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봄은 온다.<레미제라블>
봄이 다가온다.좀 더 따뜻해야,말랑말랑하게 대기 중에 구부러지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라야,동네 담벼락에 복사되는 햇볕의 양이 충분하고 감각적 안온함이 피부 겉을 지나 두뇌 안쪽까지 전달될 수 있어야 진정한 봄이라고 생각되는 나로서는,아직도 애타고 안타깝게 그 봄을 기다리고 있다.물론 봄 보다는 9월 말에서 11월 초까지의 가을을 더 좋아한다.그 시절의 가을은 거의 후각적 쾌락을 동반한다.그 시간대의 가을은 거의 심장을 동당거리게 하는 후각적 신호와 유혹의 분위기로 가득하고,나는 언제나 그런 상황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짧지 않은 삶 내내 유형과 무형의 사고를 저질러 왔다. 최근 들어 그 사고의 빈도가 현저히 저하되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나도 '불혹'의 나이로 접어든 게 틀림없는 것 같아서,약간의 서운함과 또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봄은 가을과 다르다.봄은 부드럽다.그리고 봄은 위로한다.봄은 절대적으로 낮은 목소리로 곱게 속삭이고,그런 고운 속삭임을 들을 때마다,나는 오히려 커다란 목소리와 외침으로 봄에게 응대한다.그렇게 나는 봄이 시작되면 소리없이 소리를 지른다.그렇게 소리지르는 사람은 나 이외에도 많다.사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봄에 소리를 지른다.우리나라를 움직였던 주요한 민주 혁명들 역시 대개 봄에 발생했다.4월과 5월엔 미완의 혁명이,6월엔 반만 성공한 혁명이 일어났었다.물론 지금이 혁명의 시기는 아니다.반혁명과 혁명 사이에서 또다시 해묵은 전투가 벌어지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전과 같은 양상은 아닐 것이다.(어쩌면 내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릴 수도 있다.시민적 자유가 억압되면서 피부에 와 닿는 경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다면 민란 수준의 소요가 발생할 수도 있다)
봄이 가까워오자,나는 다시 블로그를 찾아 글을 쓰고 있다.조금 덜 분주해진 탓도 있겠지만,어쨌든 이 곳에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수다를 늘어놓고 있기 시작하는 원인들 속엔 분명히 봄의 영향이 있다.
겨울에 보았던 영화들에 대해 봄에 쓰기로 한다.일부 디테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겠지만,최대한도로 기억을 되살리고 대신 최소한도로 글의 양을 줄여 빠르게 정리해서 이제 시작하는 봄을 위하여 겨울을 정리할까 한다..
2013-1 레미제라블.-두 개의 노래.
이 영화,뮤지컬이다.뮤지컬.노래로 대사를 읊는 영화.음악이 메시지의 주된 전달 수단이 되는 영화 쟝르.따라서 음악을 좋아하지 않으면 당연히 별로 재미없을 종류의 영화들.음악을 좋아한다 해도 뮤지컬 특유의 창법에 적응되어 있지 않으면 역시나 흥미를 갖기 어려운 영화 쟝르.우리나라에 들어왔던 뮤지컬 영화들 역시,명랑하고 경쾌하며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없는 영화들은 그리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었다.가령 <맘마미아>의 성공은 - 기존의 우리나라 뮤지컬 무대에서의 흥행의 성공을 고려한다 해도 - 푸른 바다와 태양빛이 거의 눈을 찔러댈 듯 황홀하게 만들던 지중해라는 배경과,칙칙한 눈물과 비련 보다는 즐거운 댄스와 결과적인 성공으로 이어지던 로맨스의 쾌감이 크게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의 <사운드 오브 뮤직>도 마찬가지다.어린이들과 알프스 산맥은 이 영화의 어두운 요소인 독일 나치들을 여지없이 이겨냈다.반면,뮤지컬 넘버들이 주된 요소들이 되면서,어둠의 요소들을 이겨낼 쾌활한 반대 방향의 내용들이 거의 없었던 <오페라의 유령> 같은 경우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박스 오피스에 그 이름을 빛내지 못했었다.(혹시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레미제라블>은?
