현대는 매스컴의 시대이다.매스컴이 실시간으로 뿌려놓는 이미지가 권력의 향배 마저 결정한다.게다가 이미지란 것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노무현과 김대중의 시대에 수구 언론들이 두 대통령의 사진과 말을 편집했던 방식을 기억해 보면 기업 언론이라는 것의 진실성이 거의 한 줌의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어떤 사람들은 이석기 의원의 눈빛이 사악하고도 간교한 눈빛이라고 얘기한다.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얘기한다.그러나 그가 이석기의 눈을 본 곳은 고작해야 텔레비젼이나 신문지상이나 컴퓨터 모니터 위에 불과하다.5미터 안쪽에서 이석기의 눈을 본 적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이석기를 잘 아는 것처럼 그의 눈을 얘기할 것이다.
이석기의 눈빛을 못 믿는 이에게 이명박의 눈을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모르긴 몰라도 대답의 출발이 변명과 옹호일 가능성이 아주 높을 것이다.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이 말이다.
결국 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현대 도시 안이라면 더욱 그렇다.거짓말 탐지기 역시 100%의 정확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한마디로 답이 없는 얘기다.우리는 진실과 진실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나 단 한 가지의 답은 있다.오류의 가능성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답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권력을 쥔 자,힘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쳐놓은 자의적인 덫을 이용하여 수행하는 더러운 단죄 행위의 경우이다.이 경우 우리는 윤리를 뛰어넘어야 한다.거짓말이냐,아니냐를 가리는 것도 유보해야 한다.약자의 편을 든다는 것 -최근에는 힘을 가진 자의 약자 코스프레 역시 적쟎게 눈에 띈다- ,이것이 하나의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대답이다.
온전한 대답일 수는 없지만,이런 태도야말로 현대의 거대 기계 문명을 사는 시민들의 또다른 숙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