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되겠지만,사실 이 영화는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잘 만든 영화다..,이 한 줄의 코멘트면 충분하다.거기에 이 영화 내내 흐르듯 나오는 레드 컬러,붉은 색감을 추가해야 한다.
이 영화의 레드는 자유의 상징,우울함과 절망의 증거,파괴와 살인을 향한 소망,그리고 엄마와 아들간의 고전적인 비극을 향하여 점층적으로 격상된다.레드 컬러를 통해,우울함은 광끼의 일면이며 자유는 누군가에 대한 억압의 동전의 뒷면이라는 사실이,마치 독극물이 체내에 스며들 듯,관객을 꼼짝 못하게 한다
.따라서 사랑은 언제나 복수를 낳는다.이런 아이러니,얼마만에 만나게 되는 클래시컬한,영화적인,그래서 예술적인 상황이라는 말인가.
2011-23.우리도 사랑일까 (사라 폴리)
사랑과,관계에 대한 감성적인 보고서.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아름답게 빛나는 올해의 수작 중 하나.
화면의 미세한 진동이 주인공의 내면의 격렬하거나 짧고 슬픈 떨림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정교하고,배우의 엄청난 힘들 역시 감독의 사랑에 대한 관찰력과 정확하게 조응한다.미쉘 윌리암스의 백허그들은 언제나 관계의 연약함과 사랑의 시한부적 운명을 각기 다른 상황에서 조명하는데,이때 사랑과 연애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한계 상황을 향하여 격상된다.영화 역시 한 단계 윗길로 진입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다.
나는 이 영화 이후,집에서 몇몇 문장을 덧붙였었다.사랑에 관해서였다.그 중 하나다.
- 사실 사랑엔 비관도 낙관도 필요없다.사랑은 시간을 견디는 것이며,시간에 솔직해지는 것이다.떠남의 주기가 지나치게 짧아지면 내면의 피로가 쌓일 수 밖에 없겠지만,'욕실 같이 쓰기' 가 자꾸만 반복된다면 차라리 끝장을 내는 편이 낫다.물론 놀이공원에서 무척 외로워지겠지만.(문득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았던 15년 전이 생각났다)
2012-24.내가 사는 피부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2012년의 가장 확실하고 완벽했던 망나니 드라마.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막장 드라마.그러나 막장도 어떤 사람의 손을 거치는가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막장도 이런 정도의 극한적인 레벨이라면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아무리 막장성 스토리를 가진 드라마라도 알모도바르 정도의 장인의 손에 들어가면 퀄리티가 달라진다.그는 여전히 인간의 극한을 탐구한다.그런데 막장이야말로 인간의 극한이다.그는 사실 가장 적합한 이야기를 찾은 것이었다.
몇 마디 덧붙이자면,영화인들은 성형외과 의사를 너무 모른다.나 같음 다른 전공을 가진 의사를 내세웠겠다.그리고..엘레나 아나야..너무 예쁘다..
2012-25.폭풍의 언덕 (안드레아 아놀드)
문학사상 가장 나쁜 사랑을 하는 두 커플로 인식되어 있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변호하기 위해,안드리아 아놀드가 제시하는 것은 황량한 고원에 대한 기억이다.두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한 강렬하고 세밀하고 감정적인 묘사들을 통해,그녀는 사랑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나쁜 사랑은 없다.사랑의 기원과 역사에,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카야 스코델라리오와 제임스 호손이 로렌스 올리비에와 쥴리엣 비노쉬를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안드리아 아놀드 만큼은 윌리엄 와일러의 옛 버젼을 비껴서 벗어난다.끝없이 황량한 고원과 비와 바람과 여과없이 달려드는 소음들,폭력적 섬세함과 창끝 같은 멜로,그리고 새도매저키스틱한 사랑을 통해 관객을 끝없이 예민하게 만드는 데에 성공하면서,관객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벌이는 마음의 전쟁에 거의 강제로 동참하도록 만든다.매우 고통스러운 영화적 경험이다.
그러나 영화는 전반부의 강렬한 긴장을 후반부까지 이어가지는 못한다.후반부가 약하다기 보다는 전반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2012-25.아르마딜로 (야누스 매츠 페터슨)
전쟁기계로 변해 가는 평범한 청년들에 대한 익숙한 서사들,전쟁터라는 극한 상황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 노력하는 영화인들에 대한 아슬아슬한 감정들,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익숙한 클리셰들..이런 요소들을 제외하면 이 영화엔 매우 이상한 문제들이 남는다.다큐멘터리라는 쟝르에 있어서의 '편집'의 범위.어쩔 수 없이 감독이 수행하게 되는 '스스로 파악한' 진실들.그리고 다시 편성하게 되는 '당시 사건'의 진상들.게다가 카메라가 파악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
처참한 학살 장면 마저 이 영화는 선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이 영화는 다큐라는 쟝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다큐멘터리는 하나의 '세계관'이다.'리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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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우리나라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덧붙이려 한다.2012년의 한국 영화,특히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들에 대해 나는 그렇게까지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오히려 작은 영화들이 훨씬 더 좋았다.이런 느낌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게 될런지..,2013년이 궁금하다.
