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시대를 소환하는 방법1.<써니>

폴사이먼 2011. 9. 26. 11:45

1.가을

 

정말 가을이 온 것 같다.하늘은 갑작스레 높아보이고 하늘 아래로 보이는 건물과 산의 풍경들이 눈 앞으로 확 다가온다.마치 갑자기 생긴 눈의 이상처럼 시야가 변해버렸다.아침과 밤에 느껴지는 가을스런 차가움의 알싸함은 피부 감각기들을 예리하게 일깨우고,그 감각들은 가을과 관련된 내 두뇌 속의 기억들을 불러낸다.가을에 대한 내 기억.그것은 내 속의 어떤 비밀의 방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어떤 건 너무 바래서 알아볼 수 조차 없을 것이다.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빛나는 광휘 속에 잊혀지지 않을 장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음..마치 잊을 수 없는 영화 속의 어떤 순간들처럼,.그렇다,영화..가을의 내겐 영화가 있다.

 

꼭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그래도 가을은 내게 영화의 계절이다.이상하게 가을에 본 영화들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영화에 대한 내 기억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엔 어김없이 계절적 요소들이 끼어있는 모양이다.가을,특히 늦가을에 보았던 몇몇 영화들을 나는 아직도 또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한 계절이 영화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한 축복 같은 일일 것이다.그리고 다행스런 일이기도 할 것이다.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느낄 수 있는이런 종류의 짧디 짧은 풍요로움 덕택에 우리는 사소하고 지루하고 또 분주한 삶을 버텨나가는 것이다.

 

봄과 여름에도 많은 영화들을 보았다.어떤 영화들은 묵직한 카운터 펀치처럼 가슴 한복판에 박히기도 했고,또 어떤 영화들은 수많은 얕은 잔상들을 내 뇌리에 연속적으로 공급해서 결국 그들 나름의 예쁜 상흔을 남기도 했다.또 어떤 영화들은 괜히 보았다 싶을 정도로 지루하고 또 안타까워서 '왜 내가 이 짧은 삶 동안의 100분을 이런 영화들에 바치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거룩한 삶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 영화들에 대한 리뷰를 따로 쓰지는 않았다.리뷰는 내 삶 어떤 시기의 기록으로서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고,또 내 글을 읽는 분들과의 공감과 교류라는 또 하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말하자면 '선한 일'이긴 하지만,그렇다고 무슨 강제적인 법 조항 같은 것은 아니다.안 써도 되는 것이다.또 글을 쓰려면 동원해야만 하는 에너지와 시간의 문제가 있다.즉 어떤 열정,또 에너지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이성적인 깨달음이 시간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때,글은 나오는 것이다.즉 마음의 불가사의한 모험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글은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올 봄과 여름에, 영화 글이라는 싸움에서 진 것이다.(물론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비장해 보여서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지만) 글을 쓰는 데에 실패할 때,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삶의 무대에 진입해버린 것이다.그러나 그 무대 역시 완벽한 콘크리트 감옥은 아니다.또 어떤 삶의 변수가 주어질 때,우리는 과거의 무대로,또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떤 무대로 나아가거나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어쩌면 영화 <써니>가 얘기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야기라고 선의로 해석해줄 수도 있다.그러나 어쨌든 삶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의 어떤 기운이,그리고 아침에 맞은 가을 바람이 나를  변하게 했다.봄과 여름에 보았던 몇몇 영화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마음먹은 것이다.나는 언제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짤막한 단어 몇 개를 써 놓은 수첩을 뒤졌고,거기서 글을 만들게 되었다.글이란 이렇게 그냥 '만들어가는' 어떤 작업인 것 같다.

