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사이먼 2011. 8. 22. 09:41

나는 이제 70세를 훌쩍 넘기신 아버지와 어머니를,부모를  떠나 인간적으로 참 좋아한다.두 분은 참 착하게 인생을 사셨고 아들과는 달리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일탈한다는 것은 생각 조차 해보시지 않은 분들이다.나는 가끔 아버지를 '무법자'라고 부르는데,그것은 법 없이도 살아가실 수 있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이다.

 

두 분은 기나긴 삶 동안 재물이나 명예,그리고 권력 같은 가치들에 대해서 욕심을 내보신 적도 없으셨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살아오신 분들이다.그 어떤 이웃들과도 심한 다툼을 겪은 일이 없으셨고 사람들이 가끔은 겪게 되는 송사와도 거리가 머신 분들이다.다만 어머니가 70년대에 YWCA 활동을 하시면서 겪어야 했던 일련의 상황들이 있었고 광주민중항쟁의 유족이 되시면서 싸워야 했던 거대권력과의 마찰이 있긴 했다.그러나 나는 그분들의 기본적인 성향으로 볼 때,그런 일들이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평화와 유유자적을 사랑하시는 분들이라고 보아야 적당할 것이다.투사형 인간들은 결코 아니시다.

 

태어나면서부터의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도 약간의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과거의 기독교인들은 21세기에 새로 태어난 기독교인들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가끔 아버지는 1970년대의 '서울 기독교인들'을 회상하시며 지금의 거대교회 신도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수치스러워하신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대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거지 같은 계모임' 수준이라고 힐난하는 것 마저 용납하시는 것은 아니다.다만 교회가 사회에 지고 말았다는 사실만을 지적하시며 씁쓸해 하실 뿐이다.

 

그러나 내가 그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부분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다.아버지가 13세,어머니가 10세 때 교회에서 만났던 그 분들은 그 후 60년이 넘는 기간을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아오셨다.완전한 순정파 캐릭터이셨던 것이다.(물론 아버지가 대학교 때 다른 여학생과 영화를 보러 갔다가 어머니에게 정면으로 들킨 사건이 있긴 있다.아,그리고 정면이 아니다.어머니는 아버지의 뒷통수를 알아봤던 것이다)

 

길지 않은 여름 휴가 -내 여름 휴가는 대부분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이다- 를 부모님과 함께 보내려 마음먹었던 것은 더 나이가 드셔서 더 노쇠해지시면 어디를 모시고 가는 것 조차 힘들지 않겠는가 하는 갑작스런 깨달음 때문이었다.최근 들어서 체력은 더 떨어지시고 잔병치레가 잦아지셨으며 드시는 약의 종류도  많아지셨다.어딜 멀리 가시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는 경향도 다분해지셨다.게다가 예민한 어머니가 불면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더욱 집 안에 계시는 것만을 고집하시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나는 울산에 사는 여동생네의 이사를 들먹였고 그곳엘 꼭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고집을 부렸다.그리고 46년 전의 부모님의 신혼여행 코스 -부산과 경주- 를 다시 돌아보는 기념비적 여행은 또 어떻겠느냐고 바람을 불어넣었다.물론 1965년의 부산 경주와 2011년의 부산 경주가 똑같을리 만무하겠지만 이런 로맨티시즘을 자극하는 것이 그분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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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자동차 여행이었다.여행하면서 나는,어머니는 말이 없어지셨고 아버지는 잔소리가 많아지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버지는 운전하는 내내 도로사정과 지름길 내 약간은 거친 운전습관을 지적하셨고 휴식을 취해야 할 휴게소까지 지정하셨다.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인간 내비게이션'이라는 별명을 붙여드렸다.

 

46년 전 경주에서 부모님들이 묵었던 호텔의 이름은 '불국사 호텔'이라고 했다.물론 있을 리 없었다.두 분 역시 무덤덤해 하셨다.세월의 두께가 정서적 충격을 안기는 나이를 이미 지나셨던 것이다.가끔씩은 옛일이 기억나시는지 에피소드 몇 개를 이야기하시며 서로를 즐겁게 비난하시기도 했다.그러나 해운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경악하셨다.(매년 부산영화제 때문에 해운대엘 가는 나 역시도 변화하는 해운대의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결국 남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그것도 쌓아올려진 시간이다.또 60여년을 함께 살아온 분들에게 남은 것은 추억이며 일상이다.나는 은근히 그분들이 부러워졌다.

 

울산의 동생 집엘 갔더니 동생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1960년대 중반 사진이 담겨진 사진 앨범을 꺼내놓았다.거기에는 예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가령 이런 사진.재클린 케네디의 어떤 스타일을 카피하시려고 하는 어머니 옆에,키 큰 여자와 결혼한 키 작은 남자의 비애를 교묘하게 들어올린 뒷꿈치로 커버하시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다른 어떤 사진.

'나 잡아 봐라~~'가 그때의 대세였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이때의 데이트는 저렇게 마주 잡은 손,서로를 향하여 쳐다보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가능했다.비싼 휴양지와 값진 장소들은 필요하지 않았다.그저 들녘,그저 언덕 하나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또다른 사진.사랑이 듬뿍 묻어나오는 어떤 푼크툼.

누구에게나 저런 종류의 화양연화가 있다.그리고 그때의 너무나 아름다웠던 추억은 때때로 그 사람의 모든 일생을 지탱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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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를 울산에 남겨 두고 돌아오다가,꼭 다시 해운대엘 가야겠다는 은별이와 아내의 아우성에 다시 바닷가로 갔다.이제 곧 나와 떨어져 이사를 가는 두 사람의 압력을 견딜 자신은 없었다.적어도 반 년은 주말 아빠,주말 남편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좀 더 애틋했다.

 

은별이를 약간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은,바다가 무섭다고 물 속에 들어가지 조차 않으면서도 바닷가를 가야겠다고 욕심을 부린다는 것이다.타고난 엄살이라고나 해야 할까.

 

고집이 엄청 세다는 것이 딸로서의 장점이자 약점인 이 녀석은 몇몇 특유의 표정들을 가지고 있다.어떤 때 이 녀석은 한없이 뾰루퉁해지는데,특히 엄마의 어떤 부당한 요구,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게 될 때,은별이는 일정한 패턴의 표정으로 엄마에게 대항한다.

 

 

 

가령 이런 표정.입술을 약간 앙다물고 눈을 저 사진에서 보다 약간 가늘게 뜬 채,이녀석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따지고 든다.은별이의 논리는 거의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녀석에게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치사하게 복수하기 시작한다.가령 언제나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은별이의 자세를 공격하면서 건드리는 것이다.

 

 

 

 

꼭 이렇게 앉아있기 때문에 은별이는 비난을 자초하는 것이다.그러나 내 공격은 언제나 효과적으로 방어된다.은별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아빠,부드~~럽게 이야기 하셔야죠.왜 싸우듯이 얘기하시는 거에요? 아빠가 그랬쟎아요.부드럽게 얘기하라고.

 

그렇다.부드~~럽게 말을 꺼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그러나 부드럽게 얘기하면 공격이 잘 안된다.간단하게 제압당하는 것이다.

 

 

 

아빠를 간단하게 정리하고서,은별이는 이렇게 여유있게 해변에 앉아 저만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시간은 가고 또 오는 것이다..