2012-26.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 (윤종빈)
이제야 조폭을 조폭답게, 조폭스럽게, 딱 조폭으로, 그린 영화가 나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다시 말해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상식에 기초한 영화가 나온 것이다.윤종빈의 이런 태도는 냉정한 인문학과 교양에서 비롯된 것이며,쓸데없는 마초의식과 눈물,그리고 관객에 영합하려는 감동과 눈물을 벗겨내야만 시대에 대한 차갑고 정확한 해부가 가능하다는,시력교정용 영화가 등장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내게 이 영화는 한국형 느와르도 액션영화도 시대극도 아니었다.느와르와 시대는 그저 차용되었을 뿐,최민식으로 대표되는 한 세대에 대한 적나라한 초상에 대한 묘사처럼 느껴졌다.그가 로비의 귀재가 되는 과정이 적확하고 상세하게 설명되는 않지만,이제 대표작을 만나게 된 최민식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런 종류의 결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이제 최민식은 김승호가 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2012-27.밍크코트 (신아가,이상철)
가족간의 문제나 종교적 갈등을 다루었다기 보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취약성을 종교나 가족의 틀에 담아 얘기하는 영화로 보였다.몇 가지 디테일이 아쉽고 결말 부분의 '그 모든' 해결이 아쉽게 비추었음에도,배우들의 엄청난 한국적 절절함과,또 죽음을 다루는 순간들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이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적어도 우리 영화에서 정신적 슬럼으로 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했다.
2012-28.만추(김태용)
내가 이 영화를 보았던 광주극장의 그 밤은 발렌타이 커플로 북적거렸다.거의 한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물론 나처럼 홀로 앉은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그러나 혼자인 우리들이나 커플인 그들이나,사랑이 아닌 ''관계'의 어떤 마법적인 순간을 보여주는 김태용의 그림을 충분하게 느끼고 즐길 수 있었다.나는 이 영화가 굳이 이만희의 리메이크가 아니었다면,차라리 우리가 이만희를 완전히 몰랐더라면,우리나 영화를 만든 사람이나 훨씬 자유로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메이크로서의 이 영화를 생각해 본다면,근본적인 문제란 과연 이만희와 김수용의 낙엽과 기차가 시애틀의 안개낀 거리로 치환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로 돌려 말할 수 있겠다.이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에 대한 변호의 말로서,세월과 사회가 많이 변화했다는 것,그래서 도저히 탕웨이가 문정숙과 김혜자와 같아질 수는 없다는 얘길 하고 싶지만,어쩐지 변호 치고는 엄청나게 약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엔 배우들이 있다.현빈과 탕웨이.물론 현빈 보다는 탕웨이의 영화였다.현빈이 아니라 다른 배우가 투입되었다면 전혀 다른 화학작용이 형성되었을 걸로 보였다.김수형의 카메라는 어떤 각도 어떤 조명에서 탕웨이의 얼굴을 비추면 그녀가 예뻐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나앉은 여자'를 연기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그녀의 어떤 감성,무엇보다 그녀의 기묘한 목소리의 톤이 순간적인 감동들을 이끌어내고 있었다.쉽지 않은 일이다.
2012-29.광해,왕이 된 남자 (추창민)
꼭 잘 된 영화라고 볼 수는 없지만,적어도 많은 관객들이 가장 공감했던 2012년의 한국 영화라는 의미에서 이 영화를 포함시켜야만 할 것 같다.
이 영화는 끝없는 격정과 위기 속을 기본적으로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멜로 코드를 통해 돌파해 나간다.이 영화의 성공 비결은 관객이 느끼는 자기 현실과 영화 속 세계의 동일시 성공에 있는 듯 하단 뜻이다.그러나 어떤 의미에서,하선의 15일 만이 조선 역사 중 유일하게 정의로운 날들일 수 있다는 가설은 근래의 한국 영화에 나왔던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가장 비관적인 인식일 듯 하다.추창민의 배우 다루는 솜씨가 일품.그리고 사극의 이병헌은 어쩐지 최민수를 닮았다...
2012-30.부러진 화살 (정지영)
이 영화 역시 '잘 된' 영화는 아니었다.다만 2012년을 살아갔던 한국의 시민들에게 엄청나게 어필했던 영화로서 기록을 남기고 싶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변호사 박준이 주인공인 법정 코미디로 보였다.(물론 내가 변호사나 교수 당사자라면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거기에 사법부 구성원들에 대한 만연한 불신이라는 정치적 요소가 엮이면서 (이 요소들의 고의성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한다) 만만치 않은 파급 효과를 만들어냈다.노장 감독 정지영의 의외로 기민한 푸트웍과 (남영동 1985에선 사라지고 만) 아직도 죽지 않은 펀치 능력,그리고 유능한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에 영화적 진실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나는,석궁 사건을 기초로 적어도 두 개의 영화가 더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사건의 실체와 법적 절차 사이에서 허둥지둥하며 법정모독을 일으키는 김 교수의 내면을 다룬 영화와,자신의 홈 그라운드에서는 피고에게 공박당하고 바깥에서는 윗 사람들의 압박을 받는 판사의 상황을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부서진 법정'이란 제목을 가진 영화 말이다.아니면 아예 라쇼몽 스타일로 만들어내던지..
에롤 모리스의 클래식 다큐멘터리 '가늘고 푸른 선'과 비교하는 글을 쓰려다 말았다..
2012-31.나나나 (부지영,양은용,김꽃비,서영주)
양은용의 깜짝 놀랄 만한 솔직함,서영주의 좋은 의미의 발랄함,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끔찍스런 매력,김꽃비의 자연스런 영화적 방랑이 어우러진 셀프 다큐멘터리'들'..영화란 도대체 무엇인가,또 영화에서의 편집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일깨우면서도 세 배우의 아름다움을 그들의 일상적인 삶 자체로부터 끄집어낸다.
이런 배우들이 스크린을 점령하는 것이,영화 아니 문화 자체를 위해서 바람직하다.민낯의 여배우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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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기서 멈췄음 한다.체력이 다 되었고 갑자기 바빠질 듯 하다.
2012년은 내게 생각 보다 훨씬 힘들었던 한 해다.좀 더 조직적으로 생각해 보았더라면 하는 한 해다.올해는 그냥 잊는다.그리고 내년을 또 기다린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무한 행복하시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