 

2011-16 .<써니> - 시대를 소환하는 방법

 

 

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21세기의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를 보며,나는 이 영화의 감독 강형철이 유능한 외과의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그는 청소년기의 수많은 디테일들과,'문득 문득' 시대상을  엿보게 하는 잔재미적인 요소들을 이곳저곳에서 모아와 즐겁고 명랑하게 봉합했다.그 봉합의 수준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관객의 감정에 적당하게 조응하기 때문에,어떤 요소들이 가지는 함량의 미달에도 불구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아무런 부담없이 미소짓고 넘어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게다가 이 감독은 무려 10명이 넘는 여배우들의 연기를 그야말로 적절하게 조율해 낸다.이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들이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이력의 '커리어 하이'를 찍는 건 아니지만,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나 많은 여배우의 하모니가 가능해졌다.그런데 이것 역시 감독의 능력이다.사실상 배우 연기의 반 이상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바로 영화감독이다.또 영화감독은 절대로 자기 영화에 나온 배우의 연기를 탓할 수 없다.책임은 그에게도 있기 때문이다.이런 면에서 강형철은 연기 코디네이터로서도 훌륭하다.

 

물론 다소 불편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방송 코미디 식의 말장난과 슬랩스틱 개그들,80년대를 회고하는 지나치게 편향된 비정치적 방식들은 특히 음악으로 대표되는 - 조덕배나 나미,리차드 샌더슨의 'reality',특히 보니 엠의 sunny  같은-영화의 부드러운 디테일들에 의해 보호되고 감싸인다.그것은 '영원한 기분좋음'이라 불릴 수 있는 '과거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재현'에 의해서 관객의 가장 쉽고도 깊은 정서를 향해 곧장 돌진한다.

 

특히 그 시절을 보냈던 중장년층 관객의 입장에서는 스크린 위에 바로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환상,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었다는 판타지를 도저히 버릴 수 없게 된다.그들은 연방 영화와 맞장구를 치게 되고,영화로부터 자신의 과거 역사를 소환한다.비교적 모두가 동등할 수 있었던 1980년대의 학교 교실과 '일진 미소녀'들로 표현되는 마일드하면서도 와일드한 로망,그리고 그들의 노래와 춤,깨알같은 잔재미를 선사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야말로 그들의 추억을 정조준하는 것이다.

 

특별한 사연이 없다면,누구나 이런 공격엔 대책이 없는 것이다.이렇게 이 영화는 대중의 구미를 잘 알고 있는 상업영화이다.물론 그것도 분명히 능력이라면 능력이다.그리고 언뜻 보면 매우 무해해보인다.그러나 '대중'과 "상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런 영화의 매우 이채롭게 보이는 정치적 스탠스나,또 나아가서 영화의 사회학적 정체성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않고 넘어가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더구나 수백만명이 보아버린 영화를 향해 말이다.

 

그러나 또한 그냥,추억을 위해 웃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 과도한 트집을 잡아내고 눈을 치뜨는 것은 너무 속좁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극장 문을 나선 다음에 영화의 많은 내용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게 될 이런 영화들을 향한 지적질은 좀 심한 오버는 아닐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그냥 넘어가도 된다.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사실 유독하거나 치명적으로 해로운 것은 아니다.공격은 필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태도와 달리,이 영화가 표상하는 한 세대(generation)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들은 1968년 정도에 태어난 것으로 그려진다.(마지막에 죽은 동창의 묘비에 태어난 해가 1968년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제는 철지난 정치적 레테르로 생각되는 386세대가 바로 그들이다.

한때의 여고동창생들이었던 그들은 25년이 흐르자,모두들 달라져 있다.유호정은 남편과 아이에게는 다소 무시당하지만 그래도 고급스런 강남의 아줌마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고 적어도 몇백 만원 정도는 가볍게 쓸 수 있다.죽어가는 친구 (종합병원 1인실에 누워있는 죽어가는 환자라는 설정은 참 친절하게도 익숙하다)는또한 성공한 독신의 여성 사업가다.거기에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보험 모집인과 골프장을 떠도는 또다른 동창,그리고 술집 작부로 전락해버린 알콜중독자 그리고 남편과 시댁 식구들과 또 생활고에까지 시달리는 서민이 그들의 리스트에 포함된다.