어찌 보면 참 비참한 내용이다.빈곤과 죽음과 범죄가 끊임없이 오버랩되고, 심리적으로 우리 편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주인공은 법을 기계적으로 수호하는 캐릭터 - 그러니까 자베르..그러나 자베르에게도 정당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 에 의해 끝없이 추격당한다.그것은 추격이라기 보다는 사냥이다.거기에 영화 초반 극의 감정선을 이끌던 여주인공 판틴은 영화가 반도 지나기 전에 죽고 만다.의지할 곳 없이 슬프고 어둡다.
게다가 감독 톰 후퍼는 뮤지컬의 넘버들을 모두 다 스크린 위로 올려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거의 빠지는 곡이 없다.그래서 뮤지컬 넘버들이 약간 넘쳐 흐르고 있다는 생각,즉 과잉에 대한 관객들의 균형감각이 어쩔 수 없이 자극된다.지겨워진다는 말이다.게다가..이 영화에는 댄스도 없다.그저 장중하게 흐르는 음악들 뿐이다.역시나 의지할 곳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왜일까? 유명 배우들 때문에? 일리 있다.이 영화엔 연기력 보장되는 헐리우드의 최정상급 배우들이 죄다 출연한다.더구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남자 배우 두 사람,휴 잭맨과 러셀 크로우의 노래는 확실히 일종의 '구경거리' 가 된다.그들의 평소 모습이 어쩐지 노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므로 더욱 더 그렇다.게다가 깜짝 놀랄 정도의 감정선과 연기력을 선보인 판틴 역의 앤 해서웨이의 장면들은 관객들의 긴장도와 주의를 그냥 화악 상승시킨다.
앤 해서웨이는 그녀 특유의 환한 미소와 찰랑거리는 긴 머리칼도 집어던지고 판틴에 자신을 투사했다.무슨 상을 받았다는데,당연히 그럴 만하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만 가지고서,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이젠 여기서 가설 하나.나는 이 영화의 성공이 2012년 말의 대통령 선거 결과와 상관 있다고 생각했다.패자에게 표를 던진 48%의 시민들 -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선후보 선호도를 조사했더라면 아마 문재인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 에게 이 영화는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도대체 무슨 헛소리냐는 반문이 돌아올 수 있다.이 영화에서 프랑스의 시민 혁명을 주도했던 젊은이들은 거의 대부분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다시 말해 이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나,이 영화 속에 나왔던 저항하던 청년들이나 똑같이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엔 확연한 차이가 있다.여전한 패배 속에 상처를 씹고 있던 한국의 시민들에 비하여,프랑스의 청년들은 '그때'는 비록 죽어넘어졌지만,결국엔 죽었어도 다시 태어나 승리의 깃발을 휘날렸던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를 좋아했던 일부 관객들이 분명한 '대리 승리'의 경험과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 확실한 오버일런지도 모르지만 -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박스 오피스 히트를 설명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대리 만족.유예된 승리,가없는 희망,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더 나아가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무언의 증오..
