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소환하는 방법3.-<소중한 날의 꿈>
과거 시대를 추억하는 영화가 반드시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학적 의미를 탐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분명히 의무조항이 아니다.어떤 강박관념처럼, 영화의 시대배경을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얘기해야 하고 또 읽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구속일 수도 있다.어떤 작품에 있어서 시대란, 가끔 소품적 배경으로만 존재할 때가 있고,특히 어떤 집단적 보편성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기억을 통해 스스로의 과거를 추억하려 할 때,그래서 좀 더 다른 은은함을 얘기하려 할 때,관객은 이런 영화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공감을 표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방법이 문제가 된다.<써니>의 방법은 이건 도대체 어쩔 수 없다 싶을 정도의 왜곡이었고,<굿바이 보이>의 시선은 아픈 시간들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감내하는 것이었다.특히 1980년대를 야만과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던 <굿바이 보이>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개'의 이미지는 그 당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은유하는 알레고리였다.
영화 첫 장면부터 도살당해 삶아지는 주인공 소년의 개,절망에 빠진 소년의 어머니가 달동네의 고갯길에서 술에 취해 앉아 개처럼 '멍멍'하며 무력하고 슬프게 개짖는 소리를 흉내내는 장면,그리고 소년의 가족이 동네를 떠나면서 이삿짐 트럭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물건이 죽은 개의 목줄이라는 것 등은,이 영화가 그 당시를 회상하는 정서가 얼마나 바닥에 위치해있는 지를 알 수 있게 한다.
2011-17 .소중한 날의 꿈
오늘 얘기할 영화 <소중한 날의 꿈>은 <써니>나 <굿바이 보이>보다는 약간 윗세대의 사람들을 얘기하고 있다.'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더니'로 시작하는 김만수의 '푸른 시절'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음악다방과 제과점 데이트 장면이 이어지고 LP판과 카세트 테이프,칠성사이다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아무래도 1970년대 중반 정도를 무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영화가 자신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역시 폭력적이긴 마찬가지였다.지금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아버지가 철권통치하고 있던 그 당시의 우리나라 역시, 인권은 완전히 말살당하고 노동자와 농민은 탄압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주변으로 내몰리며 끝없는 침묵을 강요당했던 암흑의 시기였다.사법살인과 납치,고문과 투옥이 횡행했던 '검은 시절'이었던 것이다.(그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북쪽의 암흑을 이루어냈던 또다른 독재자의 아들과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가정하면,아마 시대를 뛰어넘는 패러디 코미디의 한 장면이 될 것이다.그리고 그럼으로써 현재의 각하가 유행시킨 유행어, '국격'은 거의 반의반의반토막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소중한 날의 꿈>은 그 시절의 어두운 면을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아니,이 영화의 시절은 시절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그것은 그저 배경이다.저 위의 포스터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푸른 나무와 파란 하늘 밑으로 목가적인 풍경이 보이고 자전거를 탄 소년과 그 앞에 책가방을 든 소녀가 서 있다.전형적인 평화가 저 포스터 안에 존재한다.영어 제목은 <GREEN DAYS>이며,제목 위로 보이는 카피는 '가슴을 흔드는 성장 환타지'이다.블랙이 아니라 그린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자신의 시절로부터 불러내는 시간은, 인간의 인생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시간, 바로 십대의 어느 한 때이다.바로 청춘의 나날,신록의 시간 말이다.그리고 그것은 블랙의 시대에 블랙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우중충한 회색의 시대에도 당연히 사랑이 있고 노래가 있고 시가 있고 꿈이 있는 것이다.수채화 같은 사춘기와 자동적인 미소를 가능케 하는 삽화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10만 장이 넘는 수공예 그림으로 이루어진 셀 애니매이션인 이 영화는 ,바로 그 블랙 속의 그린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영리하게도 아직도 그린이 공간 색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그 시절의 농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며,그래서 당연히 아직 회색빛에 물들지 않은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한다.그 시간 특유의 아련한 첫사랑의 스냅사진들,성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서울 전학생,학교와 교실과 선생님들,그리고 그들 사이의 풋풋한 정서를 영화는 참 신통하다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재생시킨다.
여기에다 '난 잘 하는 게 아무 것도 없어,도대체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라는 사춘기 시절의 공통된 보편적 정서를 이 영화는 아주 적시에 끄집어내면서 즐겁고도 명랑한 일화들을 조용히 진행시켜간다.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나왔던 <러브 스토리>
그리고 그 <러브 스토리>의 눈밭 에피소드를 흉내내며 눈밭에 누워 서로를 격려하는 여학생들의 사랑스럽고도 맑은 우정
거기에 주인공 이랑의 첫사랑 '처럼' 등장하는,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과도하게 순진하면서도 다소 엉뚱한 남학생 철수를 등장한다.무슨 공식처럼 말이다.
