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2013년의 영화들 .<홀리 모터스>2. 필름을 넘다.

폴사이먼 2013. 12. 18. 16:06

 

 

보편적 인간이 갇힌 영원한 순환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모든 우연적 만남과 영화들의 유기적 연결이 캐릭터들의 확실한 정체성을 확증하는 것은 아니다.오스카의 존재와 정체성은 사실 영원한 불확실성에 놓여있기도 하다.

 

또다른 리무진-영화공장 과의 충돌에 의해서 만난 옛 연인 에바 그레이스 (카일리 미노그가 연기하는) 를 만나 아련한 시간을 보내는 에피소드를 뜯어보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에바와 오스카는 '우리는 (혹은 배우로서의 우리는)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노래하며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 같은 애틋한 장면들을 연기한다.이때 에바는 마지막 밤을 보내는 스튜어디스를 연기하기 직전이다.그녀의 시나리오 속에서,그녀는 오스카가 아닌 다른 연인과 버려진 백화점 옥상에서 몸을 던지기로 되어 있다.그녀는 이 연기 20분 전에 오스카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에바는 오스카와 헤어지자 마자 승무원으로 분장한다.그리고는 옥상에서 몸을 날린다.엉망이 된 그녀의 시신을 보는 순간 오스카는 오열하고 구토한다.오스카는 도대체 무엇에 구토하는 것인가.어떤 죽음에 구토하는 것인가.실제의 에바의 죽음에 대해서인가 아니면 연기된 승무원의 죽음에 대해서인가.

 

에바는 죽은 것인가,아니면 산 것인가.에바라는 연기자-배우의 죽음은 실제인가 아닌가.실제와 환상은 오스카의 구토와 슬픔에 의해 뒤섞이고 어지럽혀진다.

 

물론 이것 조차 실재 세계일 수 있다.세계는 실재와 환상,가상세계와 실세계가 마구 뒤섞인 혼합물일 수도 있다.이 영화는 세계의 유기체적 실재를 어느 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는 것이다.혼란스런 환상 마저 유기체적 영화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그러나 에바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오스카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다.리무진 안에서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다.스크린 위로는 죽음을 상징하는 파리의 묘지들이 계속 등장한다.킬러의 죽음과 연인의 죽음과 노인의 죽음과 영화의 죽음은 연속된 죽음들의 이미지를 계속 제공한다.죽음이 모든 이미지들을 제끼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듯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오스카의 마지막 배역.'집으로 퇴근하는 노동자'를 보는 순간 관객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리무진에서 깨어나 차에서 내려 리무진 운전사 셀린느에게 그 날의 일당을 받고 문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는 오스카의 모습을 보는 순간,연기가 아니라 실제를 보고 있다는,지금까지의 죽음을 떠나 다시 살기 위한 휴식을 취하러 가고 있다는,다시 말해 관객 스스로가 매일 매일 수행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즉 오스카는 바로 우리처럼 영원한 노동의 순환에 갇힌 인간인 것이다.

 

이 순간 영화는 새로운 지평을 획득하고 드니 라방이 연기하는 오스카는 단순히 영화 속의 멀티 플레이어가 아닌 보편적인 인간으로 거듭 난다.오스카는 영원한 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는 수인인 것이다.셀린느에게 건네받은 열쇠로 들어가야만 하는 새 집의 문을 열려다가 그는 잠시 멈추고는 운다.가장 심난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그는 이제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자각했으며 매일 죽어야 하는 자신,매일 연인의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자신을 받아들인다.그는 결국 손목에 찬 시계의 계기판을 흘낏 보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고 침팬지 어미와 새끼로 구성된 (그는 또 하나의 혹성에 도착한 것이다) 가족의 단위로 편입된다.

 

그때 영화 뒷쪽에서는 '우리는 다시 살고 싶어하지만 영원히 같은 삶을 반복한다'는 가사의 노래가 깔린다.즉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화려한 영화적 테크닉을 보여주던 이 영화는 영화의 죽음과 배우의 죽음을 얘기하게 되고,현대인의 보편적 존재 조건을 얘기하는 존재의 영화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카락스의 우울한 예언을 넘어서는,필름을 넘어서는 존재의 증명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그래서..걸작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실 이 영화에 관한 글은 여기서 끝내야 하지만 이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간단하게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드니 라방이 오스카로 분장해서 팔색조의 다중인격을 분화시키는 전과 후에 달려 있는 이 양쪽 장면들의 집합은 영화의 본편과 관계가 깊을 수도,혹은 전혀 다른 메세지를 얘기하는 개별적인 목소리일 수도 있다.얘기하자.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ㄱ.프롤로그

 

영화가 시작하고 자막이 뜨면 무성영화 하나가 보여진다.좁은 무대를 왕복달리기하는 벌거벗은 남자다.그리고 극장의 객석이 보인다.사람들은 모두들 그린 듯 꼼짝 않고 있으며 자는 사람도 있다.그런데 그 때 자동차의 소음이 들린다.리무진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뭔가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이며,리무진-영화 공장 이 가동된다는 표시이다.죽은 관객들을 깨우는 새로운 영화의 시작이다.