 

이 설정들을 이 영화는 한 세대 -386세대- 의 축약처럼 묘사한다.다소 범위가 좁은 설정이긴 하지만 또 일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이 세대가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그리고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방식,마지막으로 그들이 현재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의 전형을 그리고 있다.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은 이 세대에 대한 생각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그래야 이 영화에 대한 글은 정치성이나 이데올로기적 잣대들을 비껴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영화의 또다른 중요한 축,이 영화 주인공들의 과거 모습을 빠뜨려서는 안된다.적어도 영화의 절반은 그들의 여고시절에 바쳐지기 때문이다.물론 이 순수했던 과거는 현재 모습의 알리바이로 기능한다.과거의 순수함은 오염된 현재와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에 아주 쉽게 심정적 우위를 점령하는 것이다.하지만 이들의 과거와 현재가 전적으로 동등하게 비교되고 있는 것일까?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 중에서 실제적 주인 행세를 하는 쪽은 어느 쪽일까?

 

영화의 화자이자 추억의 주체는 40대의 서울 엄마 유호정이다.과거 회상 역시 그녀의 기억으로 구성된다.그녀가 과거를 회상하고 그 과거의 친구들을 찾아나설 때,과거는 점점 현재의 그녀 쪽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다.물론 과거는 아름답다.유호정은 과거의 자신들이 찍혔던 비디오 테이프를 바라보며,<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웃음짓고 눈물짓는다.이때 관객들의 뇌리에는 자신만의 비디오 테이프가 막 돌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다.그래서 이런 작업을 통해 마치 현재는 아름다웠던 과거를 통해 원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선의의 착각 같은 시도를 하려는 듯도 보인다.

 

 

 

그러나 유호정이 자기 딸을 협박하고 폭행을 가한 '현재의' 일진 소녀들에게 폭력으로 응징하러 과거의 '써니'들을 몰고 나갈 때 (이때 그녀는 여고생 교복을 입고 있고 그 모습을 본 경찰관은 그녀가 정신적으로 좀 이상하거나 코스프레 플레이에 빠진 중년으로 취급하며 어이없어 한다 그러나 그 교복은 현재로 밀려들어온 그녀의 과거를 상징하는 것이다.현재 시점의 경찰관이 그녀의 교복을 어이없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핸드백을 휘두르고 발차기와 주먹으로 폭행을 가할 때,그들의 과거는 이미 현재가 되어버린다.회상의 아름다움이 현재의 폭력으로 돌변할 때,과거는 현재 쪽으로 완전히 끌려나와 현재에 먹혀버리는 것이다.이때부터 이 영화의 예뻤던 과거는 완전히 현재의 시간 쪽으로 소환당하고,그 후부터는 그 순수함을 상실한다.현재가 쓰나미처럼 과거를 덮친 것이다.(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이 장면 이후부터는 과거의 회상장면의 분량이 현저히 줄어들고 현재의 '써니'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이 영화의 시간 개념은 현재에 매여 있다.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옛추억담이 절대로 아니다.이 영화는 현재에 기반을 두고 있는 현실 인간들이 과거의 장면들을 오버랩시키며 벌어지는 어떤 세대의 '사건해결방식'일 가능성이 더 높다.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서라면 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도 괜챦은 것이다.

 

이런 의미라면,적어도 두세가지 장면 정도는 얘기할 수 있다.