그들은 정말 깨알같은 잔재미를 선사하며 영화 내내 분위기를 맑음 그 자체로 유지시켜 준다.앞서 언급했던 김만수의 '푸른 시절'의 노랫말 그대로이다.'수줍어 말못하고 얼굴만 붉히던' 시간들,'찡하는 마음이야 뭐라고 말못해도','괜시리 설레던' 어느 시절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이야기로 현재의 십대들에게 큰 감흥을 던져주기는 어려울 것이다.입시와 학교폭력과 사교육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이 영화는 어쩌면 하품 반사만 유발하고 끝났을런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의 소년소녀들을 겨냥한 영화가 아니다.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언젠가 십대라는 시간을 거쳤을 세대를 향하여 영화는 자신의 주파수를 맞추려 한다.이 영화의 기본적 구조 역시 앞서의 두 영화처럼 회상과 추억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사실 세월이 흐르면 어렵고 힘든 시간은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이다.그리고 힘든 시간의 기억들을 굳이 다시 끄집어내어 어려움을 다시 반복경험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써니>의 유호정이 자신의 기억들을 리콜해낸 후, 그 모든 일들을 '결과적으로 좋은 추억'으로 되새기며 끝내는 것도 이런 종류의 심리적 방어기제에 다름 아니다.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 <소중한 날의 꿈>에도 동일한 혐의 - 좋았던 시절만을 되새기며 세계의 현실을 잊으려는 태도- 를 적용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중한 날의 꿈>의 시간대에는 묘한 움직임이 있다.<써니>의 꿈과 회상이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끌어내어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그려내고,<굿바이 보이>의 시간대가 1980년대에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어 서 동화적인 환상이라곤 존재할 수 조차 없는 반면에,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또다른 시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순진한 소년 철수나 시인을 꿈꾸는 전학생 친구 소녀와는 달리,이랑은 매사 자신감이 없다.자신이 유일하게 꿈을 가질 수 있었던 육상 경기에서 라이벌 친구에게 패배한 다음부터 이랑은 '도대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무얼까'라는 회의에 빠져 있다.꿈을 잃어버린 것이다.
철수는 그런 이랑을 데리고 머나먼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다.공룡의 발자국을 보기 위해서다.(아마 전라남도 해남의 공룡 발자국을 보러 간 것 같은데,이 공룡 발자국은 1980년대 이후에 발견된 것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약간 오버의 혐의를 씌울 수도 있겠다.그러나 이런 오버는 그리 대단한 오류가 아니다.공룡이라는 동물의 상징성,오래 전에 존재했었던 그들의 이미지를 상징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이 아닌 것이다)
남녘의 호젓함 속에서,이랑은 공룡 발자국 속에 숨겨진 보편적인 꿈을 본다.화면은 공룡들의 의젓한 퍼레이드와 그들의 비상을 제시하며,이랑의 시간을 어떤 오리지널한 태곳적 시간으로 이끌기 시작한다.그리고 이랑은 그 환상들을 통해 자신의 꿈을 회복한다.공룡 발자국 속엔 이랑의 마음이 있고,이랑의 본질이 있다.그곳은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아닌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다.그곳에서 이랑은 자신의 빈 부분을 채울 수 있는 동기와 에너지를 만난다.그리고 꿈을 회복하여 다시 육상 경주에 나서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가 시간을 소환하는 방법은 앞서의 두 영화와는 다르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의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가장 좋았던 어느 시간 속에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지점을 향하여 이 영화는 시간적인 배경들을 이용하는 것이다.이때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1970년대 중후반은 자신의 특정성을 잃는다.그리고 이 시간이 1870년이어도,또는 870년이었어도 아무 이상이 없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시간의 소환은 참으로 여러 층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소소하게 거슬리는 점들을 가지고 있다.캐릭터들의 순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나친 문어체 대사들을 남발한달지,처음엔 꽤 중요성을 가질 듯 하게 보였던 전학생 캐릭터가 갑자기 실종되어버리는 것이랄지,문어체 대사들이 난무함에도 여전히 성우들이 아닌 영화배우들의 더빙이 (박신혜와 오연서와 송창의와 오연서가 목소리 연기를 한다) 1970년도 2011년도 아닌 이상한 시간대에 남겨진 것처럼 보인달지 하는 단점들이 있다.그러나 꿈은 강하다.특히 꿈 속에 현재의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돈과 소유에 대한 욕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어쩌면 바로 이런 순수한 꿈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가 바로 지금 시대라는 말을 이 영화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저렇게 찢어진 비닐 우산을 쓰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