 

방이 보이고 침대가 보인다.그리고 등장하는 사람은 레오스 카락스 (그가 직접 출연한다) 자신이다.그는 파자마 차림으로 개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다 일어나 벽과 거울과 창을 더듬으며 전진해 커튼 사이에 있는 비밀 문의 입구를 발견해낸다.그는 손가락에 길게 꽂힌 원통형 금속 열쇠로 비밀 통로의 문을 연다.

 

 

 

 

개와 함께 복도로 들어가면 파도와 갈매기 소리가 들리고 또다시 문을 열면 극장의 2층 관객석이 나타난다.벌거벗은 어린아이가 관객석 사이의 복도를 걸음마하고  늙고 커다란 개 한마리가 아이에 앞서서 객석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걸어온다.관객들은 여전히 조용하다.

 

 

 

 

이때 카메라는 2층 객석에 홀로 선 감독 카락스를 쳐다 보고 카락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한 이후 다시 배의 선실 현창처럼 보이는 동그란 창 안의 소녀 하나가 나타난다.소녀는 점점 멀어진다.배는 떠난다.

 

 

 

 

여기서 질문 하나.

 

영화를 만드는 감독 레오스 카락스는 극장 안에 숨겨진 비밀의 방에 갇힌 수인인가?

 

나는 처음에 이 에필로그를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는 카락스 자신의 선언적 자신감이 표출된 상징적 장면이라고 느꼈었다.벌거벗은 아이는 한 영화 -또는 영화 역사의- 의 태어남을 상징하고,마치 하계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느릿느릿 관객석의 복도를 걷은 개는,유기체로서의 한 영화가 겪는 필연적인 소멸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보았었다.그러나 아이와 개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관객들이 이상했다.그들은 여전히 죽어있었다.다만 마치 배의 현창처럼 보이는 동그란  창문의 소녀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카락스 자신의 시선이 새로운 영화의 움직임을 암시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전한 의문.카락스는 그 방의 비밀통로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감금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연한 계기 혹은 노력에 의해서 비밀의 문을 발견하게 된 것인가.즉 그는 어떤 종류의 수인인가.컴퓨터와 창이 보이는 방 안에서의 자발적 유폐.이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본질적 운명은 아닌가..질문은 끊임없이 솟아난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프롤로그 마지막 장면의 소녀다.소녀는 점점 멀어진다,움직인다,떠난다.그리고 비밀의 문의 정확한 소재를 미리 알았든 몰랐든 카락스는 여전히 극장 안에 감금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그것 하나는 확실하다.

 

ㄴ.에필로그

 

오스카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셀린느가 운전하는 리무진이 도착한 건물은 홀리 모터스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건물이다.아마 리무진의 주차장일 것이다.

 

 

 

이 곳에 주차한 셀린느는 일이 다 끝났다는 듯 머리를 풀고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빛은 불안으로 흔들린다.'집으로 가겠다'는 말에도 불안감이 감지된다.그리고는 흰색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쓰고는 차에서 내려 건물 바깥으로 걸어나간다.

 

 

 

건물을 빠져나가는 다른 운전사들은 모두 이런 가면을 쓰지 않았다.오직 셀린느만이 가면을 썼다.

 

셀린느가 나가고 시간이 흐르자 리무진들이 말하기 시작한다.그들은 곧 폐차장으로 가게 될 것이라며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토로한다.옛 영화의 완전한 몰락,필름 영화들의 종말을 리무진들이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종말과 죽음은 이 영화 <홀리 모터스> 내내 줄곧 이야기되어 왔던 것이다.리무진들의 대화는 그냥 정리다.오히려 셀린느의 존재가 더 궁금하다.

 

소멸의 - 폐차장행- 운명을 맞이하게 될 리무진-영화 들의 삶의 주기에 있어서 리무진 운전사 셀린느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왜 유독 그녀만 불안감에 떨면서 마스크를 꺼내 쓰고 건물 바깥을 향하는가.

 

이제,하나의 가설.혹시 저 마스크는 영화라는 예술 장르의 종말을 도저히 맨 얼굴로는  직시할 수 없다는 비극성의 표현이자 자기방어 메커니즘이 아닐까?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영화인들의 운명,마스크를 쓰고 익명성 속에 가라앉아서라도 리무진을 운전해야 하는 영화 만드는 사람의 운명,그러나 언젠가는 용도 폐기되어질지도 모르는 사람들..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이런 마지막 비극을 은유하는 것은 아닌가.그렇다면 너무나 희망 없는 결말이 아닐까..그렇지 않은가,미스터 카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