그러나 또 하나의 느낌이 있다.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1980년 5월을 느꼈다.파리 어느 거리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군대와 대치 중이던 청년들이 죽어나갈 때,공포에 떨며 창문을 닫아 걸던 그 거리의 이웃들을 보면서 말이다.그들의 모습 속엔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이 지금도 여전히 29만원 밖에 없다고 버티는 사람이 수괴인 집단에 의해 칼과 총에 의해 학살당하던 그때,두려움에 떨며 쳐다보기만 하던 우리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그 생각은 또한 세월이 흐른 지금 마리우스와 코젯이 어떤 얼굴과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느냐,하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한다.다시 말해 마리우스와 코젯은 정치적 레토릭으로 전락해버린 386이란 어떤 세대의 현재 모습과 비교되는 과거의 모습인 것이다.한때 거리에 서 있던 마리우스와 코젯의 현재 모습.그 영락 없는 영락.그리고 그럼에도 잠복해 있는 어떤 불씨들.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우리는,형편없이 낙관적인 우리는 여전한 희망을 갖는다.아직 끝나지는 않았다고 여전히 다짐하는 것이다.(여기에서부터 사람들의 생각은 수만 가지 다른 갈래로 갈라질테지만 말이다.) 모든 혁명,모든 자유를 위한 투쟁은 영원히 미완성인 어떤 과정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들을 이런 식으로 역사화하고,언제나 '언젠가는'이란 말로 돌려 쳐서 얘기할 수는 있다.과정이 승리라는 말도 사실 허망하게 들리는 미문에 불과하다.왜냐하면 우리는 순간 순간 어떤 선택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주인공 장발장,아니 그들의 발음대로라면 숑발숑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코제트를 위해서 저항 세력에 참가해야 하느냐,마느냐는 그 순간의 선택.이 선택의 순간에 그가 혁명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모든 자격을 다 갖춰야 비로소 우리 편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너무나 비겁하다.
문제는 실존의 선택이다.코제트에 대한 사랑과 보호 때문이었든 뭐든 간에,장발장은 전투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젊은 청년들이 혁명과 대의의 방법과 개념에 대해 갑론을박만 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숑발숑으로 이름을 바꾸고 총을 집어든다.그리고 실제로 이런 종류의 실제적인 선택이 혁명을 이끄는 것이다.변화란 선택과 뒤이은 실제적인 행동에 의해서 앞당겨진다.말과 교양과 생각이 선행되고 방법론과 투쟁 이론이 새로운 파워를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지만,진영 논리 따위를 벗어 던진 장발장식의 선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그 모든 말과 생각들은 그냥 레토릭으로 머물고 만다.선택을 선택 이전의 말로 머물게 하는 것,그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통치 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다.혁명이고 뭐고 음악이야말로 이 영화의 심장이다.(그래서 자베르가 몸을 던진 영화 속 장소가 파리가 아니라 런던이란 사실도 충분히 무시될 수 있다) 이 영화엔 참으로 인상적인 두 곡의 노래가 영화의 앞고 뒤를 장식한다.물론 그 인상이란 게,사람마다 다르다.내가 인상적으로 들은 두 곡의 넘버는 바로 '내게' 인상적이었다는 뜻이다.
첫번째 노래는 당연히 판틴이 부르는 'I dreamed a dream'
깜짝 놀랄 정도의 감정들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에 실려서 화살처럼 마음 한가운데로 날아박혔었다.앤 헤서웨이가 유능하다는 건 우리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이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전문 뮤지컬 배우들에게 미안할 정도의 감동이 극장 안을 감싸고 돌았었다.그리고 2013년 극장 안에서의 최초의 눈물을..,그녀는 유도해냈다.
출구 없는 절망에 의해 유도되는 연약한 떨림,이루지 못한 그리고 이룰 수도 없는 꿈들에 대한 무참한 바램은 오히려 관객 각자의 꺾인 꿈들을 서서히 불러내어,그 순간 영화 <레미제라블>을 저 멀리로 날려보내버릴 정도의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다.앞으로..앤 헤서웨이는 무조건 까방권 부여!!! 해야 한다...
다음으로 기억나는 영화 속 노래는 자유를 향한 청년들의 끝없는 헌사,do you hear the people sing? 이다.
절망에 이은 승리의 노래.바리케이드를 넘어 승리의 그곳으로 질주해가는 군중들의 노래.모든 죽은 자들과 모든 희생당한 자들이 진정한 부활을 이루어 함께 모여 순간이지만 영원한 기쁨을 노래하는 노래.
굳이 이 노래가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그리고 이 글의 맨 마지막에 끼워넣어지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승리가 그립기 때문이다.그리고 승리에 필수적인 것은 바로 people 이지 명망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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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다가 중간 중간에 한 문장씩 쓰는 글은 여지없이 난삽하다.좀 더 짧게 쓰는 연습을 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그리고 쓰는 도중에 봄이 왔다.
언젠가 봄은 온다.그래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