금방 얘기했던 장면.유호정이 자신의 딸을 폭행한 아이들에게 과거의 일진들을 몰고 가서 폭행하는 장면.이 장면이 어쩔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 폭력이 한계를 이미 넘어섰고,또 해결 자체도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어쩔 수 없는 경우에 어쩔 수 없이 'touch by touch'를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그리고 이 사건이 그렇게 무난하게 마무리 될 수 있었을까? 아줌마들이 딸 뻘 되는 아이들에게 저지른 이 폭력사건을 선정적인 언론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까?  말기 환자인 진희경이 그렇게 병원 바깥으로 친구들과 함께 몰려나가 딸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폭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옳고 그름,그리고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이런 식의 사건 해결은 이 세대의 어떤 '방식'의 면모는 아닐까? 'touch by touch'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은 이 세대의 어떤 한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실례로서의 증거란 말도 성립되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그거 밖에 안되는'것이다.그리고 바로 그 방식이 거의 정의라는 이름 하에 용인되는 것이 바로 이 세대인 것이다.그 장면들을 바라보며 통쾌함을 느꼈던 관객들 역시 그 방식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를 둘러싼 폭력적인 환경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한계에 항복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장면 역시 이 세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영화의 결말 부분이다.결국 진희경은 죽는다.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식장에서,<써니>의 소녀들은 보니 엠의 sunny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친구에 대한 마지막 애도로서 흥겨운 노래를 선택한 것이다.이 장면은 일정 부분 감동적이다.장례식에서 시끄럽게 음악 틀어놓고 춤을 춘다는 설정이 다소 이례적이긴 하지만,이 장면은 영화의 관성적인 측면에 의해서 정당성을 얻는다.또한 그래서 이 장면은 굉장히 완결적이다.그간의 과거와 현재의 여정이 마지막에 한 곳에서 합쳐지며 마치 대단원의 막을 내리듯 끝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진희경의 유언장을 집행한다는 변호사가 나타나더니 유언 내용을 낭독하는 것이다.그리고 그 내용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에게 돈을 나눠준다는 것이다.실적이 부족한 모험 모집인에겐 보험가입을,알콜 중독자 친구에겐 치료와 가게 자리를,국문과 출신이지만 생활고에 허덕이는 친구에겐 출판사 사장 자리를 분배하는 것이다.(물론 돈이 많은 친구에겐 돈을 주지 않는다)

 

왜 이렇게 해야했을까? 영화를 같이 본 아내는 분명한 사족이라고 그 장면을 불편해했지만,또 돌려놓고 생각해보면 뭐,그럴 수도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유산을 물려줄 친척 하나 없는 여인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친구들에게 그 많은 돈 중 일부를 나눠준다는 일은 어쩌면 일종의 미덕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이 장면은 거의 영화를 완결지을 수 있는 댄싱 장면 뒤에 꼬리처럼 달려 있다.어쩌면 그냥 내레이션 정도로 해결하가나 자막 정도로 처리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이 유산분배 장면은 꽤 오래 지속된다.극적인 정서적 장면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다루는 세대의 또 하나의 태도이자 해결 방식이다.나는 지금 그들이우정 마저 돈으로 사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진희경의 유산 집행은 '돈'에 대한 이 세대의 태도이기 때문에,적어도 그 세대 내에서는 정당성을 얻는다는 뜻이다.진희경은 죽어가며 친구들 사이의 계급 격차를 보았다.그녀는 그것을 안타까워했고 자신의 돈을 이용해서 그 격차를 줄여보려 한 것이다.친구들 사이의 빈부격차는 어쩌면 돈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심연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우정이,그들의 계급간 격차 때문에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걱정을 진희경은 안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진희경으로 대표되는 이 세대는 '돈'이 관계의 고리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돈을 통해서 그들은 잠시 환해지고 삶에 대한 희망을 얻는다.역으로 그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 그들이 처하게 될 제각기의 삶의 모습에는 매우 절망적인 모습이 담길 수도 있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거기에 이 세대가 대처하는 가장 손쉽고도 기본적인 방법이 바로 '돈의 분배'였던 것이다.

 

4년 전,이명박으로 대표되는 개발산업화 세력에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세대,한국의 경제 거품을 몸으로 경험했던 세대,(그리고 그에 이은 몰락까지 경험하고 있는 세대),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몸을 누일 공간 확보 마저 장담할 수 없는 세대,그러면서도 그 뒷세대에 대한 착취를 멈추지 않는 세대로서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또한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과 순수함으로 치장되고 마치 모든 사안들이 해결되었다는 듯이 (여전히 많은 '다른 써니'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 문을 나서는 태도 - 또 극장 문을 나서는 태도-는 이 세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쉽게 고쳐지지 않을 괴로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바로 현재의 40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기성 세대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구시대의 막내'로서 살아가는 이 사람들을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